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7.
[…삼가 아뢰오니 성국에선 정중하게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세상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신께서 내린 용사란 존재를.]
“…이 정도면 되었나.”
편지의 작성을 끝마친 유리아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기분이 좋은 것인지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흘러나왔고, 고개를 까딱일 때마다 짙은 청색의 단발머리가 살랑거리며 춤을 췄다.
“정말로, 예상외의 수확이었어.”
유리아는 신성 왕국 산하에 있는 이단심문 조직인 「도미니온」의 소속이었다.
근래 대륙 곳곳에서 성행하는 ‘교단’에 관해서는 그들 역시 주시하고 있었다.
순진무구한 이들의 등을 처먹는 평범한 사이비 교단이라면, 어지간해선 교주의 목을 자르는 것으로 해결이 되었다.
하지만 그 앞에 72개의 특정한 고유 명사 중 하나가 붙을 땐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으니.
마계의 존재하는 72명의 마왕.
그들을 섬기는 교단이야말로 도미니온의 숙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몇 달 전 페르포치아 왕국의 물밑에서 움직이던 마르바스 교단의 본거지를 찾아 괴멸시킨 전적이 있었다.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않은 채 완전히 절멸시켰지만, 이곳 미들턴에서 또다시 그들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도미니온은 곧장 유리아를 파견했다.
잔당이 남아 있다면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고, 철저하게 조사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증거 불충분, 무사 종결이란 보고를 끝으로 복귀할 찰나 이변이 발생했다.
수십만에 달하는 몬스터 대군.
종족도 세력도 다른 그것들이 마치 한 몸이 된 것처럼 미들턴을 향해 닥쳐왔다.
몬스터를 세뇌하거나 키메라를 만들어내는 것은 마르바스 교단의 특성이었다.
그 잔당이 남아 있다는 것이 확실시 되는 증거였지만, 지금 당장은 성벽을 넘으려는 몬스터를 막아 세우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쪽의 실력자들과 힘을 합친다면.’
유리아는 도미니온 소속의 이단 심문관임과 동시에 팔라딘에 올라 있었다.
검으로는 소드 마스터 마법으로는 마도사와 동일시되는 경지로, 그녀는 어지간한 이들보다 더 풍부한 전투 경험이 있다.
수십 만이라는 숫자는 확실히 버거운 수치였으나, 수성하는 입장상 쉽사리 무너질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분명, 그녀가 있었지.’
일레이나 유클리드.
이터널 학파의 애머시스트라 불리며, 악마 관련 연구로 업계에선 상당히 저명한 인사였다.
젊은 나이에 마도사의 경지에 오를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전투 능력 자체는 평범한 수준이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대규모 전쟁에선 마도사 한 명의 유무가 판을 가른다. 팔라딘인 자신과 같이 전선에 나선다면 능히 성벽을 지켜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 남자’의 존재만 아니었더라면.
“…어.”
전장 위로 상위 마법이 쉬지 않고 쏟아져 내렸다.
불기둥이 솟구쳐 뭉쳐 있던 몬스터 무리를 태워버리는 것을 시작으로 갖가지 마법이 천지를 휩쓸었다.
‘…설마, 드래곤인가.’
유리아는 명백히 이질적인 그 존재에 손끝을 떨었지만, 이내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소곤거리던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었다.
“역시 드래곤 슬레이어는 달라.”
“벨데르에서도 그 거대한 블랙 드래곤을 쓰러뜨렸다지.”
‘…드래곤 슬레이어?’
지고(至高)한 존재인 드래곤이 굳이 동족의 살해자를 칭하며 유희를 즐기고 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드래곤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유리아는 의문이 가득한 시선으로 한동안 그 남자의 주위를 맴돌았다.
보기 드문 흑발에 흑안으로, 체격은 탄탄하며 외모는 수려했다. 일행으로 있는 두 여성을 대하는 모습을 보니 꽤 짓궂은 성격임이 분명했다.
