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29화 (29/210)

◈ 029.

“베르너님?”

“왜 그러세요?”

그만 가자는 말에 미련 없이 그 뒤를 따르던 이들이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다만, 그 옆에서 이진한의 표정을 본 미르엘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곤 살며시 몸을 낮춘 채 검 손잡이 위로 손을 가져가며 주위를 경계했다.

“잠깐만.”

이진한은 잠시 일행을 돌아보며 그렇게 말하곤, 이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그렇지.’

게임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가, 상상이 너무 지나쳤던 것 같았다.

소설이나 만화도 아니고 어떻게 게임을 하다가 다른 세계로 넘어온단 말인가.

에피소드의 도입부치곤 조금 길긴 했지만, 정말로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다.

그렇게 쓴웃음을 지은 이진한이 알림으로 손을 가져갔고.

「Я буду ждать. Тысячу лет назад.」

“……?”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자의 나열이 눈앞에 나타났다.

조심스럽게 그것을 건드려보아도 형태는 바뀌지 않았다.

대현자의 눈으로도 해석이 되질 않았고, 무언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없나 싶어 뚫어지게 바라보았지만,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거 언제까지 참아야 해요?”

숨까지 참으며 소리를 죽였던 일레이나가 볼멘소리로 불평했다.

이진한은 그것에 미안하다며 고개를 까딱이고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손가락으로 그 위에 무언가를 끄적거렸다.

“너희 혹시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

엘레오노라와 일레이나가 그의 등 뒤로 다가와 바닥에 쓰인 내용을 바라보았다.

이진한은 사뭇 기대를 담아 그녀들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둘 다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모르겠어요. 처음 보는 문자네요.”

“규칙성이 있는 걸 보니 문자는 맞는 것 같은데, 의미는 모르겠네요. 고대 룬어랑 모양이 흡사한 것 같은데 그쪽은 제 전공이 아니라.”

“흠.”

이진한은 미간을 좁힌 채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대체, 대체 무엇일까.

이 갑작스러운 메시지의 내용은 자신에게 무엇을 알리고자 하는 것일까.

다른 세상에 온 줄 알았거늘, 아직 게임 속이라는 걸까.

아니면 진즉에 게임을 벗어났다는 이야길까.

‘파파고라도 있으면 좋았을 텐데.’

보통 이런 알 수 없는 의미를 지닌 문자는 이스터에그로 활용하기 마련. 가볍게 긁어다가 파파고에 붙여넣기만 하면 깔끔하게 번역되었을 텐데 아쉽기 짝이 없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이진한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을 때, 그 앞으로 새로운 알림이 떠올랐다.

「서브 퀘스트」 ─ ∑꺼지지 않는 불꽃

“…….”

명확한 설명도, 구체적인 보상도 없는 퀘스트였다.

흘깃 그것을 바라보던 이진한은 제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또, 또 왜 그래요. 말해주던가, 아니면 나가든가 하면 안 돼요?”

일레이나가 움찔하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런 그녀를 흘깃 바라본 이진한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가자.”

서브 퀘스트는 말 그대로 서브인 퀘스트로 굳이 할 이유가 없었다.

메인 퀘스트에 필요한 것은 보조 퀘스트라 명시되어 있다. 머리가 복잡한 와중 이상한 일에 휘말리기 싫었기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진한은 이내 밖으로 나가는 통로 앞에서 멈춰서고 말았다.

“…….”

투명한 벽이 길을 가로막고 있다.

그가 손을 들어 벽 위를 천천히 쓰다듬을 찰나, 그 모습을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일레이나가 벽과 충돌했다.

“…큭!”

그 앞에 무언가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듯했다.

제법 큰 소리와 함께 제 코를 부여잡고 뒷걸음질 친 그녀는 이내 눈물이 잔뜩 고인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 이게 뭐죠? 읏, 피?!”

“투명한 벽이네요. 갑자기 왜 나타난 걸까요.”

뚝뚝 떨어지는 코피를 보며 일레이나가 기겁하고 있을 찰나, 엘레오노라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벽을 두들겼다.

