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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22화 (22/210)

◈ 022.

“기묘하구나. 마도사인 줄 알았거늘, 이리 농밀한 신성력이라니… 하지만.”

아이돈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휘둘렀다.

마왕의 계보를 잇는 그에게 있어 신성의 기운을 품은 이들은 그야말로 상극과 같았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 두드러기가 일어나며 격렬한 격멸과 분노가 피어오른바.

자신의 몸에 그 빛무리를 닿게 하고 싶지 않았다.

파아아앗-!

허공에서 뻗어나간 시커먼 촉수들이 그 움직임을 옭아맸다.

초월지경에 오른 그의 마기는 여타 흑마법사들과는 달리 상극에 영향을 받지 않았고, 듀란달에 피어난 신성력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며 그 공격을 무위로 되돌렸다.

“감히 내 앞을 홀로 막아선 것은 어리석은 만용에 불과하다.”

촉수들은 그것도 모자라 검은 날개를 펄럭이며 허공을 날아오던 이진한의 사지를 옭아맸다.

그는 속박에서 벗어나려 힘껏 몸부림쳤지만, 그럴수록 거미줄에 얽힌 먹잇감처럼 온몸을 구속당했다.

“마도사 주제에 신성력을 다루는 것은 그 검의 능력이렷다?”

아이돈은 흥미 섞인 시선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진한은 검은 촉수로 전신이 결박된 상태. 신성력조차 잡아먹는 그것에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천천히 앙상한 손을 뻗어 이진한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좋은 재료로군.’

마도사와 신성력의 조합이라니 괴상했지만, 다른 몬스터와 합성해 인간형 키메라로 만들면 제법 볼만한 작품이 나올 듯싶었다.

“…….”

이진한은 촉수들에 붙들린 채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였으나, 도중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죽으면 로그아웃할 수 있지 않을까?’

이미 강제 로그아웃 시점을 한참 넘긴 시점이다. 그렇기에 언제까지 이 상황이 계속되려나 기다려봤지만, 정신적 피로의 누적은 극에 달했다.

“…야, 한 가지만 묻자.”

“무엇이지?”

아이돈은 자신에게 붙잡힌 상태에서도 굴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이진한의 태도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순순히 그 물음을 들어준 것도 호기심에서 나온 발로일 것이리라.

“내가 여기서 순순히 포기하는 게 나으려나?”

“…별 해괴한 의문이구나.”

아이돈은 그 당돌한 기색에 기가 찬 것인지 입가를 비틀었다.

전신이 속박된 그 상태에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일까.

근거 없는 자신감은 스스로 목을 옥죄어올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꽈아악.

촉수가 이진한의 몸을 더욱 강하게 옭아맸다.

이제 가벼운 손짓 한 번이면 그 전신을 갈가리 찢으며 고깃덩어리로 만들어버릴 터.

아이돈은 가늘어진 눈으로 턱 끝을 들었다.

“한껏 발악하며 발버둥 치며 끝내는 좌절해보아라. 그 추한 모습은 대계(大計)의 전희로는 더없이 걸맞을 터이니.”

한없이 오만한 태도였다.

“…….”

그 모습에 이진한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자신을 깔보는 그 언사에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스멀스멀 열기가 피어올랐고, 듀란달을 쥐고 있던 손엔 절로 힘이 들어갔다.

“…꼴 받네.”

스트레스는 절정에 이르러 오히려 유쾌함의 영역에 들어섰다.

어처구니가 없음에 살짝 벌려져 있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고, 이마 위로는 시퍼런 힘줄이 불뚝 솟아올랐다.

입은 웃지만, 눈은 어느 때보다 싸늘했으니.

콰아앙-.

“음?”

성벽 쪽에서 자신에게 닥쳐온 마법들에 아이돈은 그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이진한 역시 그 위로 시선을 보내자 일레이나와 엘레오노라를 비롯한 마법사들이 다급한 표정으로 이쪽을 공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같잖은.”

아이돈은 찌푸린 눈으로 왼손을 들었다.

날파리 같이 성가신 존재들이었다. 그렇기에 일시에 정리해버리려고 할 찰나,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진명개방.”

파아앗-!

어둠에 잠식되어 가던 듀란달 위로 다시금 찬란한 서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기울어라, 천칭의 검이여.”

이진한의 몸을 휘감은 촉수들이 재차 그것을 공격해나갔지만, 이전과 달리 가까이 갈수록 크나큰 저항을 받았고 종래엔 성화(聖火)에 휩싸여 스러져 갔다.

「정의를 판가름하는 천칭이여, 악을 베어라.」

성검(聖劍) 듀란달.

