◈ 031.
베히모스의 공략은 그리 가망 없는 이야기가 아니리라.
검을 휘둘러가던 이진한은 내심 그렇게 생각했다.
황궁 지하도에서 베히모스와 싸웠던 것이 800레벨을 조금 넘었을 때였다.
당시엔 그것이 최상위 랭커로, 장비 역시 그 수준에 맞춰 세팅된 상태였다.
비록 공략대의 인원이 수십을 넘었다곤 하나, 이진한은 현재 혼자의 힘으로 그들에 지지 않는 화력을 낼 자신이 있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초월지경인 대마도사 클래스까지 오른 상태가 아닌가. 그렇기에 근접전으로 베히모스의 견적을 본 다음 거리를 벌려 마법과 원거리 공격으로….
“…?”
그 순간, 모든 감각이 끊어졌다.
시야가 검게 물듦과 동시에 귓가엔 이명이 끊이질 않고 이어졌다.
그 사이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엘레오노라의 목소리에 겨우 눈을 뜨자, 온통 희뿌연 풍경이 들어왔다.
“…컥.”
이진한은 울컥 피를 토했다.
시뻘건 핏덩어리들이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 안개에 감싸인 것처럼 희미했던 감각이 다시 명확하게 되돌아왔다.
“대체 무슨….”
분명 베히모스를 공격하기 직전이었다.
그 순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자신의 몸이 콜로세움 벽에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곧 꺼내드릴게요!”
상당히 깊게 파묻혔는지 엘레오노라가 신음과 함께 그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무너져가는 잔해 속에서 끌려 나온 이진한은 왜 이런 상황이 일어난 것인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근접 카운터(approaching counter).
‘제길, 그걸 잊을 줄이야.’
베히모스는 공략 과정에서 체력 소모량에 따라 총 다섯 개의 페이즈가 있었다.
그 중 첫 번째가 바로 근접 카운터.
일정 확률로 발동되는 것으로 근접 공격의 데미지를 전부 반사해버리는 특성이었다.
“…진짜 더럽게 아프네.”
전신의 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짓뭉개진 것 같았다.
비척이며 일어선 이진한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엘릭서를 꺼내 마셨다.
바닥을 기던 HP가 다시 회복되자, 그는 겨우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볼 수 있었다.
“흡-!”
엘레오노라가 자신을 구조하는 사이 일레이나 혼자 베히모스와 맞서 싸우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농락당하고 있었다.
현재 그녀의 레벨은 예전 당시 공략 대의 수준에도 턱없이 미치지 못한 상태. 그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싸움이 성립될 리 만무했다.
“꺄아아악-!”
바닥을 휩쓸던 베히모스의 꼬리가 그녀가 만들어낸 토벽을 단숨에 부수더니 이내 그녀의 몸을 후려쳤다.
용케도 그 직전에 실드를 펼쳐 직격을 막아내었지만, 그 충격까지는 막지 못했는지 땅을 몇 번이나 튕겨나간 끝에 겨우 일어난 그녀의 이마에선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
암울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던 베히모스를 바라보던 그녀는 이진한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 즉시 플라이 마법으로 잽싸게 도망쳐오더니, 단내가 풍길 정도로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일어났으면 빨리 좀 도와줘요!”
“잘 싸우는 것 같던데.”
“장난해요? 진짜로, 내가 이게 무슨 고생인지….”
“담배 끊으라는 소리는 하지 않을 테니까 운동이라도 조금 해. 그거 얼마나 움직였다고 헉헉거리기는.”
“당신이 할 말이에요? 그렇게 피투성이인 몰골을 해놓고.”
일레이나는 이진한에게서 받아든 포션을 쭉 들이켠 뒤 빈 병을 내던졌다.
베히모스는 느긋한 태도로 이쪽을 향해 몸을 돌린 상태. 그 여유로운 모습을 본 이진한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닫힌 필드에서 탈출하는 방법엔 두 가지가 있다.
해당 필드의 해금 조건을 충족하거나, 죽거나.
“방법은 있어요? 또 아까처럼 한 대 맞고 날아가는 거 아니죠?”
“얻어맞고 정신 차렸으니까 걱정하지 마.”
엘릭서로 회복했지만, 아직 찌뿌둥한 기색이 전신에 남아있었다.
이진한은 팔다리와 목을 돌려주며 관절을 풀고는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
“일레이나, 뒤에서 지원해줘. 최대한 너희 쪽엔 접근하지 못 하게 할 테니까.”
“알았어요.”
“미르엘은, 아직 힘들어 보이네.”
“…죄송해요.”
“아니야.”
힘없이 고개 숙인 미르엘의 모습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서로 간의 격차를 생각해본다면 즉사하지 않은 것으로 다행이었다.
기사 클래스인 덕분에 방어력이 높아 버틴 것이었지, 일레이나나 엘레오노라였다면 벽에 부딪히는 순간 목숨을 잃었을 터.
“엘레오노라는 미르엘을 챙겨줘. 간간이 여유 되면 지원해주고.”
“네.”
엘레오노라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끝으로 이진한은 몸을 돌렸다.
