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6.
스릉, 탁.
엘레오노라와 일레이나가 서로 손을 맞잡았을 때, 문 뒤에서 기대서 있던 미르엘은 살짝 뽑아 들었던 검을 다시 수납했다.
“후.”
긴장했는지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힘이 들어갔던 어깨는 축 처졌고, 얼굴 한구석에선 안도한 기색이 드러났다.
“살벌하네.”
“…아, 오셨나요.”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미르엘은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었다.
“…….”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떤 식으로든 소르뎀과 일레이나의 관계가 파국을 맞이하리라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격정적인 상황이 될 줄은 몰랐다.
여차할 때는 엘레오노라가 나서서 일레이나를 설득하기로 되어 있었다.
어차피 맹약으로 묶여 있는 상황에서 신분을 밝히고 도움을 구한다면 이야기가 잘 흘러갈지도 모르지 않는가.
하지만 설득이 실패했을 때의 경우는 상정하지 않았다.
그때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했으나, 조금 전 미르엘의 눈가에 어렸던 살기를 보아하니 조금이라도 수가 틀리면 죽이는 것으로 입을 막을 생각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이보다 더한 짓도 많이 했어요. 살아남기 위해서.”
미르엘은 처연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변명 따위가 아니었다. 이미 이해받기를 포기한 기색으로, 평상시에 보이는 담담한 태도와 달리 가식 없는 어둠이 그 눈동자 위로 드러났다.
“그런가.”
이진한은 딱히 무어라 할 생각은 없었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벨데르에서 술자리를 가졌을 당시 엘레오노라가 술에 취해 졸음에 빠진 적이 있었다.
삼십 분도 채 되지 않은 짤막한 시간이었지만, 마찬가지로 술에 취한 미르엘은 그 가운데 솔직하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은 바가 있었다.
-엘레오노라님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이 아니었더라면, 저는 진즉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거예요.
자랑으로 여기던 제국으로부터 배신당했다.
가문의 혈족과 지인들은 반역의 동조자로 엮여 전부 처형을 당했고, 들판에 시신이 버려져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
기사단에 입단해 이때까지 함께 해온 동료들은 도망치는 와중 하나둘씩 스스로 목숨을 던져 길을 열었다.
그렇게 피로 얼룩진 걸음을 걸어온 끝에 종래엔 자신 혼자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더 살아가야 할 이유 따위가 있을까.
‘베르너님과 만나지 못했더라면, 아마…….’
순식간에 가라앉은 분위기에 미르엘은 입을 닫으며 시선을 피했지만, 그런 그녀를 두고 볼 이진한이 아니었다.
“…그런가. 그래서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죽기는 싫다며 매달려 왔구나.”
“……!”
한쪽 입꼬리를 씩 끌어 올리며 놀리듯 말해오는 그 모습에, 축 처져 있던 미르엘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 아니 그건…….”
바로 직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며 허둥거렸다.
몇 번을 놀려도 면역이 없는 듯한 그 순수한 모습에 이진한은 작게 웃음을 토해내며 말을 이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이제 하지 마. 앞으로 어떻게 헤쳐가야 할지 고민하는 것으로도 벅차니까.”
“…네. 그럴게요.”
그 나름대로 위로해준 것이리라.
그렇기에 미르엘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끝났어요?”
그때, 닫혀 있던 문이 빼꼼 열리며 엘레오노라가 고개를 내밀었다.
“뭔가 진지한 이야기 중인 것 같아서 잠깐 기다리고 있었어요.”
“잘했어. 이쪽도 대충 이야기가 끝났으니 서둘러 떠날 준비를 하자.”
드래곤 슬레이어의 위명에 이어 몬스터 군단과 마족을 쓰러뜨린 소식 역시 사방으로 퍼졌을 터.
제국 암부 정도 되는 곳이라면 두 가지 사건을 연관 짓는 것은 어렵지 않을 테니 금세 따라 붙어올 것이 분명했다.
“…저기.”
엘레오노라 뒤쪽에 있던 일레이나가 머뭇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이진한은 그녀의 표정 속의 망설임을 읽어냈다.