은백색 검신이 휘둘러지자 전장 위에 내려앉은 어둠이 갈라지며 아이돈의 모습이 드러났다.

“윽…!”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황급히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이전과 같이 검은 촉수들이 솟구쳤다. 그것도 모자라 성벽을 두드리던 키메라까지 몸을 돌렸지만, 듀란달을 막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서걱-.

아이돈의 피륙 위로 검은 실선이 그어졌다.

왼쪽 이마서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 비스듬히 그어진 그것에서 시커먼 피가 솟구치며 허공에 튀어 올랐다.

“이…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동시에 그 눈동자에서 생명의 빛이 꺼졌고, 전신을 뒤덮고 있던 마기의 불꽃 역시 사라져갔다.

싸움은 그렇게 일단락되는가 싶었지만, 이진한은 여전히 전의를 거두지 않은 채 날카로운 눈으로 입을 열었다.

“같잖은 연기는 그만하지.”

초월지경에 이른 흑마법사가 성가신 것은 이다음의 현상 때문이었다.

파아앗-!

짙푸른 불꽃이 다시금 그 전신을 뒤덮기 시작한다. 살 거죽은 금세 타버려 재로 변했고, 이내 앙상한 뼈만 남은 모습이 되었으니.

-놀랍구나. 설마 여기까지 알고 있을 줄이야.

텅 빈 해골의 안쪽으로 시뻘건 빛이 서렸다.

턱뼈가 덜덜거리며 듣기 싫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이내 그 전신으로 고급스러운 로브가 둘리며 존재의 각성을 표시했다.

Lv.1325 「리치킹 아이돈」

단숨에 300레벨 가까이 오르며 교주란 이름이 리치킹으로 바뀌었다.

장엄한 BGM이라도 깔려야 할 듯한 등장이었으나, 시끄러운 전장의 소음이 그것을 대체해 실로 더 없이 어울리는 장면이 되었다.

-신성 왕국에서 마도사를 길렀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네 녀석, 대체 정체가 무엇이지?

이진한은 그 물음에 듀란달을 들었다.

마땅히 해줄 말은 없었지만, 손에 쥔 성검을 보자니 적당한 대답이 떠올랐다.

그렇기에 씩 웃으며 듀란달의 끝을 아이돈에게 겨누며 입을 열었다.

“여신이 그러더군. 너희를 모두 족쳐달라고.”

-…용사라고? 과연.

아이돈의 눈이 가늘어졌다.

뼈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안에서 일렁이는 시뻘건 불빛이 감정을 표시해낸 것이었다.

이진한으로선 농담 삼아 던진 말이었지만, 지금 상황에 그것만큼 어울리는 것은 없었다.

‘마왕께서도 경계하셨지. 자신들이 본격적으로 나선다면 필시 그 인과의 결과가 뚜렷한 형태로 나타나리라고.’

용사가 아니라면 어찌하여 마도사의 경지를 이루었으며 성검까지 다룰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아이돈은 개의치 않았다.

용사라 할지라도 아직 여물지 않은 열매였다.

인간의 형태를 버리고 불멸의 가호를 받은 리치킹으로 각성한 자신 앞에선 한낱 아이와 같을 터.

-하지만, 그런다고 한들 변하는 것은 없다.

파아앗-!

그가 손을 휘두르자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농밀한 마기가 온 천지를 뒤덮었다.

그 가운데 수십 개에 달하는 촉수가 솟구쳐 이진한에게 닥쳐온바.

진명을 개방한 듀란달조차 감히 그 막대한 기운을 막아내지 못했다.

촤르륵-.

그 모습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려던 찰나, 돌연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윽고 눈앞에서 일어난 광경을 본 아이돈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주박의 사슬?

“잘 아네.”

보랏빛 사슬 수십 개가 마찬가지로 허공에서 솟아나 촉수들을 옭아맸다.

촉수들은 그것에서 벗어나려 몸을 비틀었지만, 사슬은 쉽사리 우위를 내주지 않으며 그 조임을 더욱 단단히 했다.

-검은 현자의 흉내라도 낼 셈이더냐. 시대에 뒤처진 구식 마법 따위.

“…시대에 뒤쳐졌다고? 그건 조금 자존심 상하는 말인데.”

검은 현자의 은거 이후 그 계파를 이은 후손들은 세상 곳곳에 퍼져 현자의 가르침을 전파했다.

아이돈 역시 마법사인 만큼 검은 현자의 오리지널 마법 중 하나인 주박의 사슬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더군다나 리치킹인 그에게 있어 마법과 마법의 우열을 가리는 힘 싸움은 오히려 환영할 따름이었다.

꽈아악-.

