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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21화 (21/210)

◈ 021.

미들턴 도시가 공격당한 지 이틀째.

밤낮 가리지 않고 이어진 공격에 성벽 위는 지친 분위기가 가득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던 것은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든든한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짓 한 번마다 이루어 말할 수 없는 위력의 마법을 발휘하며 성벽 밑으로 잔뜩 짓쳐들어온 몬스터를 한 번에 수백에서, 많게는 수천까지 휩쓸어버렸다.

지금에 와선 큰 손실을 안은 채 결단을 내린 모험가 길드의 지부장 소르뎀과 부지부장 일레이나의 혜안이 칭송받을 정도였으니.

“또 쳐들어왔다고?”

다만, 그 영웅담의 주인공은 정작 귀찮아 죽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는 중이었다.

“…예. 베르너님의 휴식을 위해 가능한 저희 선에서 막아보려 했지만, 아무래도 벅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도움을 청하고자….”

기사 데니안은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막사의 문 사이로 기대고 선 베르너는 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장신이었다.

잠결에 뒤척인 것인지 잔뜩 헝클어진 머리 사이로 흉흉한 눈빛이 번뜩인다. 헐벗은 상체는 명장이 조각한 것처럼 완벽하기 짝이 없었으나, 군데군데 새겨진 험악한 상처들이 위협적인 분위기를 내뿜었다.

“…….”

데니안은 슬쩍 막사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일행인 두 여성의 미모에 대한 소문이 자자했기에 같은 막사에 있다던 그들을 무의식적으로 찾은 것이었지만, 베르너는 그 큰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덥석 움켜쥐며 말했다.

“바로 준비할 테니까 먼저 가 있도록.”

“예, 옙!”

반론 따위는 허락지 않겠다는 시선이었다.

그렇게 데니안이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자리를 떠났을 찰나, 이진한은 몸을 돌려 침상 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으. 또, 인가요?”

미르엘이 두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엘레오노라는 피로가 풀리지 않은 것인지 미동조차 하지 않은 모양새. 그것에 쓴웃음을 지은 이진한은 탁자에 걸어 놓은 외투를 걸치며 말했다.

“조금 더 쉬고 있어. 어차피 또 몇 놈 온 걸 테니.”

요 이틀간 몬스터 군단은 쉴 새 없이 성벽을 두들겼다.

그때마다 이진한이 나서서 처리하긴 했지만, 아무리 초인이라 할지라도 정신적인 피로가 쌓여만 갔다.

하지만 원흉인 교단 녀석들이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바.

그렇기에 그 역시 잠자코 기다렸으나, 이제 그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랐다.

‘남은 시간은 30시간 정도. 날이 밝으면 내 쪽에서 나서든지 해야겠군.’

자신을 귀찮게 한 값은 톡톡히 받아 내리라.

못해도 사지를 갈가리 찢어주겠다고 다짐하며 그는 제 로브 끝자락을 펄럭이며 막사를 나섰다.

“후우.”

성벽 위로 올라가니 어느덧 익숙해진 전장의 냄새가 코끝을 찔러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를 알아본 병사들이 주춤거리며 길을 비켰고, 이진한은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한창 격전이 벌어지고 있던 구역으로 향했다.

“또 개떼처럼 몰려왔네.”

그가 가볍게 손을 들어 올리자 허공에 시퍼런 불꽃이 서렸다.

곧 그것들은 가볍게 흩뿌려졌고, 이내 성벽을 타고 번지며 밑에 있던 몬스터 무리를 덮쳤다.

“…하암.”

이진한은 그 모습을 보며 가는 하품을 뱉어냈다.

지루하디 지루한 단순 작업이었다.

산더미 같은 몬스터 군단은 병사나 모험가들에게야 위협적인 수준이었지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에게 있어 눈에 차지 않는 잡몹 정도였으니.

“대충 끝났나.”

성벽에 몸을 기대고 있던 이진한은 발광하던 오우거의 사지가 타들어 가 쓰러지는 것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동이 트기 전까진 아직 한참이나 남은바. 그러니 서둘러 돌아가 조금이라도 더 자고 싶은 마음이었다.

“수, 수고하셨습니다!”

“드래곤 슬레이어께 경의를!”

그 주위에서 마법을 구경하던 기사와 병사들이 찬사를 보내온다. 이제 그들의 반응에 익숙해진 이진한은 가볍게 손을 휘저었고 건들거리는 모습으로 막사를 향했다.

