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0.
Lv.1254 「베히모스」
그 기원은 오스칼 황궁 지하에 도사리던 보스 몬스터였다.
당시 공략대는 베히모스와의 여러 차례 교전 이후 쓰러뜨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고, 대신해서 강력한 결계로 봉인해두는 것으로 퀘스트를 완료했다.
황궁 지하에 묶여 있어야 할 녀석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것인지는 둘째 치고, 지금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문제일 따름이었다.
“…….”
하지만 이진한의 표정엔 그리 다급한 기색이 없었다.
자신감에서 기인한 여유가 아니었다.
단지 머리가 복잡해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냉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Я буду ждать. Тысячу лет назад.」
의미를 알 수 없는 메시지.
도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전하려 했던 것일까.
이 세계는 자신의 예상대로 다른 세계인 것인가, 아니면 아직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는 도중일까.
어느 것 하나 명확하게 밝혀내지 못했기에 혼란스러울 따름이었다.
쿵-.
베히모스의 그 거대한 몸이 콜로세움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직은 사슬에 묶인 상태 그대로였으나, 그 줄기가 하나둘씩 끊어지고 있는 걸 보니 머지않아 봉인에서 풀려날 것으로 보였다.
일레이나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후퇴한 뒤 태세를 정비하고 싶어도 이 공간 자체가 격리된 차원으로 보였다. 아마 특정한 조건을 달성하기 전까진 나가지 못하는 종류일 터.
“…알고 있는 정보 없어요? 뭐라도 해결책을 찾아봐야죠! 아까 보니까 뭔가 아시는 눈치시던데.”
다급한 표정으로 물어온 일레이나의 말에 이진한은 입을 열었다.
“녀석의 이름은 베히모스, 아주 오래전부터 오스칼 황궁 지하도에 봉인되어 있었던 고대 마수다.”
“황궁 지하도에요?”
미르엘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으나, 엘레오노라는 짚이는 것이 있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본 적 있어요. 고대 영웅들이 당시 황제의 의뢰로 황궁 지하에 있는 던전을 공략했다고. 베히모스는 분명 그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마수의 이름이었죠.”
“아마 같은 녀석일 거다. 어째서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황궁 밑에 계속 방치하기는 위험하니까, 검은 현자의 후손들이 이곳으로 옮겨 놓은 걸까요? 하필 왜 여기다 한 건지…….”
일레이나는 한숨을 내쉬며 불평을 내뱉었다.
운도 지지리 없지, 사람이 그토록 많을 때는 아무런 기미도 없다가 자신들이 방문했을 때 이런 상황이라니.
“…일단 공격이라도 해볼까?”
이진한은 가볍게 손을 들었다.
주박의 사슬에 묶여 있는 상태이니 별 소용은 없겠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니 가볍게 마나를 끌어올렸다.
“[체인 라이트닝].”
파지지직-!
시퍼런 전격이 허공에 솟구쳐 그 전신을 강타했다.
본래 베히모스는 물리 공격과 마법 공격에 대한 저항이 최대치로 돼 있어 어지간한 공격이 통하지 않는 극강의 방어력을 자랑했다.
자체적인 회복력 역시 뛰어나 랭커들이 데미지를 누적시키는 것보다 회복하는 체력이 더 큰 비정상적인 구조를 지닌 놈이었다.
그렇기에 공략대는 베히모스를 쓰러뜨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봉인을 결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작금,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이진한의 두 눈이 깜빡였다.
크어어어어어어-!
전격에 휩싸인 베히모스가 거센 신음을 토해냈다. 그 몸 위로 새하얀 연기까지 피어오르는 것을 보니 정말로 타격이 있는 듯했다.
“먹히는 것 같은데요?”
“…약해졌나?”
이야기와는 다르지 않냐며 일레이나가 두 눈을 가늘게 뜨자, 이진한은 뺨을 긁적거렸다.
‘그러면 살짝 욕심도 나는데.’
베히모스는 마르지 않은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갈구로부터 비롯된 존재.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폭식의 마검이라 불리는 티르빙이었다.
티르빙은 월드에서도 몇 없는 신화 등급의 검으로, 마르바스와의 싸움에서 반 토막 난 듀란달보다 한 단계 높은 등급이 높았다.
