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4.
이진한은 지친 표정으로 슬쩍 고개를 들었다.
여력이 허락하는 안에서 일시에 사용할 수 있는 초월 마법을 전부 때려 박았다.
거대한 크레이터의 안쪽은 지옥도를 연상케 했다.
일부는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용암이 뒤덮고 있었고, 일부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며 모든 것을 얼어붙게 했고, 일부에는 사라지지 않는 번개가 스파크를 튀기며 제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물론 그 주위도 멀쩡하진 않았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재앙에 도망치던 몬스터 역시 휘말렸기에, 전장 위에 살아 있는 생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털썩.
그는 그대로 자리에 쓰러져 내렸다.
왜인지 기시감이 느껴지는 상황이었지만, 적어도 벨라시온을 쓰러뜨린 직후처럼 의식을 잃진 않았다.
다만, 넝마가 된 왼쪽 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어마어마했다.
“…아프다고?”
월드의 피격 시스템 중 통증이 구현돼있긴 했다.
허나 법의 규제상 최대 30% 정도로, 맥시멈이라고 해봐야 주먹으로 한 대 얻어맞는 정도다.
그것도 단발성이었기에, 이렇게 지속되지 않았다.
물론 가상현실 게임인 만큼 동화율이 높아지면 정말로 이 세상이 현실이라 착각하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건 정말로 극소수밖에 없는 사례였다.
하지만 어깨에서 느껴지는 불에 지지는 듯한 고통은 실제의 것과 다름이 없는 것 같았다.
게임 캐릭터의 능력치 덕분에 한숨 정도로 참아내는 것이지, 현실에서 이러한 상처를 입었더라면 눈물 콧물 다 빼면서 자지러졌을 터.
“감각 엔진도 업데이트했나. 아파 죽겠네.”
어찌 되었거나 이진한은 상처의 치료를 위해 포션을 꺼냈다. 그러곤 걸레짝이 된 어깨에 부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호전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
그는 손에 쥔 빈 병을 바라보았다.
분명 최상급 포션이다. 최소한 살갗은 정상으로 되돌아와야 정상이었지만, 상처에 흡수되지도 않고 땅으로 흘러내릴 뿐이었다.
‘버그? 아니면 오류?’
이진한은 눈살을 찌푸리며 이번엔 엘릭서를 꺼내 들었다.
포션보다 더 상위의 아이템인 엘릭서라면 능히 상처를 치료할 수 있으리라.
“…….”
하지만 그는 자신이 구덩이에 나온 직후 엘릭서를 복용했었음을 깨달았다.
“치료가 통하지 않는 저주인가.”
상태창을 켜서 스테이터스를 바라보았지만, 상태 이상이나 그와 비슷한 저주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베르너님-!”
성벽 위로부터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부유 마법으로 날아왔다.
그녀들은 창백한 얼굴로 지상에 내려앉더니 이내 다급한 손놀림으로 이진한의 상처를 살폈다.
탁.
일레이나 역시 그 뒤를 따라왔다.
곧 그녀는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조심스럽게 치료를 시작하고 있던 상처를 바라보더니 혀를 내둘렀다.
“그 흑마법사가 마족이라도 된 건가요? 아무리 초월지경이라 할지라도 차원이 다른 기운인데.”
“녀석을 쓰러뜨리니까 그 주인이 나타나더군.”
“…마르바스 본인이요?”
어깨를 으쓱이며 말해온 이진한의 말에 일레이나의 입이 쩍 하고 벌어졌다.
그녀는 곧 떨리는 눈동자로 슬쩍 구덩이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구덩이 안쪽은 아직 초월 마법의 여파가 은은하게 남아 있는 상태. 그 가운데 남아 있는 건 처참하게 짓이겨져 몇 남지 않은 뼛조각뿐이었다.
“…그러면 마왕을 쓰러뜨리신 건가요?”
“완전체는 아니었어. 아마 1% 정도?”
마왕 정도의 네임드면 1부의 최종 보스인 고대신, 혹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공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고룡 정도와 비슷할 것이다.
그중 공략에 성공했던 고대신도 최상위 랭커가 로테이션을 짜서 거의 며칠 가까이 쉬지 않고 두들긴 끝에 쓰러뜨린 것이다.
마왕이 그와 비슷한 수준의 강함을 지녔다면, 지금 아이돈의 몸에 강림해 보인 강함은 말 그대로 1% 정도에나 불과할 터.