다만, 그 힘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손짓 한 번만으로 상위 마법을 펼쳐내는 것을 보니 최소한 그 끝자락에 오른 경지인 듯싶었다.
그리고 그 정체에 대한 의구심은, 마르바스 교단의 흑마법사들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을 때가 되어서야 해소되었다.
어둠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농밀한 마기를 내포하고 있는 그것을 무방비하게 맞으면 심할 경우 즉사할 수도 있는 상황.
지금껏 병사들 사이에서 적당히 움직이던 유리아는 표정을 바꾸고 성벽 위에 올라섰다.
하지만 신성력을 뿜어내기도 전, 그보다 더 찬란한 태양이 그 옆으로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아.”
유리아는 그 모습에 시선을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이 어찌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마치 신이 지상에 강림한 듯한, 거룩하고 성스러운 자태였으니.
그 뒤부터는 성전(聖戰)이 시작되었고, 끝내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것뿐이라면 용사라 칭하기에 어폐가 있었지만, 유리아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교단의 흑마법사는 제 목숨을 대가로 리치가 되었지만, 처참하게 패배했고 이내 소멸하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 위로 새로운 존재가 깃들었으니.
성벽 위에서 지켜봄에도 불구하고 확연하게 느껴지는 선명한 존재감.
교단이 숭배하는 마왕 마르바스, 그 본인이 분명했다.
중간계에 마왕이, 비록 그 힘의 일부를 가진 채였지만, 강림했다는 것은 당장이라도 알려야 할 긴급한 정보.
하지만 용사의 존재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
실제로 마르바스 역시 그를 용사라 인식하지 않았나.
도와야 했다.
아무리 용사라 할지라도 홀로 마왕과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끝내 그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다행히 싸움은 용사의 승리로 돌아갔다.
정작 조사를 위해 파견된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기에 최소한 뒷정리라도 하고자 했다.
“끄, 으으으…….”
그 순간, 유리아는 귓가로 들려오는 신음에 고개를 들었다.
용사의 모습을 떠올리며 회상하던 기억이 흩어져 버린다. 그 직후 그녀는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벽에 기대 세워 놓았던 검을 집어 들었다.
“…아직도 숨이 붙어 있었나.”
교주가 죽었다고 해서 마르바스 교단이 와해된 것은 아니었다.
그 잔당이 남아 있다면 또 적당한 이가 마왕의 간택을 받아 우두머리급으로 성장할 터.
그러니 ‘교단’을 상대하는 데는 그 세력을 뿌리까지 뽑아버리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도미니온 소속의 이단심문관으로 활동하는 유리아는 그들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다.
필시 용사가 도시를 떠날 때까지 숨어 있다가 나중에 다시 활동을 재개할 터.
그렇기에 그녀는 용사 일행이 도시를 떠남과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한 마르바스 교단의 흑마법사들을 찾아내어 철저하게 짓밟았다.
신성 왕국으로 보낼 편지를 작성하기 전까진 전부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고문을 위해 숨만 붙여 놓았던 이의 명줄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는지 생각지도 못한 방해를 받았다.
쉬식-.
무색의 검광이 허공을 갈랐다.
곧 신음을 내뱉은 흑마법사의 가슴이 쩍 갈라졌고, 시커먼 심장이 세상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유리아는 편지를 고이 접어 품에 넣고는, 성수를 꺼내 그 위에 부었다.
“이것으로 네 죄를 사하노라.”
심장이 얽힌 마기가 타들어 갔다.
흑마법사의 심장은 마족과의 계약을 상징하는 중요한 촉매다. 그것을 망가뜨린다는 것은 그 당사자의 존재 자체를 말살해버리는 잔혹한 형벌.
그렇기에 그녀는 비취색이 감도는 눈동자를 가늘게 뜨고는 작게 웃음을 토해냈다.
“신께서 그것을 받아들여 주실지는 모르겠지만.”
교단의 정리를 끝냈으니 서둘러 용사의 뒤를 쫓아야 했다.
