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5.
어느 정도 예상은 한 것 같지만, 정말로 그런 말을 해올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자, 잠깐……!”
더 이야기가 진행되기 전에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맹약을 잊진 않았겠지? 마나를 잃고 싶으면 거절하던가.”
“…….”
사뭇 여유를 풍겨오는 이진한의 모습에 일레이나는 입술을 씹었다.
비록 지금은 촌구석에 처박혀 있지만, 언젠가 다시 마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끝내지 못한 연구도 많았고, 천천히 업적을 쌓아 그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자신을 무시했던 윗선을 찍어 누르고 싶었다.
하지만, 하지만 드래곤 슬레이어 파티에 합류하게 된다니.
“잔금은 400만 골드니 6개월 정도면 충분하겠지.”
드래곤 슬레이어의 사흘이 천만 골드다.
마도사는 그보다 한참 아랫급이니 대충 비교하자면 엇비슷한 견적일 터.
덥석.
일레이나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소르뎀은 제 조카의 손을 붙잡았다.
“좋은 기회가 아니더냐. 길드의 부채를 탕감함과 동시에 업적을 쌓을 수 있으니. 드래곤 슬레이어의 파티 일원이 된다면 마탑에서 널 깔봤던 이들의 콧대를 단단히 꺾어줄 수 있을 터다.”
“…….”
일레이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시선엔 경멸이 가득했고, 치열이 고른 이가 갈리며 빠득 소리를 내었다.
이렇게 된 것이 다 누구 탓인가.
또 자신만 살려고 그럴듯한 구실을 붙여 자신을 내치려는 행태를 보아하니 사지를 잡아 찢어버리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탁.
그녀는 소르뎀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내친김에 뺨이라도 때리고 싶었지만, 야만스럽게 손찌검을 하는 것은 취향에 없었고 추레한 늙은이의 몸에 닿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싸늘한 눈빛으로 한 번 흘겨보고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문 앞에 섰다.
“…씨팔, 따라갈게. 따라간다고. 대신에.”
안광이 번뜩이는 그녀의 눈에 소르뎀이 움찔했다.
“이제 내 인생에서 남은 가족은 없어. 또 혈연을 핑계로 주위에 얼쩡거렸다간.”
화륵-.
시뻘건 화염으로 만들어진 창 여러 자루가 일레이나의 주위로 떠올랐다.
그 끝이 자신을 향해 날카롭게 겨눠지자 소르뎀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흔적도 없이 지워버릴 거야.”
진심을 담은 서늘한 살기였다.
소르뎀은 할 말이 많은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그 서슬 퍼런 기세에 짓눌려 결국 고개를 떨궜다.
쿵.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소르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그것을 지켜볼 뿐. 그 모습을 자업자득이라 생각한 이진한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조카가 강단 있네.”
***
지부장의 집무실을 나온 일레이나는 거칠게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에 오는 게 아니었는데.”
그녀의 가족은 일찍이 여러 이유로 대부분 명을 달리했다.
유일하게 남은 혈육이라곤 삼촌인 소르뎀밖에 없었던바.
마탑에서 나온 뒤 리베라 제국 수도에 머물려고 했었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도 길드 일을 도와달라는 소르뎀의 부탁 때문이었다.
미들턴은 서대륙 가장자리에 위치한 도시로, 마경과 맞닿아 있는 험지였다.
몬스터의 침입이 잦았기에 일 년 내내 싸움이 잦은 곳이었으나, 일레이나의 수준이라면 그리 어려운 것은 없었다.
어차피 수도에 있으면 뒹굴기밖에 더 하겠나.
비교적 가깝게 지내던 지인들은 자신이 마탑과 척지자 전부 만나길 꺼려하며 거리를 두는 기색이 역력했다.
굳이 미들턴으로 향한 이유엔 자신의 아군이 없다는 외로움과 인생에 대한 회의감이 가장 컸다.
길드의 일은 생각한 대로 손쉬웠다.
행정 업무야 도장 찍는 것이 전부였고, 가끔 일손이 부족할 때 밖으로 나가 몬스터 위로 마법을 펑펑 써대면서 겸사겸사 스트레스를 해소하면 그만이었다.