엘레오노라와 이야기는 끝났지만, 아직 제 마음의 확신이 서지 않은 듯했다. 그렇기에 피식 웃은 그는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고민은 가면서 충분히 하고, 짐부터 바로 싸.”
“…곧바로 떠나시게요?”
“어. 이야기는 들었지? 아쉽게도 그리 시간이 넘치지 않거든.”
이진한의 눈이 허공의 한쪽으로 향했다.
【93:13:17】
도시에 남아 영웅 대접받으며 이래저래 노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시간의 유예는 이 순간에도 착실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간이며 쓸개며 다 빼줄 것 같은 영주의 태도라면 텔레포트 게이트의 이용을 부탁할 수 있었을 터.
하지만 아쉽게도 파괴된 그것들은 복구까지 한 달이 넘게 걸린다고 했다.
여기서 언제까지 죽치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니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을 때 서두르는 것이 맞았다.
“저는 준비가 끝났어요. 애초에 짐을 싸려고 왔던 거니까요.”
“인사할 사람도 없어? 인간관계가 삭막하네.”
“기껏 마음을 다잡았더니 그렇게 초치기에요?”
놀리는 듯한 이진한의 말에 일레이나는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옆에서 작게 웃으며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엘레오노라는 미르엘에게 물었다.
“마차는 그대로 있지?”
“네. 지금 당장이라도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네요.”
엘레오노라의 시선을 받은 이진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자.”
미들턴에서의 용무는 전부 끝났다.
로브 끝자락을 멋들어진 모습으로 펄럭이는 것을 끝으로, 이진한은 몸을 돌렸다.
***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가 미들턴의 성문을 나섰다.
영주는 물론이고 성벽 위에서 함께 싸운 기사와 용병, 그리고 시민들은 조금만 더 머물다 가라며 떠나던 그들을 붙잡았지만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좋은 말로 타일러 이별을 고했다.
“두둑하네.”
이진한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길드에서 마련해준 배낭을 바라보았다.
공간확장 마법이 걸려 있는 그 안엔 수많은 이들이 담아준 음식과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들어 있었다.
“사람들이 이쪽을 보고 손을 흔들고 있어요.”
창밖을 구경하고 있던 엘레오노라가 그 인사에 화답하듯 작게 손을 흔들었다.
성 밖은 몬스터의 잔해와 성벽의 보수를 하는 중인 이들로 북적거렸다.
마차에 이진한 일행이 타고 있는 것을 아는지 저마다 하던 작업을 멈추고 손을 흔들거나 경례를 보내왔다.
“…아직 마음이 복잡한 걸까요.”
“그렇겠지.”
엘레오노라의 시선이 마차의 뒤편으로 향했다.
워낙 큰 규모의 마차라 그런 것인지 마차의 뒤쪽으로 작은 테라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성문을 나온 직후 일레이나는 말없이 밖으로 나가 그곳에 서 있었다.
“…….”
엘레오노라는 그런 그녀가 신경 쓰이는지 연신 그쪽을 흘깃거렸다.
“정 그러면 가서 뭐라고 위로라도 해주지 그래?”
“…제가 그런 쪽으로는 말주변이 조금 부족해서요.”
“그래?”
이진한은 두말할 것 없이 자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이익-.
곧 문을 열고 나가자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서 있던 일레이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엘레오노라의 말대로 그 표정은 복잡하기 그지없다. 이진한이 나왔음에도 그녀의 시선은 멀어져 가는 성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말로 인사하지 않고 떠나도 괜찮아?”
그 옆에 걸터앉은 이진한이 툭 내뱉자, 일레이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이런 관계는 확실하게 끊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또 질척거리면서 달라 붙어올 테니.”
“표정에선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데.”
이진한이 너털웃음을 터트리자, 일레이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손을 들었다.
“…한 대 피워도 돼요?”
“마음대로.”
곧 그녀는 기다란 담뱃대를 소매 밑에서 꺼내 입에 물었다.