하지만 주박의 사슬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찌나 질긴 것인지 한 가닥조차 끊어지지 않은 채 그 본분을 다했고, 종래엔 그것을 파훼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깨달았다.

“그래, 주박의 사슬은 너희 같은 존재에 한해서 절대적인 우위를 지니지. 너 정도의 흑마법사라고 해도 직접 접촉하지 않는 이상 마기만으로는 끊어낼 수 없을 걸?”

-…그렇다 한들.

쿵.

아이돈은 허공에서 발을 굴렀다.

그러자 전장이 들썩이며 대지에서부터 거대한 어둠의 물결이 일어나 용솟음치기 시작했으니.

-결과에는 변함이 없으리니.

리치킹 클래스의 초월 마법

「개미지옥」

사방을 뒤덮은 촉수의 거대화 버전이었다.

집채만 한 크기의 그것이 두 줄기로 나뉘어 이진한에게로 닥쳐왔고, 이내 그를 찌부러뜨릴 듯 양옆에서 막대한 힘으로 짓눌렀다.

그극, 그그극-.

이진한은 고개를 들어 아이돈을 바라보았다.

개미지옥은 그 영역 안으로 대상을 끌고 들어가 힘을 흡수하는 드레인 계열의 마법이었다.

아무리 그라 할지라도 개미지옥 안에 갇히게 되면 큰 피해를 입을 것이 자명한 일.

물론 순순히 당해줄 마음도 없었다.

펄럭-.

이진한은 제 로브의 자락을 펄럭이며 손을 들어 올렸다.

“초월 마법.”

-…뭐라?

이진한의 입에서 흘러나온 단어에 형형하게 타오르던 아이돈의 안광이 당황한 듯 일렁거렸다.

대마도사 클래스의 초월 마법

「진홍의 보옥」

마법의 보조를 위해 스크롤 다발을 찢어낸 그는, 이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조소를 지었다.

“리치킹 클래스를 상대하기 성가신 점은 그 휘하에 부릴 수 있는 병력이 많기 때문이지. 내 앞에 홀로 나선 순간, 패배한 건 네놈이다.”

각성 직후 리치킹 클래스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망령의 군단이나 유령 성채를 소환했더라면 아무리 그라도 고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돈은 자만했다.

이진한을 비롯한 눈앞의 모든 존재를 제 발밑으로 여겼고, 제 전력을 드러낼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흡……!

그의 전신으로 짙은 청색의 마기가 해일처럼 휘몰아쳤다.

리치킹의 상징인 유령 성채를 소환과 동시에 망령의 군단을 일으키려는 듯했지만, 그것을 두고 볼 이진한이 아니었다.

“늦었어.”

밤하늘 위로, 시뻘건 태양이 떠올랐다.

성채에 있는 이들은 물론, 전장 가운데서 몸을 들이밀던 몬스터 군단 역시 우두커니 멈춰선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상식을 벗어난 현상에 온 천지가 침묵에 잠겼다.

하지만 그 직후 지상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태양의 모습에 몬스터들은 하나둘씩 세뇌에서 풀려나기 시작했는지 몸을 돌려 격렬한 움직임으로 자리에서 달아났다.

쿠구구구궁-.

지면에 그 열기가 닿았다.

마치 뭉쳐놓은 용암이 퍼져나가듯 시뻘건 화마가 온 사방을 휩쓸었고, 둔중한 충격이 땅을 뒤흔듦과 동시에 머리가 쭈뼛해질 정도의 충격파가 주위를 스치고 퍼져나갔다.

구오오…….

단말마를 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다행이었다.

그 위에 존재하던 대부분의 몬스터가 순식간에 휘말리며 흔적도 없이 말 그대로 소멸해버렸다.

-끄으아아아아아-!

진홍의 보옥이 작렬한 영역 한 가운데, 아이돈은 괴랄한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비틀었다.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가 서 있던 곳은 진홍의 보옥이 떨어져 내리는 중심지였으며, 초월 마법이 발동되면 그 여파가 미치는 영역 안쪽에선 하위 마법의 발동이 대부분 실패로 되돌아갔다.

그렇기에 유령 성채의 소환과 망령 군단의 힘으로 그것을 막아내려 애썼지만, 정신을 집중해도 모자랄 판국에 전신이 불타는 고통을 참으면서 새로운 초월 마법을 발동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윽고 그 밑에 있던 개미지옥과 함께 짓눌리며 지면 밑으로 파묻혀갔으니.

“…설마 영원의 조각까지 타버리진 않겠지?”

그 위에서 여유롭게 밑을 바라보던 이진한은 돌연 떠올린 그것에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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