그래도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기에 늦어도 연말에는 다시 마탑으로 돌아갈 계획을 짜두고 있었다.
그때쯤이면 윗선도 마음이 풀려 자신을 불러들일 테니.
그렇기에 소르뎀이 교묘하게 자신을 이용하려는 모습을 보여도 그냥 넘어갔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 했다. 예전부터 그러했으니 그저 그런 인간이리라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도시의 위기 가운데 드래곤 슬레이어와의 맹약을 강제하고, 그것을 대가로 팔아넘기려는 모양새는 아무리 그녀라 할지라도 흘려 넘기기 힘든 것이었다.
‘그래, 차라리 잘 되었어. 드래곤 슬레이어의 파티원이면 명성이라도 쌓을 수 있겠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신경질적으로 짐을 정리하던 일레이나는 베르너를 떠올렸다.
수도에서도 이 정도 수준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수려한 외모였다.
성격은 건들거리는 면모가 있는 것 같았지만, 싸울 때나 제 일행을 대하는 태도를 보아하니 행실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스펙은 자신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것이니.
이런 상황을 만들어 낸 원흉이었지만, 언젠가 터질 문제라 생각했기에 그리 미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뚝, 뚝.
옷가지를 움켜쥐고 있는 그녀의 손등 위로 굵은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런 추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마지막 자존심이었으니 꾹 눌러 참았다.
이터널 학파의 애머시스트니, 뭐니 하면서 유명세를 자랑했지만, 실상은 빈껍데기에 불과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독기를 품은 채 홀로 악착같이 노력해 얻은 성취였건만, 정작 중요할 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일레이나는 문득 모든 것이 허무해졌다.
외로웠다.
유일한 혈육조차 저러할 진대, 세상천지에 자신의 아군은, 자신의 존재를 필요로 해주는 이는 단 하나도 없지 않은가.
“일레이나양.”
“…….”
일레이나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흠칫했다.
순간 베르너가 자신을 따라온 건가 싶었지만, 들려온 목소리는 그의 일행인 엘렌이라는 여자의 것이었다.
“…왜.”
일레이나는 얼굴을 문질렀다.
베르너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외간 남자에게 눈물을 보였더라면 그 수치스러움에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을 것이리라.
“울어요?”
“…눈치 없기는.”
물론 지금 역시 부끄러운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눈을 흘기며 엘렌을 바라보았다.
얼굴만 보아도 사랑받으며 자란 태가 확실했다.
구김살, 소위 말하는 독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은 꼬이는 파리들을 내쫓으며 악착같이 살아왔거늘.
상대적인 박탈감과 함께 부럽다는 마음이 솟구쳤다.
“…….”
일레이나는 그 끝에서 쓴웃음을 지었다.
추악한 질투였다. 자신은 어디까지 추해지려는 것인지.
그리고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엘레오노라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울다가 웃으면…….”
“아, 진짜. 조용히 좀 해.”
일레이나는 이런 상황까지 와서 가식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그렇기에 인상을 찌푸리며 한 마디 쏘아붙일 작정으로 고개를 들었지만, 곧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말문이 막혔다.
선명할 정도로 붉은 머리카락이 허공에 흩날린다. 갓 내린 눈처럼 새하얀 피부 위로 떠 오른 한 쌍의 주홍빛 눈동자는, 그녀의 시선을 단번에 빼앗아버렸으니
부드럽지만, 절대 나약하지 않은 시선에 정신이 빨려드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건.’
베르너 곁에 있는 두 여성이 마법으로 외모를 바꾼 것은 알고 있었다.
신분 역시 대충 둘러대는 것을 보니 무슨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수려한 외모를 지니고 있으리라는 것은 생각지 못했다.
“엘레오노라 폰 오스칼.”
“…뭐?”
“그게 제 이름이에요.”
뒤이어 들려온 말에 일레이나는 잠시 사고가 경직되었다.
엘레오노라 폰 오스칼.
옆 대륙에 있는 제국의 성씨지만, 워낙 자자한 소문에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황위 찬탈을 위해 황제의 식사에 독을 타고 반란을 도모한 희대의 악녀.