‘애초에 초월 마법이라고 해도 몇 방 만에 쓰러뜨릴 상대는 아니지.’
스토리 초반부이니 맛만 보여주려는 것이리라.
“…베르너님, 치료가 안 돼요.”
“포션도 먹히지 않습니다.”
상처 위로 힐링 마법을 퍼붓던 엘레오노라가 울상을 지으며 말해왔다.
미르엘 역시 그 위로 포션을 붓고 닦기를 반복했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자 침중한 낯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비켜 봐요.”
잠시간 구덩이 가장자리에 서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일레이나는 한숨을 내쉬더니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무슨 뾰족한 방법이라도 있으신가요?”
“제 부전공이 악마 관련이거든요.”
엘레오노라의 물음에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조소를 흘린 그녀는 이진한의 곁에 앉았다.
“고위 마족의 마기에 입은 상처는 평범한 방법으로는 치료하지 못해요. 더군다나 마왕의 것이라면…….”
일레이나가 두 손으로 허공을 어루만지자 기하학적인 문양이 떠오른다. 그것은 이진한으로서도 처음 보는 형태의 조화였다.
대현자의 눈이 활성화되었다.
대마도사에 이른 이해력은 순식간에 그 술식을 해체했고, 파악했으며, 이내 습득해버렸다.
[마기 완화의 술식을 획득하셨습니다.]
“혹시 마나 포션 남은 것이 있나요? 성벽에서 마법을 너무 많이 써서 마나가 고갈되기 직전인지라.”
일레이나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점차 치료되고 있긴 하지만, 워낙 드센 마기였기에 소모되는 마나가 적지 않았다. 그렇기에 물은 것이었으나, 이진한은 고개를 저었다.
“됐어. 이제 내가 할게.”
파아앗-.
이진한이 제 오른손을 들어 왼쪽 어깨에 가져가자 그녀가 발한 것과 같은 술식이 떠올랐다.
그러자 순식간에 상처는 아물었고, 그 광경을 본 일레이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아니, 사용하실 수 있으셨던 거예요?”
“아니. 방금 보고 배웠는데.”
“네? 그걸 저보고 믿으라고요?”
“그건 네 자유지.”
이진한은 상처를 치료하는 것보다 마기를 걷어내는 데에 집중했다.
이윽고 잔여 마기가 전부 사라지자 그는 새로운 포션을 꺼내 그 위에 부었다.
상처는 흉터 하나 없이 깔끔하게 회복된바.
HP도 MP도 꽉 채워진 상태였지만, 이전까지의 싸움으로 정신력 쪽은 한계치에 도달했는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찌 되었든 좋게 끝나서 다행이에요.”
“그러게.”
엘레오노라의 말에 이진한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고요하던 성벽은 다시 부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성문이 빼꼼 열리더니 말을 탄 몇 명의 인원이 아랄 산맥 쪽을 향해 달려 나갔다. 아마 몬스터 군단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한 정찰병인 듯했다.
남은 병사들은 성벽에 쌓인 몬스터의 사체를 정리해나갔다. 그것 하나하나가 돈이 되는 것이니 분류해두는 것이리라.
부우우우우우우-.
이윽고 전쟁이 끝났음을 알리는 긴 뿔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으니.
“돌아가자.”
이진한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제 일행에게 고했다.
***
몬스터 대군의 침공이 끝나자 이진한 일행은 그야말로 영웅 대접을 받았다.
두려움에 떨며 집 안에 숨어 있던 시민들이 모두 뛰어나와 그 이름을 노래했고, 이진한이 마경 벨데르에서 악룡(惡龍) 벨라시온을 쓰러뜨린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것이 알려지자 환호는 절정에 이르렀다.
이진한으로서는 하루 정도의 휴식 후 곧바로 도시를 떠나고 싶었지만, 조금 더 여유를 갖기로 했다.
그런 그에게 전쟁 가운데 영주 성에 틀어박혀 있던 영주가 접근해왔다.
일레이나에게 듣기로는 엄청난 겁쟁이인지라 몬스터 대군에 둘러싸여 있지 않았으면 가장 먼저 도망칠 궁리를 했을 족속이라고 했다.
영주는 들뜬 민심을 제게 끌어들이려는 듯 이진한에게 후한 보상을 내렸다.
거의 오백만 골드에 달하는 보석과 재화. 그는 사양할 것 없이 꿀꺽 삼켜버렸다.
