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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23화 (23/210)

◈ 023.

이진한이 초월 마법에 당하더라도 한 번에 즉사하지 않는 것처럼, 아이돈 역시 진홍의 보옥에 직격 당했음에도 단번에 쓰러지지 않았다.

슈우욱-.

전장 위로 깊이 파인 구덩이 위로 새하얀 연기가 휘몰아치며 상승 기류를 만들어낸다. 아이돈은 그 한 가운데 서서 뼈만 남은 상태로 거칠게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빌어먹을.

하지만 치명상을 입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리치의 몸이었기에 버틴 것뿐, 인간의 육신이었더라면 온몸이 녹아버렸을 게 분명했다.

파스슥-.

스태프에 의지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자, 물렁거리던 지면이 무너져 내렸다.

아이돈은 얼마 남지 않은 마기로 몸을 띄웠다.

‘용사의 존재는 상정했던 변수지만, 그 강함은 명백히 궤를 벗어나 있다. 서둘러 보고를 올려야…!’

아직 진홍의 보옥이 떨어져 내린 여파가 가라앉지 않았다.

전장은 그야말로 지옥도가 되어 수천, 아니 수만에 달하는 몬스터가 짓이겨지며 아비규환이 된 상태.

혼란이 절정에 이른 지금, 그는 은밀히 몸을 내뺄 생각이었다.

“어딜 도망가려고?”

그리고 그 위.

구덩이의 가장자리에 쪼그려 앉아 있던 이진한이 부유 마법으로 올라오고 있던 아이돈을 보곤 활짝 미소 지었다.

-잠……!

“너한텐 안 된 소리인데.”

그의 손에 들린 듀란달이 다시금 찬란한 빛을 내며 반짝이기 시작했다.

마족 혹은 그와 비슷한 부류에게 타격을 입힐 방법은 많지만, 끝장내는 데에는 성검만 한 것이 없었으니.

타닷-!

이진한이 땅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아이돈은 다급한 표정으로 부유 마법의 궤도를 바꾸려 했지만, 마기가 별로 남지 않아 충분한 속도가 나오지 않았다.

탁.

이내 아이돈의 어깨를 밟고 그 위에 올라선 이진한이 듀란달을 역수로 들었다.

“난 후환을 남겨두지 않아.”

아이돈이 무어라 다급히 외치려 입을 벌렸지만, 그는 그 안으로 듀란달의 날을 박아 넣었다.

파가각-!

앙상한 뼈가 부서지며 그 중심에 있는 핵에 도달했다.

아주 찰나 동안은 검 끝을 밀어내며 저항하는가 싶더니, 이내 자글자글한 균열이 퍼지며 그 몸 자체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Lv.1325 리치킹 아이돈 처치했습니다!]

“애먹게 하고 있어.”

간단명료한 메시지에 이진한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석적으로 서로의 모든 것을 꺼내 싸움에 임했더라면 벨라시온 이상으로 성가신 적이 되었으리라.

유령 성채나 망령의 군단을 소환했다면 지지부진한 소모전이 계속되었을 것이고, 아무리 이진한이라도 그 모든 것을 돌파해 지금처럼 아이돈과 일기토를 벌이려 했다면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을 터.

하지만 아이돈의 시선은 이보다 더 멀리 있었다.

제 계획이 있었는지 미들턴 따위는 순식간에 함락시키리라 생각하고 있어 그 앞을 가로막아선 이진한을 진지하게 탐색하지 않았다는 것이 제일 큰 패착이었다.

“나머지 흑마법사들은 알아서 정리당하겠지.”

흑마법사끼리는 철저하게 파벌이 갈렸다.

마르바스 교단의 교주인 아이돈이 죽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그 틈을 타 다른 세력의 흑마법사들이 마르바스 교단 휘하 흑마법사들을 회유하거나 제거해 나갈 터.

슬쩍 위를 바라보니 세뇌 마법이 풀렸는지 며칠 밤낮 동안 성벽을 두드리던 몬스터 군단 역시 뿔뿔이 흩어져 원래 있었던 아랄 산맥 쪽을 향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절그럭.

이진한은 아이돈의 잔해더미 속, 덩그러니 놓여 있던 스태프를 집어 들었다.