하지만 그 끝에서 재상에게 들키는 바람에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그 때문에 제국에선 한창 피바람이 부는 와중이었다. 반란과 엮인 수많은 이들이 처형당했고, 굵직한 가문마저도 그 여파에 휘말려 멸문의 길을 걸었다.
폭풍의 중심인 엘레오노라는 도망자 신세로 그 행방이 묘연했다.
제국에서 억대에 달하는 현상금을 걸어 수많은 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쫓던 와중에 잘도 도망쳤다고 생각했건만, 그런 사람이 자신 앞에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내, 내게 정체를 밝힌 이유가 뭐야.”
일레이나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페르포치아 왕국이 서대륙에 있다지만, 오스칼 제국의 반역자와 엮이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현상금 사냥꾼들을 비롯해 제국의 그 악랄한 추격대라 명성이 자자한 암부가 뒤를 쫓고 있을 터.
이터널 학파의 저명한 마도사라 할지라도 순식간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을 게 분명했다.
“세간에 떠도는 소문의 내용은 저도 알아요. 하지만 그건 대부분 거짓된 이야기에요.”
“뭐?”
“오스칼 제국의 황실은 정체 모를 마족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어요. 그 전부가 휘말렸다는 건 아니지만, 상당 부분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요. 제가 자신들의 낌새를 눈치채자 입을 막기 위해 반역도라는 누명을 뒤집어씌운 것이고요.”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동대륙의 패자인 오스칼 제국의 황실이 마족의 주구라니.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엘레오노라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마나에 맹세합니다. 제가 사실만을 말했음을.”
우웅-.
그러자 주위의 마나가 공명하며 그녀의 의지에 따라 맹약을 그려내었다.
일레이나의 두 눈이 잘게 떨렸다.
맹약은 틀림없이 발동했다. 그렇다는 것은 엘레오노라의 말이 진실이라는 소리였으니.
“…그러면 베르너님은.”
“베르너님은 저를 돕기 위해 나서주신 분이세요.”
하지만 일레이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SS랭크 용병.
드래곤 슬레이어.
초월지경의 대마도사.
신성력을 다루며, 예사롭지 않은 검술을 구사하는.
“…그런 존재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드래곤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휘황찬란한 이름들이지 않은가.
“…뭐, 그 부분에 관해선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고.”
엘레오노라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6개월, 잘 부탁드린다고 말씀드리려고 왔어요. 아무래도 사정이 사정이다 보니 과정은 순탄치 않겠죠.”
“그러니 먼저 털어놓는 것이 편할 것 같아서 그랬다?”
엘레오노라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녀는 이진한이 어째서 일레이나를 영입하려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원했기에 의문은 잠시 접어두고 결정에 따를 뿐이었다.
“하하.”
일레이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전까지 짐을 싸며 질질 짜던 자신의 고민 따위는 하찮게 느껴질 정도로 무거운 이야기였다.
그저 드래곤 슬레이어의 파티원으로 들어가 명성을 쌓으려 했거늘, 너무 스케일이 큰 이야기가 아닌가.
“목적지가 있어요. 공교롭게도 당신의 마탑이 속한 리베라 제국이고, 적들도 그걸 알고 있죠. 길어도 3개월 안팎의 여정일 거예요. 만일 그곳에 무사히 도착한다면 그 즉시 베르너님께 말씀드려 계약을 끝낼 수 있도록 할게요.”
말을 끝내며, 엘레오노라는 손을 내밀었다.
“…….”
일레이나는 입을 닫았다.
생각지도 못한 큰일에 휘말려버려 머리가 멍했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이것저것 재면서 냉정한 판단을 내렸겠지만, 어차피 맹약에 묶인 이상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기에 마음을 편히 먹었다.
“…내가 뭘 어쩔 수 있겠어요. 하여튼, 그 남자한테나 좀 잘 말해줘요.”
드래곤 슬레이어 정도 되는 인물이니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레이나는 한숨과 함께 옅은 미소를 지으며 엘레오노라의 손을 맞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