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8.
하루 뒤.
검은 현자의 유적지가 자리한 도시인 ‘빌헬름’의 영역 안으로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가 들어섰다.
일레이나는 빌헬름이 관광지에 불과하다 했지만, 입구에서부터 보이는 규모는 앞서 지나왔던 미들턴과 비교해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크기였다.
원래는 아무것도 없는 산골이었으나 수십 년 전 검은 현자의 유적지가 발견되면서 페르포치아 왕국 차원에서 관리가 들어갔고, 그 명성을 타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꼬이며 점차 몸집을 부풀린 것이었다.
다만, 지금은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사람이 별로 없네요?”
도시 입구에 말과 마차를 묶어두고 온 미르엘이 의아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확실히.”
일레이나의 말로는 꽤 왕성한 관광 명소라고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지금은 인적을 찾기 힘들 정도로 거리가 텅 비어있었고, 문을 연 가게도 수십 개 중 몇몇밖에 되지 않았다.
“…어, 이전에 왔을 때까지만 해도 이러진 않았는데.”
일레이나 역시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해도 대낮 시간대에도 축제 기간인 것처럼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갖가지 도시에서 온 상인들이 좌판을 열었고, 거리 끝까지 그 행렬이 펼쳐져 있는 것은 제법 흥미로운 구경거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아직 해가 중천에 떠올라 있음에도 거리는 텅텅 비어있었다.
좌판은커녕 수십 건물을 지나와도 문을 열고 있는 곳이 없었으니.
사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억 속의 풍경과는 확연히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아, 그것 때문이 아닐까요?”
“그거?”
그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볼 차란, 엘레오노라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들턴에 그런 소란이 있었잖아요. 이곳도 하루건너 거리이니 다들 진즉에 도망갔겠죠.”
“아.”
수십만에 달하는 몬스터 군단이 움직였다.
거리도 그리 멀지 않으니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는 것도 당연한 일일 터.
“사람들 사이에 숨으려고 했는데, 도리어 눈에 띄게 생겼네요.”
“됐어. 쾌적하고 좋지 뭐.”
난처한 표정으로 말해오는 엘레오노라에 이진한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웃어넘기고는 거리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조금 더 안쪽으로 걸어가니 문을 연 식당이 있었다.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주인장으로 보이는 노인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 앞으로 달려 나왔다.
“자네들, 모르는 건가. 바로 옆 도시인 미들턴에 수십만 마리의 몬스터가 출몰했다네. 벌써 며칠 전의 일이니, 이곳도 이제 안전하지 않아.”
그 말에 다들 서로를 돌아보았다.
바로 이틀 전의 일이라 아직 소식이 당도하지 않은 것일까.
“그러면 노인장은 어째서 떠나지 않은 겁니까.”
이진한의 물음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이곳은 내 고향일세. 몇 대째 이어온 가게를 버리고 떠날 순 없지. 종업원들과 가족은 일찍이 다른 도시로 보냈네. 자네들도 이곳에서 한가로이 식사할 게 아니라 서둘러 움직이게나.”
이진한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간혹 이런 이들이 있었다.
제 목숨보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한 채 제 신념을 꺾지 않는.
몬스터 군단이 바로 옆의 도시를 습격했으니 빌헬름 역시 아비규환이 되었을 터.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죽을 것을 각오한 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은 존경스러울 만한 정신이었다.
“몬스터가 이곳에 올 일은 없을 거예요. 이미 소탕되었거든요.”
“…그게 무슨 소린가. 아직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네. 듣기로는 왕국의 군대가 저 안쪽의 도시들을 기점으로 경계선을 구축한다고 했거늘.”
엘레오노라의 말에 노인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그 옆에 있던 이들의 태연한 분위기를 보곤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래서 지원이 오지 않았던 거구나. 어쩐지 몇 날 며칠을 버텨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어.”
일레이나만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불평을 내뱉었다.
성벽 위를 지휘하는 기사는 분명 늦어도 이틀 이내로 지원이 당도하리라 말했다.
하지만 이진한이 마르바스를 쓰러뜨렸을 때까지 머리카락 한 올조차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애초에 그 일대를 포기한 듯싶었다.
“뭐, 그들한테는 타당한 판단이지. 일국의 군대라 할지라도 수십만의 몬스터는 부담스러우니.”
이진한은 어깨를 으쓱이며 마찬가지로 자리에 앉았다.
망가진 텔레포트 게이트와 불통이 된 통신 회선을 복구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린다고 했다.