잠시간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벽에 걸린 횃불을 집어 들었고, 미련 없이 시체들 위에 던지는 것을 끝으로 자리를 떠났다.
이진한의 눈앞으로 이단심문관 퀘스트를 완료했다는 알림이 떠오른 것도 그와 비슷한 시각이었다.
***
달려 나가는 마차의 안.
일레이나는 미련을 깨끗이 씻어냈는지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서대륙의 지형이 표시된 지도가 허공에 투영되며, 그들이 가야 할 길을 나타내었다.
“일단 최단 루트로 따지자면 이렇게 되네요. 별일이 없으면 두 달하고도 스무날이 더 걸리겠군요. 그러긴 힘들겠지만요.”
“흠.”
이진한은 팔짱을 낀 채 지도를 바라보았다.
경로 위에 있는 각 지역의 밑으로 일레이나가 달아놓은 주석이 있었다. 그것만 읽어보자면 그리 특별할 건 없어 보였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항상 생각한 대로만 흘러가는 법은 없지 않은가.
“동대륙은 항상 전쟁이 끊이질 않는다죠? 이쪽은 그래도 평화협정이 유지되고 있어서 겉으로는 잠잠하거든요.”
“그건 다행인데, 미들턴에서처럼 갑자기 몬스터 대군이 밀려오거나 그러면 문제네요. 시간 싸움인데 발이 묶이는 것만큼 골치 아픈 일이 없으니.”
가야 할 길이 멀었다.
그렇기에 엘레오노라는 머리를 싸매며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일단 데메드리오 왕국까지 가면 안심이에요. 그곳은 말이 왕국이지 제국의 속국이나 마찬가지니까.”
“완충지대인가.”
지도를 보는 이진한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리베라 제국의 앞으로 데메드리오 왕국이 있었고, 그 뒤로 제법 규모가 큰 왕국 세 개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데메드리오 왕국 입장에선 그래도 존속은 할 수 있으니 다행인 상황이죠. 본래라면 제 근처에 있는 열강들에 잡아먹혀도 이상하지 않으니.”
일레이나는 손을 뻗어 지도를 휙휙 움직였다.
“제국 위치는 대충 이렇고. 아, 지금 가는 방향으로 얼마 정도 더 가면 검은 현자의 유적지가 있네요. 이곳으로 경유할까요? 매해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이라 숨기에는 안성맞춤일 텐데.”
“…어.”
그 말에 엘레오노라가 이진한의 눈치를 살폈다.
“……?”
둘 사이에 감도는 기묘한 기류에 일레이나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한가롭게 관광이나 하고 싶다곤 하지 않겠죠? 고대 영웅의 유적지인 만큼 흥미가 동하겠지만, 쫓기는 상황에서 그리 여유로운…….”
“아니, 오히려 괜찮지 않을까?”
“…네?”
“누가 쫓기는 와중에 한가롭게 관광이나 할 거로 생각하겠어.”
되지도 않는 궤변이었지만, 이진한은 오히려 구미가 당겼다.
“말이 검은 현자의 유적이지 그 후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설립한 제단 같은 곳이에요. 상징적인 가치만 있지, 특별한 것은 없어요.”
일레이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황급히 말을 이으며 빨리 저 남자를 말려달라는 뜻으로 엘레오노라에게 눈짓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의미에서 두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이진한을 바라봐왔으니.
‘결혼했었어요?’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한 시선에 이진한은 헛웃음을 토해내었다.
‘결혼은 무슨.’
게임에서 어떻게 아이를 낳는단 말인가.
월드의 자유도가 높다곤 하지만, 그런 이벤트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더불어 자신들을 검은 현자의 후손이라고 칭한 이들의 정체 역시 딱히 짐작 가는 것이 없었다.
“…아휴, 저는 모르겠네요. 고용주의 뜻에 따라야죠. 뭐.”
둘이 아무런 대꾸도 해주지 않자 일레이나는 한숨을 내쉬며 경로를 수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