분명 저 너머의 풍경은 선명하건만, 넘어갈 수 없는 것이 공간 자체가 분리된 개념인 듯했다.

“마법은 아닌 것 같은데.”

“잠시 비켜보시겠습니까.”

이진한과 엘레오노라가 살짝 비켜나자, 그 위로 미르엘의 대검이 휘둘러졌다.

캉-!

거친 고성이 동굴 안을 울렸다.

마치 단단한 바위를 두드린 듯한 소리였지만, 조그마한 생채기조차 생겨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웅-.

눈부신 오러가 대검 위에 깃든다. 이윽고 그것은 새하얀 궤적을 남기며 휘둘러졌고, 이내 동굴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광음을 토해냈다.

“큭…….”

미르엘은 얼굴을 찌푸리며 검을 쥔 제 손을 쓰다듬으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벽은 여전히 멀쩡할 따름이었다.

화르륵-!

뒤이어 시뻘건 화마의 세례가 그 위에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가로막혀 나아가지 못했고, 그렇게 얼마간 허공을 떠돌다 맥없이 사그라드는 것으로 끝이 났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죠?”

“나는 여기 초행인데.”

일레이나가 당황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어왔지만, 이진한으로서도 알 턱이 없었다.

대현자의 눈에 역시 아무것도 표시되지 않는바. 좀 더 강한 위력의 마법을 사용해보고 싶었으나, 잘못하다간 동굴 자체가 무너져 그대로 파묻힐 위험이 있었다.

투둑-.

“……?”

엘레오노라는 제 머리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들에 고개를 들었다.

벽을 부수기 위해 검을 휘두르거나 마법을 날려 그 여파로 천장에 쌓인 먼지가 떨어졌겠거니 했지만, 이내 위쪽을 바라본 그 눈이 커지며 잘게 떨려왔다.

“공간 마법 계열인가?”

“공간보다는 간섭 계열 같아요. 아예 단층이 분리되었으니 아무런 타격이 없는 것 아닐까요?”

이진한은 일레이나와 벽을 매만지며 그것을 살피고 있는 상태. 그 옆으로 슬쩍 다가간 엘레오노라는 살며시 그의 소매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어, 베르너님?”

“그러면 일 점에 의도적인 왜곡을 주어 굴절시켜버리면, …어 왜?”

“그, 말씀 도중에 죄송한데 천장을 좀 봐주시겠어요?”

“천장?”

그 말에 이진한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다.

옆에 있던 일레이나와 미르엘 역시 위를 바라보았고, 이내 그 입이 서서히 벌려져 갔다.

크르르르-.

마수는 수없이 긴 세월로부터 애초부터 거기에 있을 따름이었다.

다만, 겹겹이 둘린 봉인으로 인해 인식되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존재해왔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며 봉인은 약해졌고, 공간과 공간 사이에 묶여 있던 그 주박은 더는 마수의 힘을 전부 억누르지 못하게 되었다.

Lv.1254 「베히모스」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진득한 침이 떨어져 내린다. 농밀한 산성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바닥에 닿자마자 새하얀 연기가 뿜어지며 고약한 냄새가 풍겨왔다.

“히익!”

일레이나는 기겁하는 모양새로 황급히 이진한의 뒤로 숨었다.

엘레오노라 역시 스태프를 꺼내 들었고, 미르엘은 제 대검을 들어 올리며 다가올 일전을 준비했다.

“…이 녀석이 왜 여기 있냐.”

다만, 이진한은 인상을 찌푸렸을 따름이었다.

***

베히모스는 뱀의 꼬리, 사자의 몸, 박쥐의 날개를 지닌 네임드 마수였다.

과거 1부 에피소드 당시 오스칼 황궁 지하에 봉인된 보스 격의 몬스터로 이미 한차례 토벌한 적이 있었다.

물론 완벽히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봉인이라는 수단을 취했고, 그것으로 퀘스트를 완수해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족히 천 년 전의 이야기가 아닌가.