[막시밀리안의 저주받은 스태프(에픽)을 획득하셨습니다.]

“흠.”

외형이나 능력치나 모두 평범한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초월지경에 오른 흑마법사가 사용하기에 한참이나 부족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바.

“이것도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건가?”

엘레오노라가 차고 있던 에루스탄의 팔찌 역시 황족의 아티팩트 치곤 그다지 특별한 것이 없었다.

잠시간 스태프를 툭툭 치던 그는 이내 그 끄트머리에 달려 있던 마나의 결정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콰직.

바닥에 널브러진 잔해 안으로 반짝이는 조각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진한이 그것을 집어 들자 돌연 연기로 변해 그의 손바닥 안으로 스며들었다.

[영원의 결정 - 수집률: 2.5%]

【126:29:52】

시간의 유예가 단숨에 늘었다.

그래 봐야 닷새 남짓한 시각이었지만, 그래도 며칠간의 말미를 얻었으니 다음 에피소드를 진행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듯싶었다.

“그러면 뒷정리는 다른 사람들한테 맡기고.”

며칠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몬스터의 습격을 막아내느라 피곤하기 그지없다.

하루 정도는 아무 생각하지 않고 편히 쉬리라 생각하며 몸을 돌렸을 때, 등 뒤에서 느껴지는 낯선 감각에 발걸음을 멈춰 섰다.

“….”

이진한은 어깨 너머 뒤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아이돈의 사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핵은 산산이 조각나 흩어졌지만, 부서진 뼈들은 마치 공룡의 화석처럼 덩그러니 바닥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착각인가?”

그는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찰나 동안이지만 등줄기가 짜르르해질 정도로 기분 나쁜 기시감이 감각을 훑고 지나갔다.

모체가 되는 핵을 부쉈으니 부활할 수는 없을 터.

하지만 이진한은 다시 듀란달을 꺼내든 채 몸을 돌려 그 잔해로 다가갔다.

“찝찝한 건 질색이야.”

다시금 검을 역수로 든 채 비교적 멀쩡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두개골 위를 겨누었다.

쉬익-.

그리고 검 끝이 그것을 찔러갔을 때.

파아아아앗-!

이전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마기가 그것을 중심으로 뿜어져 나왔다.

“…윽!”

이진한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듀란달을 휘둘렀다.

숨을 쉬는 것만으로 폐부에 칼날을 후비는 것 같았다.

허공을 뒤덮은 마기는 치명적인 독과 같은 성질을 품고 있는바.

손발 끝이 저릿저릿해질 정도로 강렬한 저항을 보아하니, 생의 끝에서 발버둥치는 최후의 발악 따위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아직 이런 힘이 남아 있다고?’

수읽기 싸움은 자신이 승리한 줄 알았다.

설마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이런 힘을 숨기고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입술을 씹으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쉬이익-.

자욱하게 피어오른 마기 가운데, 널브러져 있던 뼛조각들이 떠올라 다시금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곧이어 혈관과 근육을 비롯한 살점이 그 위를 뒤덮었고, 종래엔 창백한 안색을 지닌 남자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

이전에 보였던 아이돈과는 완벽히 다른 모습으로, 수려하다고 할 수 있는 이목구비였다.

짙은 음영을 품고 있는 퇴폐적인 눈이 유일한 단점인 듯했지만, 오히려 그 부분에서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중간계는 오랜만이거늘, 썩 유쾌하지 않구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진한은 그 존재와 시선이 맞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Lv.???? 「마왕 마르바스」

마왕(魔王).

그 이름이 주는 무게에 호흡이 가빠졌다.

단지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짓눌리는 듯한 압박감을 받았다.

듀란달의 끝이 잘게 떨린다. 항거할 수 없는 공포를 만났을 때처럼 이성이 마비되며 사지 육신이 굳었다.

-인간의 아이야. 스스로 용사임을 말했느냐.

마르바스는 천천히 오른손 들어 검지로 이진한을 가리켰다.

그러자 온 천지의 마나가 요동치며 그 손가락 끝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이진한의 입장에선 마치 끝을 알 수 없는 심연과 마주한 듯한 느낌이었다.

-본래라면 좀 더 느긋하게 이야기를 즐겼겠지만.