성검으로 따지자면 엑스칼리버와 동급으로 여겨지는 것이었으니.
베히모스의 공략 보상이 마검 티르빙이라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었다.
“풀리기 전에 공격하자.”
“알겠어요.”
곧 그들은 이진한을 필두로 무차별적인 마법을 퍼부었다.
형형색색의 마력이 터져 올랐고, 그때마다 베히모스는 전신을 흔들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냈다.
푸쉬시식-!
시커먼 털로 뒤덮여 있던 피부는 짓눌려 문드러졌고, 약해진 부분은 살점이 떨어져 나갔으며, 일부는 뼈가 드러난 곳도 있을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쿠궁-.
베히모스는 이내 자리에 주저앉았다.
종래엔 주박의 사슬에 기대어 누워 있을 정도로 피폐해진 상태가 되었다.
“다들 물러나.”
이진한은 소매를 걷으며 앞으로 나섰다.
혹시라도 모를 반전을 위해 결정타를 날려 끝낼 생각이었다.
“[초월마법].”
대마도사 클래스의 초월 마법
「진홍의 보옥」
선택한 것은 가장 숙련도가 높은 초월 마법인 진홍의 보옥이었다.
가진 마나의 절반을 쏟아 부어 술식을 구축한 그는 이내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구우우우-.
새빨간 태양이 콜로세움의 천장 위로 피어올랐다.
동굴 안쪽에서는 산맥 자체가 무너져 내릴까 사용할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격리된 공간인 이상 사양할 필요는 없었다.
이윽고, 콜로세움 안에 피어난 태양은 이진한의 손짓을 따라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고, 이내 베히모스를 집어삼켰다.
쿠구우우우우웅-!
핵폭탄이라도 터진 듯 지축을 울리는 진동이 온 천지를 휩쓸었다.
곧이어 폭발의 여파가 세찬 폭풍이 되어 사방에 닥쳤고, 머리카락이 쭈뼛거릴 정도의 파장이 그들에게 닿았다.
물론 그들 역시 후폭풍에 대비하고 있었다.
쿵-!
미르엘이 대검을 꽂아 넣자 기다란 빙벽이 솟구쳐 올랐다.
그 위로 일레이나와 엘레오노라의 실드가 덧씌워졌고, 빙벽의 견고함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후우.”
뭉텅이로 빠져나간 마나에 탈력감을 느낀 이진한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거두었다.
무려 천년 만에 쓰러뜨린 상대였다.
가히 숙적이라고 불러도 될…….
쐐애애액-!
자욱하게 피어오른 연기를 꿰뚫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한 줄기 궤적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
만에 하나 베히모스가 쓰러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기에 경계는 하고 있었지만, 아차 하는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궤적은 순식간에 그를 지나쳐 뒤쪽에 있는 이들에게 빛살처럼 쇄도했다.
“읏?!”
그 경로 끝에 있던 것은 엘레오노라였다.
빙벽이 순식간에 꿰뚫리고, 그 위에 씌워진 실드가 종잇장처럼 찢겨나갔다.
그녀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재차 마법을 발동하려 했지만, 아무리 빨라봤자 이미 늦은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엘레오노라님!”
그 순간 미르엘이 몸을 날렸다.
생각지도 못한 기습이었기에 반응이 조금 늦었지만, 이를 악물고 땅을 박찼고 끝내는 기어코 제 주인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
하지만 미르엘 그 본인이 표적이 되어버린바. 그녀는 황급히 제 대검을 몸 안쪽으로 끌어당겨 방어했지만, 순식간에 휘말려버리고 말았다.
콰아아앙-!
콜로세움의 끝, 그 가장자리를 둘러싼 벽 위로 미르엘의 몸이 박혀 들었다.
그 주위는 잔뜩 우그러든 상태였고, 눈을 깜빡일 때마다 자글자글한 균열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컥.”
벽에 파묻힌 미르엘이 피를 토해냈다.
두 눈과 귀, 그리고 코에서까지 시뻘건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니 내상이 깊은 듯했다.
“…꼬리?”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일레이나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베히모스 쪽에서부터 이쪽까지 이어진 것은 뱀의 꼬리 보이는 것이었다.