크르르르-.

희미한 어둠 속에서 시뻘건 빛이 번뜩였다.

찢겨나간 날개와 거대한 몸은 주박의 사슬에 의해 속박되어 있었고, 유일하게 꼬리의 끝부분만이 풀려 있어 자유로이 움직일 뿐이었다.

끼이익-.

베히모스는 조금씩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주박의 사슬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철렁거려왔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떻게 하란들…….”

일레이나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어깨를 흔들어왔지만, 이진한이라고 특별한 수가 없었다.

차라리 봉인이 풀렸으면 공격을 퍼붓거나, 재차 봉인을 시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봉인이라는 요소가 고착화된 상태이기에 베히모스에 대한 현상 개변이 불가능했다.

“…당신들은 왜 이렇게 태연해요? 저거 딱 봐도 심상치 않은 괴물인 것 같은데.”

일레이나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을 바라보았다.

그 둘은 서로를 마주 보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일레이나, 당신이 붙잡고 있는 남자는 드래곤 슬레이어에다가 불완전한 상태라지만, 마왕까지 쓰러뜨렸다고요? 뭐가 그리 두려워요?”

“…그건, 그렇긴 하네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여유로울 만했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업적이나 마왕을 쓰러뜨린 것은 어지간한 강자라 할지라도 달성하기 힘든 것.

그러니 고작 마수 따위에 겁을 먹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일레이나는 혼자 호들갑 떨었던 것이 부끄러웠는지 움직임을 멈추고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다만, 이진한만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 이야기 중에 미안한데. 난 저거 쓰러뜨릴 자신이 없다.”

“에이, 장난치지 마세요. 드래곤도 쓰러뜨리신 분이.”

“맞습니다. 엘레오노라님과 제가 옆에서 봐온 것이 있는데.”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웃음기 어린 어조로 말을 던져왔다.

하지만 이진한의 표정은 바뀔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들의 미소가 점차 사라져 갔다.

“…진짜요?”

“진짜로.”

“그러면 저희 어떡하죠?”

“나도 잘…….”

처음이라면 처음인 위기에 이진한이 머리를 긁적이자, 곧 그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때도 봉인이 최선이었는데.’

황궁 지하에 도사리던 베히모스는 설정상 쓰러뜨리는 것이 불가능한 마수였다.

퀘스트의 이름도 보아라.

「서브 퀘스트」 ─ ∑꺼지지 않는 불꽃

저 꺼지지 않는 불꽃을 옭아매기 위해 몇 번이나 시도하고, 실패하고, 고생했었는가.

드드드드-.

그때, 천장이며 바닥이며 할 것 없이 온 천지가 진동하며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베히모스의 봉인이 풀리는 것이 아닌지 모두 긴장한 표정을 지었지만, 변화가 있던 것은 그들이 있던 공간 자체였다.

쿠구구궁-!

벽이, 무너져 내렸다.

막혀 있던 사방이 탁 트이며 확장되었고, 이내 새로운 풍경이 그 주위를 자리했다.

“…이건?”

일레이나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머리 위에 묶여 있던 마수가 아니었다면 갑작스러운 현상에 기겁했을 터.

하지만 당장 코앞까지 다가온 날카로운 이빨보다 무서운 것은 없었다.

“이건 개인적인 생각인데, 일레이나 너는 마도사라는 종족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예?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일레이나는 생뚱맞게 그런 말을 해오는 이진한의 모습에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원래 마법사 클래스는 정신력을 기반으로 삼잖아. 냉정함을 유지하는 게 기본인데, 그렇게 일희일비해서야 뭘 어쩌겠어.”

“…지금 상황에서 냉정함을 유지하는 게 정상으로 보여요?!”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겠어. 잘 헤쳐 나갈 생각을 해야지.”

이진한은 눈앞으로 떠오른 알림을 바라보았다.

[히든 필드 「콜로세움」에 입장하셨습니다.]

[해방 조건 - 베히모스의 절멸]

어찌 되었든, 해답은 하나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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