회선 쪽은 하루 이틀 정도면 된다고 했으니 슬슬 위쪽으로 소식이 들어갔을 터.
“저희가 그쪽에서 왔거든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허허, 참.”
“방은 여유로울 테고, 말 네 필이 머무를 마구간과 마차를 보관할 창고가 있으면 좋겠는데 가능하겠습니까?”
엘레오노라가 쐐기를 박듯 말하자 노인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미르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준비해주겠네. 조금만 기다리게나.”
“아, 식사도 부탁합니다. 가격 상관 안 하니까 맛있게만 해주십시오!”
안쪽으로 들어가는 노인의 등을 향해 이진한이 외치자, 그는 팔을 한 번 휘젓는 것으로 대답을 했다.
“…뭐, 관광하기엔 딱 좋은 타이밍에 왔네요.”
탁자에 몸을 기댄 일레이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
미르엘이 마을 어귀에 묶어둔 말과 마차를 식당 뒤편으로 옮기는 것을 끝냈을 무렵 식사가 준비되었다.
미들턴이나 벨데르에서 먹었던 것과 비교해도 제법 괜찮은 음식들이었다.
“천천히 들게. 재료는 어차피 많이 있으니 원한다면 더 해주겠네.”
노인은 쉬지 않고 식사를 이어나가는 이진한 일행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
이윽고 식사가 전부 끝났을 때, 이진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배를 쓰다듬었다.
엘레오노라와 미르엘는 기품 넘치는 태도로 입가를 닦았고, 일레이나 역시 이전보단 살짝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노인장,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유적에 관해선가?”
곧바로 나온 대답에 이진한이 움찔할 찰나, 노인은 허허 웃으며 팸플릿을 들고 왔다.
“이런 시기에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뻔하지 않은가.”
이진한은 팸플릿을 받아 탁자 위에 펼쳐놓았다.
“어디 보자, 검은 현자의 업적?”
“상세하게도 적혀 있네요. …전부 진짤까요?”
엘레오노라는 곧장 그것을 읽어나갔다.
미르엘은 그 팸플릿에 적힌 업적이 사실인지 물어보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으나, 일레이나가 있기에 참는 듯했다.
“저는 저번에 다 봤어요. 학계에서는 여기 중에 절반 정도만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고요. 뭐, 그마저도 너무 허황된 것이 많아서 의심이 들지만.”
일레이나는 팸플릿 끄트머리를 손가락으로 잡고 팔랑팔랑 흔들었다.
다만, 이진한은 헛웃음을 토해냈을 따름이었다.
‘별의별 게 다 적혀 있네.’
1부 에피소드인 고대 신을 쓰러뜨리기까지 한 여정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정보 길드에 의뢰해 받은 고대 영웅들의 서사시보다 더 상세한 것이, 분명 자신들과 직접 적으로 관련이 있는 누군가가 남긴 이야기가 아닌가 싶었다.
“…어.”
이진한의 시선이 그중 한 단락에 멈췄다.
「세상의 정점을 찍은 자」
‘이런 것까지.’
부끄러운 기억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1부 에피소드 당시 고대 신의 공략만을 남겨놓았던 순간이 있었다.
던전이 열리기까지 시간이 조금 남은바.
그렇기에 랭커들과 놀다가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월드라는 가상 현실의 천장은 어디까지 구현되어 있을까.
혹시 게임 내에서라도 우주에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때는 제법 그럴듯한 의문이었다.
월드의 내로라하는 랭커들이 모여 하나둘씩 의견을 내고, 가장 다채로운 스킬을 구사할 수 있는 이진한이 머리 역할로 뽑혔다.
테이머가 길들인 와이번의 등에 올라타 체공 한계까지 날아오르고, 그 이후엔 대마도사들이 번갈아 플라이 마법을 사용하며 마치 로켓이 발사된 것처럼 추진체의 역할을 했다.
종래엔 광범위 폭발 마법을 사용해 그 여파로 추진력을 얻었고, 기어코 까마득한 상공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 순간.
툭-.
투명한 벽에 가로막혀 그 이상으로는 나갈 수 없었다.
그 너머가 구현되지 않은 공간인지, 아니면 단순히 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솟구치던 힘이 0에 수렴하는 순간, 그대로 지상을 향해 낙하를 시작했다.
원래라면 다른 이들이 받아주기로 했지만, 빌어먹을 물리법칙 탓에 떨어지는 인간 메테오가 되고 말았다.