우우우웅─.

막대한 기운에 공간 자체가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그 너머의 보이는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는, 흡사 블랙홀을 보는 것만 같았다.

-이만 죽어주어야겠다. 지금 시점에서 용사의 등장은 예정에 없던 일이거든.

피잉-!

마치 레이저가 쏘아지듯, 그 손가락 끝에 응축된 무지막지한 기운이 일점(一點)을 꿰뚫으며 쏘아졌다.

“……!”

그제야 전신이 짓눌리던 압박에서 벗어난 이진한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 접어든 극한의 영역.

세계의 시간이 느려지며 사고가 가속했다.

피하는 것은 불가.

마법은 캐스팅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제시간에 맞출 수 없다.

듀란달에 오러 블레이드를 담아 휘두른다고 해도 쏘아진 기운을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파아앗-!

그렇기에 그는 팔라딘 클래스에 전력을 쏟았다.

대천사의 가호를 비롯한 수많은 버프가 몸을 휘감았고, 농밀한 신성력이 성검 위로 솟아올라 쏘아진 기운에 대항했다.

파각-.

하지만 근원에 다다른 마기 앞에 신성력은 바람 앞의 등불이나 마찬가지.

제일 먼저 듀란달이 반 토막 났다.

검 끝에 그 기운이 닿자마자 가루조차 남기지 않은 채 형체가 일그러졌고, 그 뒤엔 몸을 지키는 수많은 가호를 종잇장처럼 찢으며 몸을 꿰뚫었다.

“…커헉!”

다행인 점은 그 궤도를 아주 살짝이라도 비트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본디 단숨에 심장을 꿰뚫었을 그것은 왼쪽 어깨를 짓이겼고, 그 너머에 커다란 폭발을 만들어냈다.

“…….”

그 여파로 인해 뒤로 나자빠진 이진한은 소리 없는 신음을 토해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좌반신은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숨 쉴 때마다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고, 금방이라도 몸에서 떨어져 나갈 듯 찢어진 살점과 부서진 뼈가 덜렁거렸다.

하지만 언제까지 누워있을 수 없었다. 후속 공격이 닥쳐올 수도 있었기에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흠. 피했는가.

마르바스는 제 공격이 빗나갔음에도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또다시 공격을 가하려는 것인지 재차 손을 들어 올렸지만, 이내 그 몸은 휘청거리며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음.

그는 나지막한 신음을 흘리며 밑을 내려다보았다.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입자의 존재가 위태로이 흔들렸다.

무릎 꿇은 다리는 그 끝에서부터 신기루처럼 사라지기 시작한 상태. 잠시간 그것을 바라보던 마르바스는 짐짓 인상을 쓰며 입을 열었다.

-아직 인과율이 충분하지 않은가. …허나.

이진한을 끝장내려는 결심엔 변함이 없는지 다시금 온 세상의 마나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타다다닷-!

이진한은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상처를 치료할 틈새는 없다.

전력을 다해 땅을 박찼고, 순식간에 무릎을 꿇고 있던 마르바스에게 쇄도해 그 목에 반절 남은 듀란달을 박아 넣었다.

푹.

마르바스는 예상치 못한 저항이었는지 두 눈을 크게 떴다. 이진한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이면서도 그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내 시점에서도 마왕의 등장은 예정에 없던 일이거든.”

-……!

파아아아앗-!

듀란달에서 일어난 찬란한 신성의 빛이 제 목을 타고 전신에 퍼지자 마르바스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며 격렬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네…놈!

타닷-!

듀란달의 손잡이를 놓은 이진한은 자리를 박차고 구덩이의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러곤 인벤토리에서 엘릭서를 꺼내 마시곤, 재차 손을 넣어 스크롤 다발을 끄집어냈다.

찌이익-.

수십 장의 스크롤이 사정없이 찢겨나갔다. 그러자 허공에 수십 개의 마법진이 생겨났고 어마어마한 마력의 흐름이 천지를 뒤흔들었으니.

“그러니까 다시 지옥으로 꺼져라.”

훗날 멀리 성벽 위에서 그 싸움을 지켜봤던 병사 중 한 명이 말하길, 그 순간 온 세상이 찬란한 빛으로 뒤덮이는 것 같더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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