이를 악문 일레이나가 황급히 손을 휘두르자 바람이 휘몰아치며 날카로운 칼날을 벼려냈지만, 베히모스의 꼬리는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쉬이익-!
오히려 그 공격에 반응하듯 미르엘이 있는 쪽에서부터 콜로세움 벽의 가장자리를 길게 훑고 지나가 기다란 궤적을 만들어냈으니.
“미르엘!”
엘레오노라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내린 미르엘에게 달려갔을 때, 이진한은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상대가 마수이니 성검 계열의 검이었다면 좋았겠지만, 가지고 있던 듀란달은 마르바스와의 싸움에서 반 토막 난 상황이었다.
하지만 손에 쥐고 있는 것 역시 고레벨제 무기답게 제법 스펙이 좋은 편이니.
파아앗-!
찬란한 오러 블레이드가 그 위에 피어오르며 제 옆을 지나간 꼬리를 향해 휘둘러졌다.
캉-!
하지만 극강의 방어력은 여전한 듯 흠집조차 나지 않으며 단지 그 충격에 출렁이는 것을 끝으로 다시 주인의 품을 향해 회수되었을 뿐이었다.
쉬이익-.
진홍의 보옥이 쏟아진 여파로 사방을 뒤덮은 연기가 어디선가 불러온 바람에 흩날렸다.
이윽고 그것이 모두 걷혔을 때, 이진한은 주박의 사슬 가운데 뒤엉킨 베히모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
하지만 주박이라는 이름이 무색해지는 광경이었다.
이진한과 그녀들이 쏘아낸 마법 때문에 여기저기 삭고, 그을리고, 녹아내려 형태만 유지할 뿐 더는 봉인의 효과가 이어지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크르르─.
베히모스는 몸을 뒤틀어 전신을 옭아매고 있던 사슬을 벗겨내었다.
그러곤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그 위에 새겨진 상처들을 순식간에 회복해가기 시작했다.
“…우릴 이용한 거라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진한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자신들의 공격에 타격이 있는 척을 했던 것은 제 몸을 구속하고 있는 주박의 사슬에 데미지를 주기 위함이었던가.
두둑, 두둑.
사슬을 전부 벗겨낸 베히모스는 땅에 두 발을 딛고 마치 기지개하듯 뒤쪽으로 천천히 몸을 뻗었다.
마치 이쪽은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에 이진한의 이마 위로 시퍼런 힘줄이 솟아올랐다.
“…엘레오노라, 미르엘은?”
“당장은 움직이기 힘들어요!”
그는 슬쩍 뒤쪽을 바라보았다.
엘레오노라와 일레이나가 양옆에서 힐링 마법을 퍼붓고 있음에도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정도 타격이 있었으니 아마 전신의 뼈가 아스러졌을 터.
단번에 숨이 끊어지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할 따름이었다.
“…그렇다면.”
푹.
바닥에 검을 꽂아 넣은 이진한은 이내 인벤토리에서 장궁을 꺼내 들었다.
곧이어 마법이 각인된 미스릴 촉의 화살들이 시위에 걸렸고, 이내 한계까지 당겨지며 팽팽해졌다.
쉬이이이이익-!
그가 손을 놓자, 각기 다른 방향으로 쏘아진 화살들이 베히모스의 요혈을 파고들었다.
크르르-.
녀석은 겉으로 보기에 한껏 여유를 부리고 있었지만, 내심 이진한을 경계하고 있었기에 화살들이 지척에 다다르자 벼락같이 앞발을 휘두르며 그것들을 때려 부쉈다.
허나 그것 또한 의도된 바였다.
콰아아아아아앙-!
베히모스가 화살을 때려 부순 순간, 미스릴 촉에 각인되어 있던 마법이 발동하며 거대한 폭발이 그 전신을 덮쳤다.
크륵?!
생각지도 못한 공격이었는지 신음을 토해내며 몸을 빼내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허나 이진한은 그 순간의 틈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파앗-!
자욱하게 피어오른 연기를 섬광처럼 꿰뚫고 모습을 드러낸 그는 검을 치켜세우며 소리쳤다.
“드래곤도 혼자 잡았는데, 마수라고 별거 있을까 봐!”
그 직후.
눈부신 섬광이, 천지를 베어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