몇몇이 용감하게 나섰다가 휘말려 죽어버렸고, 그 역시 끝내 지상에 추락해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사망했다.
그 광경은 전 커뮤니티에 중계되었고, 몇 년간 전설로 남을 장면이라 회자되었다.
정작 그 본인은 고소공포증이 생겨 얼마간 플라이 마법을 쓸 엄두조차 내지 못했지만 말이다.
“…딱히 특별해 보이는 건 없네. 그러면 가볼까?”
식사를 끝낸 그들은 검은 현자의 유적지로 향했다.
지형은 산골짜기였지만, 워낙 사람이 많이 다닌 길이라 그런지 반들반들하게 잘 닦여 있었다.
유적지의 앞으로는 팻말과 표지판 같은 것들이 잔뜩 있었다.
유적지에 관한 설명이 적힌 것이 있는 반면, 다녀간 이들의 서명과 인사가 남긴 방명록 역할을 하는 것도 많았다.
“익숙한 이름이 몇 개 있네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중 아는 이름이 있는 것인지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쓰린 얼굴로 말했다.
“…감히.”
일레이나는 유려한 필체로 적어놓았던 자신의 사인 위로 누군가 긁적인 낙서를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곧 마법으로 열심히 그것을 지워나갔고, 이내 깔끔해진 모습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입구는 잠겨 있네.”
유적지의 입구는 철문과 쇠사슬로 굳게 봉해져 있었다.
원래는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는 이들이 있었다곤 하지만, 난리 통에 전부 도망갔으니 남아 있는 이들이 없었다.
“흡-!”
미르엘이 벼락처럼 제 대검을 휘둘렀다.
허공으로 차가운 한기가 서리며 얼음 조각이 흩날렸고, 이내 철문이 반으로 갈라지며 쓰러져 내렸다.
“호쾌하네.”
“미르엘은 예전부터 저런 거 좋아했어요.”
이진한과 엘레오노라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자 검을 휘두른 미르엘은 살짝 부끄럽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
그 태평한 모습에 한숨을 내쉬던 일레이나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벽을 더듬었다.
그러자 매달린 횃불들에 불이 피어오르며 내부가 환하게 밝혀지고, 이내 안쪽을 들여다본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것도 없는데?”
내부는 평범한 동굴이었다.
간혹 장식되어 있긴 했지만, 그저 꾸미는 용도일 뿐 그다지 특별한 의미는 없어 보였다.
“말했잖아요. 상징적인 곳이라고. 앞은 외길이고, 안쪽에 있는 제단까지 쭉 이어져 있어요.”
“일단 들어가 보자.”
안쪽의 모습은 일레이나가 말했던 것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얼마간 그렇게 쭉 걸어가자 계단식 제단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낡은 비석으로 세워진 평범한 구조물이었다.
“진짜 제단밖에 없네.”
“그렇다니까요?”
도시 규모를 생각하면 맥 빠지는 결과였다.
하지만 단순히 이런 것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릴 정도인 것을 보아 고대 영웅들의 위명이 얼마나 높은지는 막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검은 현자의 업적까지 부정하는 건 아니에요. 여기까지 오는 길을 걷는 동안 그를 기리는 마음으로 걸으라는 것이 보편적인 인식이니.”
“…그런가.”
제단의 앞에는 마치 제물처럼 놓인 시든 꽃과 여러 물건이 놓여 있었다.
그 양옆에서는 푸른 불꽃이 화로에서 피어올라 제법 분위기를 주었다.
“…이곳은 베르너님과 무슨 관련이 있나요?”
일레이나가 제단을 살피는 사이, 엘레오노라가 작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전혀. 내 후손을 자처하는 이들이 세웠다고 했잖아. 애초에 난 서대륙에 처음 온 거라니까.”
이진한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이단심문관 퀘스트의 완수로 시간의 유예에 여유가 생겼다.
그러던 중 바로 근처에 자신의 별칭을 딴 검은 현자의 유적지가 있기에 무슨 관련이 있는 줄 알았지만, 아쉽게도 허탕을 쳐버린 듯했다.
‘대현자의 눈으로도 보이는 건 없고.’
짧게 혀를 찬 그는 제 일행에게 말했다.
“그만 가자.”
이곳에 온 것은 맛있는 식사를 한 것으로 만족해야 할 듯싶었다.
그렇게 몸을 돌렸을 찰나.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갑작스럽게 떠오른 알람에 이진한의 몸이 우뚝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