손가락을 비벼 불을 붙이더니 이내 한껏 숨을 빨아들이곤 짙은 연기를 내뿜었다.
“이전엔 시가렛이더니.”
“아, 그건 소르뎀 거예요. 가끔 심심할 때마다 하나씩 훔쳐 와서 폈는데, 이젠 그 짓도 못 하겠네요.”
자기가 말해놓고 스스로 웃긴 것인지 일레이나는 이내 웃음을 흘렸다.
짙은 연기는 이내 허공에 흩어졌다.
잠시간 아련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이전보단 덜하지만, 여전히 퇴폐적인 기색이 가득한 보랏빛 눈동자를 돌려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당신, 정말로 정체가 뭔가요?”
“맞춰봐.”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알려주면 안 되나요? 맹약으로 묶인 이상 배신도 하지 못하는데.”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잖아. 그렇지?”
“쩨쩨하게.”
투정 부리는 듯한 그 목소리를 흘려 넘기며 이진한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 위, 주홍빛 태양과 함께 크기가 다른 한 쌍의 달이 옅은 잔상을 보이며 자리하고 있다.
이진한은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절로 새어 나오는 한숨을 막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게 게임 속 세상이야.’
눈에 보이는, 귀에 들리는, 피부로 느껴지는.
그 모든 것이 현실과 다름없이 생생했다.
우습게도 그 느낌은 눈앞에 마주한 적들과 피 튀기는 혈전을 벌였을 때보다, 평화로이 마차를 타고 달려 나가는 지금이 더 실감이 들었다.
엘레오노라의 고민, 미르엘의 고통, 그리고 일레이나의 갈등까지.
모두 사람과 대화하며 어울리는 것 같지 않은가.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전했다고 할지라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시야 한구석, 상태창 시스템으로 향했다.
미들턴에서의 일이 끝날 때까지 로그아웃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튜토리얼은 이미 옛적에 끝났을 터.
하지만 친구 창은커녕 메신저나 운영자 호출 시스템까지 계속 먹통이었다.
…정말로 다른 세계에 온 것이라면.
수많은 의문이 뒤따랐다.
원래의 몸은?
다른 세계에 온 것이라면 상태창이나 퀘스트가 뜨는 이유는?
게임 캐릭터 안에 깃든 것은 왜?
물론 그 어느 것 하나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왜 그래요?”
이진한이 격하게 머리를 흔들자, 일레이나가 살짝 꺼리는 표정으로 거리를 벌리며 물었다.
“아니, 머리가 복잡해서.”
“저도 그래요. 주로 당신의 정체로.”
“…아직도 그 주제야?”
이진한은 허탈한 표정으로 실소를 흘렸다.
“엘레오노라가 그러더라. 이쪽의 일이 끝나면 너와의 맹약을 끝내줄 수 있느냐고.”
“여기까지 와서 다른 소릴 하진 않겠죠?”
“너 하는 거 봐서.”
“…그러면 하는 거 봐서 당신 정체도 알려줄래요?”
“맹약이 끝나면 알려주지. 아마 깜짝 놀랄 거다.”
“글쎄요. 대충 짐작은 가긴 하는데. 하여튼 당신 입으로 말한 거예요? 맹약이 끝나면 정체를 알려주겠다고.”
일레이나는 그것에 만족한 듯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작게 흔들었다.
‘대충 짐작했다, 라.’
그 모습을 본 이진한 역시 작게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천 년 전의 영웅인 검은 현자라 하면 놀라지 않을까.
띠링-.
그때 그의 귓가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메인 퀘스트」 - 이단심문관 달성]
【191:30:24】
성을 떠나고 한참 뒤에서야 퀘스트 완료 알림이 떠올랐다.
“…오?”
100시간 아래로 떨어져 내렸던 시간의 유예가 단번에 넉넉해졌다.
아이돈의 스태프를 부수고 영원의 결정을 취한 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거늘, 아무래도 퀘스트와 획득은 별개로 치는 듯했다.
‘뭐, 좋은 게 좋은 것이니.’
생각지도 못한 행운에 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