쿵-.

“…….”

돌연 저 멀리서 들려온 묵직한 파열음에 그는 발걸음을 멈춰 섰다.

짧게 한숨을 내쉰 뒤에 또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드디어 납시셨나. 더럽게 비싼 몸들이군.”

지평선 끝으로부터, 어둠이 몰려왔다.

깊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어둠과는 확연하게 다른 색이었다. 내달리는 짙푸른 어둠은 몬스터 대군의 위를 뒤덮으며, 마치 해일이 몰아치는 것처럼 성벽을 향해 쇄도해왔다.

“어, 어어…….”

마법사도, 기사도, 병사도, 용병도.

누구랄 것 없이 생전 처음 보는 괴기 현상에 말을 더듬거리며 그것을 가리킬 뿐 움직이는 이는 없었다.

싸늘한 적막이 그 위에 내려앉았다.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알 수 있었다.

저것은 ‘죽음’이었다.

이곳에 닥쳐오는 순간 아가리를 벌려 그 안에 있는 날카로운 이빨로 자신들을 갈가리 씹어 먹으리라.

스릉-.

숨조차 쉬이 내쉴 수 없었던 무거운 분위기 가운데, 누군가 검을 뽑는 소리만이 청량하게 울려 퍼졌다.

은백색 검신이 곧게 뻗어 있는 십자 형태의 검이었다.

손잡이는 영롱한 황금색으로, 그것을 다잡은 이진한은 검 끝을 하늘 위로 세운 채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어린 양이여, 어둠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 너머에 있는 찬란한 빛이 네 이정표가 되어 발걸음을 이끌 것이니.」

파아앗-.

영롱한 빛이 듀란달의 끝으로 피어올랐다.

어둠이 걷힌다고 해서 단숨에 낮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두려움에 잠식되어 있던 이들의 정신을 일깨우기엔 충분한 것이었으니.

“……!”

제일 먼저 두 눈을 크게 뜬 것은 기사와 마법사들이었다.

“전원 태세를 갖춰라-!”

“멍하니 있지 마! 정신 차려!”

기사들은 마나까지 담은 채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아직 멍하니 있던 병사와 용병들을 각성시켰다.

마법사들은 정신을 집중한 채 마법을 활성화했고, 곧 다가올 미증유의 위험에 대비했다.

“흡-!”

이진한은 그 가운데 듀란달의 손잡이를 굳게 잡은 채 닥쳐오는 짙푸른 어둠을 베어 갈랐다.

희뿌연 안개처럼 성벽 위에 쏟아지던 그것들은 듀란달의 궤적을 따라 갈가리 찢어졌고, 마치 보이지 않는 선이라도 있는 것처럼 안쪽으로 접근하지 못했다.

“와아아아아아-!”

그가 눈앞에 닥쳐온 기이한 현상들에까지 압도적인 무위를 보이자 성벽 위의 사기는 최고조로 치솟았다.

어느 하나 함성을 지르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모두 조금 전의 피로는 싹 잊어버린 듯 흥분에 겨운 얼굴이었다.

턱.

듀란달을 어깨에 짊어진 이진한은 성벽의 난간 위로 발을 올리며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젠 어떻게 나오려나.”

교단으로서도 언제까지고 지지부진한 소모전을 할 수만은 없는 노릇일 것이다.

필시 그들을 경계하는 대립 세력이 있을 터.

방금의 그 공격 역시 지지부진한 상황에 결착을 내기 위해 그들이 직접 나섰다는 신호가 되었다.

우웅-.

성벽의 앞으로 허공 위에 짙은 어둠이 뭉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사람의 형상을 이루어냈으니.

“…교단의 흑마법사인가.”

그는 곧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로브를 벗었다.

그러자 옅은 잿빛 머리카락을 지닌 창백한 피부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바.

흑마법사의 인식과 같이 음침한 분위기에 초췌한 얼굴이었지만, 그 눈빛만은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영원의 결정 → 수집률: 0.7%]

[두 번째 조각의 위치가 탐지되었습니다.]

◎ 막시밀리안의 저주받은 스태프(에픽)

소유주: 아이돈

눈앞에 떠오른 상태창의 메시지에 이진한은 두 눈을 빛냈다.

영원의 결정 조각이 깃든 스태프를 쥐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에피소드의 보스가 분명해 보였다.