그리고 길드의 안.
소르뎀의 인도를 따라 지부장의 집무실로 가는 와중, 내부에 자리한 모험가들이 그를 우러러보았다.
처음 왔을 때와는 딴판이 다른 대우에 이진한은 코웃음을 치며 제 일행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약속드렸던 보상입니다. 이로써 저희 지부는 한동안 거덜 나게 생겼군요.”
일레이나가 동석한 가운데, 소르뎀은 허허 웃으며 탁자 위로 두둑한 주머니를 내밀었다.
이진한은 씩 웃으며 그것을 받아들였지만, 이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오백만 골드밖에 안 되는데?”
“…예? 하지만 영주님께서 보상 절반에 달하는 재화를 하사하셨다고…….”
“그건 영주가 나한테 감사의 표시로 준 거고. 길드의 건은 이야기가 다르지.”
그가 장난하냐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비틀자, 소르뎀은 창백해진 안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 하지만 이번 일로 길드도 피해가 큰…….”
“그래서 주지 못하겠다? 그러면 직접 받아야지.”
이진한이 눈짓하자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벌떡 일어나 집무실 내부를 뒤지기 시작했다.
소르뎀이 순순히 의뢰금을 내놓지 않으리라는 예상은 이미 그녀들과 이야기했던바.
주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받아내면 그만이었다.
“길드 예산은 정말로 500만 골드가 살짝 넘어요.”
장부를 들여다보던 엘레오노라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애초에 천만 골드는 없었나. 그러면서 일레이나에게 맹약을 시키다니, 참으로 대단한 배짱이었다.
“…아, 개인 금고를 찾았습니다!”
그때, 구석구석을 뒤지고 있던 미르엘이 수확을 전해왔다.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디뎌 그곳으로 다가가니, 소르뎀이 식은땀을 흘리며 이진한의 뒤를 따랐다.
“그, 그것은…….”
“마법으로 봉인되어 있군요. 평범한 수단으로는 열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러네.”
미르엘의 말처럼 마법 장치로 봉인된 금고로, 그 자체만 하더라도 제법 값어치가 나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진한이 누구던가.
검은 현자에게 있어 그깟 봉인을 해제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였다.
“[디스펠].”
그가 가볍게 웃으며 손을 뻗자, 어지간한 언락 마법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릴 봉인이 스르륵 해제되며 그 민낯이 세상에 드러났다.
“어디 보자, 어림잡아 백만 골드 정도인가. 많이도 해쳐 먹었네.”
금고 안쪽에 있는 것은 땅문서와 보석 더미였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4백만 골드 정도가 부족한바. 그렇기에 이진한은 슬쩍 고개를 들며 물었다.
“나머진 어쩔래.”
“기, 길드 건물을 팔아서라도…….”
“이런 시골에 있는 건물 따위로 400만 골드를 채울 수 있다고?”
그는 비웃음을 흘렸다.
오스칼 제국 수도에 있는 자신 소유의 휘황찬란한 저택이 200만 골드가 조금 넘는다. 이런 변방 도시의 건물이라면, 20만 골드가 넘으면 후하게 받은 것일 터.
“…….”
그제야 일레이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바로 전까진 그래도 소르뎀이 돈을 주기 싫어 내빼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사제 금고까지 털린 상황에서 400만 골드나 모자란 상황이 아닌가.
장내가 침묵에 휩싸인 가운데, 이진한은 고개를 들었다.
사실 정답은 정해져 있었다.
‘일레이나, 그녀가 키워드겠지.’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 서대륙에 관한 지식이 전무하다고 할 수 있었다. 앞으로 펼쳐지는 주무대가 서대륙이라고 생각한다면 길잡이 캐릭터가 한 명 등장해야 할 터.
일레이나라면 어느 정도 유명세도 있고, 서대륙에 관한 지식도 해박할 테니 안성맞춤인 상대였다.
“금액이 부족하면, 현물로 받아 간다고 했었지.”
소르뎀과 일레이나가 침을 꿀꺽 삼켰다.
맹약은 절대적이다. 자력으로는 맹약을 지킬 수 없었으니, 앞으로의 방향성은 그 입에서 나올 말에 갈렸다.
그렇기에 이진한은 엄숙히 선언했다.
“일레이나를 받아 가지.”
“…예?”
그 말에 일레이나는 진심으로 당황한 듯 입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