크르르-.
베히모스가 천천히 그들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사자의 머리, 뱀의 꼬리, 그리고 박쥐의 것인 듯한 날개를 살랑거리며 마치 먹잇감을 보는 듯 두 눈을 날카롭게 떴다.
“퉤.”
이진한은 손에 침을 뱉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갑작스러운 보스 레이드였지만, 이 세계에서 깨어난 뒤로 갑작스럽지 않은 일은 없었다.
당장 로그아웃을 할 수 없는 것부터 그랬으니.
파앗-!
이진한은 순식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마경의 드래곤, 벨라시온.
미들턴의 리치킹, 아이돈.
그 둘을 쓰러뜨릴 수 있었던 것은 확실한 공략 법과 이전에도 수없이 싸워온 경험 덕이었다.
하지만 베히모스와의 교전은 과거에 단 한 번, 그것도 쓰러뜨리지 못해 봉인한 것이 전부였다.
강함을 따지자면 앞의 둘이 훨씬 강할 것이다. 만일 이 자리에 자신이 아니라 그 둘 중 하나를 데려다 놓아도 베히모스를 상대로 어렵지 않게 승리를 따낼 터.
‘하지만 나는 아니다.’
방금도 그랬듯 단 한 번이라도 유효타를 허용한다면 빈사 상태에 이를 것이 분명하다.
다행히 베히모스가 여유를 피워주었던 덕분에 일행이 무사할 수 있었지만, 또 그럴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쐐애애애애액-!
이진한의 움직임을 따라 베히모스의 꼬리도 위협적인 파공성을 뿜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 몸을 꿈틀거리며 순식간에 땅을 파고들더니 이내 그의 발밑에서 솟구치며 목을 노려왔다.
캉-!
이진한이 검을 들어 뱀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 기세가 워낙 거셌던지라 벽 근처로 쭉 빌리고 말았다.
이대로라면 직전과 같이 콜로세움 벽을 부수며 파묻힐 상황. 하지만 그는 왼손을 들어 올리며 검지와 중지를 교차하는 수결을 맺었다.
“타올라라.”
파아아앗-!
시뻘건 불꽃이 일어난다. 그것은 순식간에 뱀의 머리를 휘감았고, 마치 기름에 불을 붙인 것처럼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키이이엑-!
뱀은, 괴성을 토해냈다.
몸이 불에 타는 고통에 힘겨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놀기 좋은 장난감이 반항해 분노를 표하는 것이었다.
“아직 항마력이 높다는 거겠지.”
이진한은 가늘어진 눈으로 인벤토리에 손을 뻗었다.
아직 페이즈가 1단계였으니 수많은 가호가 그 몸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다.
베히모스는 그 혼자 어찌 못하리라 생각하고 있기에 제 꼬리만 움직이며 여유를 보이는 것일 터.
턱.
이윽고 이진한의 손에 이끌려 나온 것은 크리스탈 해골이 달린 시커먼 스태프였다.
“이전에는 레벨 차이가 크게 나서 효과가 없었지만.”
베히모스의 레벨은 1254로 황궁 지하도에서 싸웠을 당시 거의 400레벨이 넘게 차이가 났다.
지금은 고작 그 격차가 절반에 줄어든 것에 불과했지만, 능력치는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으니 다른 결과가 나타날 터.
그렇기에 이진한은 해골 스태프의 끝을 바닥에 내려찍으며 나지막하게 읊었다.
「저주하라, 움직이는 모든 것을. 원망하라, 살아있는 모든 것을. 빛이 저물고, 어둠이 뒤덮을 때까지 심연은 끝없이 깊어지리니」
흑마법사 클래스 상위 마법
「은빛 부식(Silver corrosion)」
주문이 끝나고, 크리스탈 해골의 눈과 코를 비롯한 구멍으로부터 은빛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수은과 같이 물렁물렁해 보이는 그것은 제 몸의 불을 전부 꺼트린 베히모스의 꼬리로 향했다.
취이이익-!
마치 염산들 들이부은 것처럼 그 몸이 부식되기 시작했다.
키에에엑-!
뱀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비명을 토해냈다.
은빛 부식은 그 자체에 데미지도 만만치 않지만, 끈질긴 유지력에 장점이 있었다.
더군다나 대상의 가호를 벗겨내고 결국엔 그 내부까지 파고드는 기괴한 흑마법이었다.
다만, 효과가 좋은 만큼 단점도 많았다.
단일 대상으로밖에 사용하지 못했고, 마법을 지속하는 동안 계속해서 마나가 뭉텅이로 빠져나갔기에 대단위 전투에선 효율이 높지 못했다.
이전의 싸움에서 사용하지 않았던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벨라시온은 어차피 가볍게 디스펠 해낼 터이고, 이진한보다 더 높은 경지의 아이돈은 어렵지 않게 그것을 무효화시킬 것이 분명했기에.
하지만 베히모스는 고대 마수였다.
단지 조금 더 튼튼하고, 조금 더 단단하고, 조금 더 질긴 가죽을 지닌.