Lv.1052 「교주 아이돈」

대현자의 눈이 상대의 정체를 간파해냈다.

레벨로만 따지자면 벨데르에서 싸웠던 블랙 드래곤인 벨라시온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

하지만 월드의 세계관에서 레벨은 절대적인 강함의 기준이 아니었다.

‘그랬더라면 내가 벨라시온을 이기지 못했겠지.’

그의 레벨은 1부의 천장인 999를 돌파해 딱 1천에 이른 상태였다.

벨라시온에게는 한참이나 미치지 못했지만, 고레벨 간의 전투는 상성과 수읽기의 싸움. 그렇기에 녀석을 꺾고 승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네 녀석이로구나.”

아이돈은 성벽 위에 서 있는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 규모의 몬스터 군단이라면 아무리 늦어도 하루 밤낮이면 성벽을 무너뜨리고 미들턴 도시를 유린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외의 존재가 나타나 그 앞길을 가로막았으니 성가시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뒤바뀌지 않는다. 세상은 결국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것이니-.”

마치 싸움의 전조를 알려오는 듯한 그 광경에 이진한은 듀란달을 거머쥐었다.

상대가 직접 전투를 일삼는 사출계인지, 아니면 망령을 부리는 사령계인지 모르는 상황이니 신중한 기색이었다.

이윽고 아이돈은 제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발밑으로 어둠이 서렸고, 전장 위에서 썩어가던 몬스터의 사체들이 한군데로 뭉치기 시작했다.

“사령계인가. 이건 까다롭겠네.”

차라리 베틀메이지 클래스라면 힘 싸움으로 직접 부딪쳐서 깨부수면 그만이었지만, 사령계라면 그 휘하 망령들까지 전부 상대해내야 했다.

초월지경에 이르러선 망령들의 강함도 이전과 사뭇 다른 수준이 되기에 제법 성가신 상대였다.

“이건……!”

휴식을 취하던 중 아이돈의 기운을 느끼고 황급히 뛰쳐나온 것인지 가벼운 차림에 로브만 두른 일레이나가 경악한 표정으로 그 옆에 다가왔다.

“마르바스 교단이란다. 아는 거 있어?”

“…72마왕 중 하나인 마르바스를 섬기는 흑마법사들이에요. 하지만 그들은 분명 신성 왕국에 의해 본단이 파괴되었을 텐데.”

일레이나는 심각한 얼굴로 입술을 씹으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의 태도를 가벼이 흘려 넘긴 이진한은 듀란달을 들고 막 조립이 끝난 괴물을 가리켰다.

“일단 저거부터 쓰러뜨려야 할 것 같은데, 할 수 있겠냐?”

-그으아아아아!!

온갖 몬스터의 사체가 뭉쳐 만들어진 키메라는 온 세상이 떠나가라 포효를 내질렀다.

단순히 덩치만 보아도 이때껏 성벽을 두드리던 몬스터들과는 차원이 다른 크기였다. 거기에 아이돈의 사령술로 강화되었으니 지닌 힘 또한 심상치 않을 것이 분명했다.

“당신은요?”

“나는 저놈 목따러 가야지.”

“…가능은 하고요?”

턱.

사뭇 불안감이 서린 일레이나의 눈동자에 이진한은 가벼운 몸짓으로 성벽 위에 올라탔다.

“아무렴, 성가시다고 하더라도 드래곤보다 강할까.”

“…하긴, 우문이었네요. 드래곤 슬레이어에게.”

“알면 잘 막아봐. 성벽이 무너져도 나는 모른다.”

타닷-!

그 말을 끝으로 이진한은 자리를 박차며 몸을 날렸다.

허공을 질주하는 그 기세가 제법 매서웠지만, 아이돈과의 거리가 꽤 남아 있다. 이대로라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추락하게 될 상황.

하지만 이진한은 제 로브를 펄럭이며 나지막하게 외쳤다.

“[이카루스의 날개].”

검은 깃털이 휘날린다. 로브에 붙은 비행 스킬인 이카루스의 날개가 활성화된 것이었다. 그의 등 뒤로 한 쌍의 검은 날개가 펄럭이며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가로질렀다.

전투 중 한정으로 아주 짧은 시각밖에 쓰지 못하는 스킬이었지만, 아이돈과의 거리를 격하고 남기엔 충분한 간격이었다.

우웅-.

다시금 상서로운 빛이 피어오른 듀란달이 어둠을 베어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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