항마력으로 저항하거나 흩어버릴 순 있으나, 자신의 몸을 옭아매는 저주를 디스펠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크어어엉-!
부식화는 꼬리를 타고 이어져 놈의 몸까지 이르렀다.
베히모스는 거칠게 몸을 뒤집으며 포효를 내질렀지만, 기어코 그 전신이 부식화의 대상이 되었다.
쉬이이익-!
이진한은 제 역할을 끝낸 스태프를 인벤토리로 돌려보낸 뒤 다시 검을 뽑아 들고 다시 앞으로 쇄도했다.
그 몸을 감싸고 있던 저항력과 가호를 벗겨내는 것엔 성공했지만, 베히모스라는 마수는 저주 하나로 유의미한 타격을 주기에 너무 무거운 존재였다.
실질적으로는 그 체력의 일 할도 채 줄어들지 않았을 터.
파아아앗-!
그렇기에 이진한은 검을 다잡았고, 그 위로 찬란한 빛이 다시금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페이즈는 이미 1단계를 넘어 4단계, 그 등 뒤로 한 쌍의 날개가 새로이 솟아나는 것까지 이르렀다.
근접 카운터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기에 그는 마음껏 베히모스의 몸을 베어 갈랐다.
쉬아아아아악-!
사자의 몸 위로 살이 기다랗게 쩍 벌어지며 녹색 체액이 터져 나왔다.
검에서부터 전해지는 손맛에 이진한은 씩 웃으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어쭙잖은 검술보다는 그냥 힘껏 휘두르는 게 제일 낫단 말이야.”
베히모스는 위기감을 느낀 것인지 두 쌍이 되어버린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로 솟구쳤다.
그 특유의 회복력 덕분에 상처가 벌써 회복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전처럼 단숨에 원상태로 되돌리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유의미한 타격이 쌓인 듯했다.
“들어가는 데미지는 대충 이 정도고.”
페이즈5에 다다랐다.
콜로세움의 천장 끝까지 날아오른 베히모스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이내 지상을 향해 작열하는 불꽃을 토해냈다.
‘저쪽은 문제없나.’
일레이나가 자신들을 감싸는 강력한 실드를 만들어내는 것을 본 이진한 역시 팔라딘 클래스의 가호를 몸에 둘렀다.
베히모스가 토해낸 불꽃은 콜로세움의 전역을 파괴하며 지상을 지옥도로 바꿔놓았지만, 드래곤의 브레스도 막아낸 대천사의 가호를 단번에 뚫어내지 못했다.
“…후우.”
이진한은 긴 한숨을 토해냈다.
엘릭서로 회복했다고 할지라도 전신이 짓뭉개졌던 충격이 작지 않았다. 머리도 지끈거리는 것이 기껏해야 초월 마법 두 번이 한계일 듯싶었다.
우우우웅-.
베히모스는 다시 한 번 불꽃을 토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무리 대천사의 가호라 할지라도 또 한 번 그것에 직격당한다면 자신 역시 휩쓸릴 터.
“그렇다면.”
부욱-.
인벤토리에서 스크롤 다발을 꺼내 찢은 그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죽기 전에 죽이면 그만이지.”
대마도사 클래스 초월 마법
「인피니트 라이트닝」
대마도사 클래스의 초월 마법 중 가장 캐스팅 시간이 짧고, 마나의 소모가 적으며, 발동이 빠른 마법이었다.
파아아아앗-!
하늘이 천장으로 막혀 있어서 그런 것인지 마경 때처럼 구름이 몰려들거나 그러지 않았다.
단지 그 위로 눈부신 보랏빛 섬광이 떨어져 내려 베히모스의 몸을 강타했을 뿐.
크어어어어-!
그 커다란 몸이 순식간에 콜로세움 바닥으로 떨어져 경련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재생력과 저항력은 초월 마법의 데미지를 견뎌낼 정도인지 베히모스는 덜덜거리면서도 조금씩 몸을 일으켜 세웠다.
“…곧바로 일어나기는 힘들 거로 생각했는데.”
곧바로 다음 초월 마법을 준비하고 있던 이진한의 얼굴이 굳었다.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하면서 결정타를 준비해야 하나.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마법의 캐스팅을 취소하고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하나.
수십 번의 고민을 거듭하던 그때, 베히모스가 서 있던 바닥이 흔들리며 굵은 나무줄기가 솟구쳐 올랐다.
“…나이스 어시스트.”
이때까지 숨죽이고 있던 일레이나와 엘레오노라가 나선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미르엘이 대검을 바닥에 찍어 누르자 베히모스의 몸을 옭아맨 줄기가 얼어붙었다.
크어어어엉-!
베히모스가 속박된 시간은 찰나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짧았다. 거칠게 몸을 움직여 옭아맨 얼음 줄기들을 전부 부쉈고, 이내 땅을 박차며 앞으로 쇄도했다.
하지만 이미 영창을 끝낸 이진한은 짙은 미소와 함께 손가락을 튕겼다.
“천 년 만의 공략 성공이다.”
딱-!
청아한 소리가 콜로세움 한가운데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