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0.
“맨입으로?”
“…예? 예?”
생각지 못한 이진한의 반응에 소르뎀이 당황하며 반문했다.
주위에 지켜보는 눈이 많았다. 더욱이, 상황이 이러한데 당연히 알겠다는 대답이 나와야 정상이 아닌가.
왕실에서 지원을 보내긴 했지만, 텔레포트 게이트가 전부 파괴된 지금은 서두른다고 하여도 족히 반나절은 걸릴 터.
자신이 나서지 않는다면 정말로 그리 멀지 않아 성벽이 무너질 판국이라는 것을 모르진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저런 태연한 모습이라니.
“하, 하하.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드려야지요. 그렇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일단…….”
소르뎀은 애써 말을 돌렸다.
하지만 이진한은 피식 웃음을 흘리곤, 이내 손을 뻗어 무릎을 꿇고 있던 그의 멱살을 잡아 자리에서 일으켰다.
“난, 모험가이자 용병이다. 대가 없이 움직이지는 않아.”
“그, 그건…….”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지만 이진한의 눈빛은 반론을 받지 않겠다는 듯 확고하기 짝이 없었다.
“…200만 골드, 길드의 이름으로 선언하겠습니다.”
“어디서 날로 먹으려고. 2천만.”
“저, 저희는 왕국 변방의 길드 지부라 예산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리 큰 금액은!”
“1천 700만.”
“…600만, 600만이 최대치입니다.”
이진한은 그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간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그리 절박해보이진 않았다.
“그럼 말던가.”
그가 어깨를 으쓱인 순간, 한 무리의 오우거가 제 몸을 던져 성벽을 들이박았다.
쿵-.
성벽 위가 잠시 들썩일 정도로 둔중한 충격.
약해진 부분으로는 실금이 퍼졌고, 이미 한 차례 성벽이 무너진 것을 봤던 병사들은 재차 달려들려 하는 오우거 무리를 두려운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일선을 지휘하던 기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뭐든 해! 화살을 쏘든 돌을 던지든 뭐든 해라!”
지금 상황에서 또다시 성벽이 무너진다면 걷잡을 수 없는 참사가 벌어질 터였다.
“천만!”
입술을 깨물던 소르뎀이 질끈 눈을 감고 소리쳤다.
더는 앞뒤 잴 때가 아니다. 눈앞에 있는 이 빌어먹을 남자는 자신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대답이 나올 때까지 정말로 방관만 할듯싶었다.
“…뭐, 썩 만족스럽진 않은데 그 정도라면.”
이진한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이천만 골드라는 거금을 전부 받아낼 생각은 없었다. 예상한 절충안은 800만 정도였지만, 소르뎀의 태도로 보아 1천만까지 가능할 것 같아 조금 더 기다린 것이었다.
‘업데이트 전까지 만원당 10만 골드였으니까 퀘스트 한 번으로 백만 원인가.’
업데이트 이후 시세에 변동이 있을 터지만, 그리 급격하게 낙폭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희희낙락하는 표정을 지었을 찰나, 아직도 활성화되지 않는 로그아웃 항목이 눈에 들어왔다.
“쯧.”
【76:10:35】
시간의 유예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눈앞의 몬스터 대군을 몰아내고 마르바스 교단이란 녀석들을 찾기엔 충분할 시간일 터.
그렇기에 고개를 들어 그 잠깐 사이에 몇 년은 더 늙은 듯한 소르뎀을 바라보았다.
“계약이 먼저다.”
“…아쉽지만, 가지고 온 것이 없습니다. 상황이 급박하니 의뢰의 선이행 먼저 안 되겠습니까?”
이진한은 고개를 비스듬하게 꺾었다.
월드는 자신들을 꿈과 희망이 넘치는 모험 활극이라 했지만, 실상은 그것처럼 녹록지 않았다.
눈 감으면 코가 아니라 목을 베어갈 정도로 배신이 난무하는 곳, 이진한 역시 과거에 몇 번이나 당하지 않았는가.
NPC든 누구든, 구두 약속 따위를 믿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필시 이런저런 이유를 핑계로 계약금 일부를 떼먹으려 할 터.
“급한 김에 마나의 맹약으로 처리하지. 내 마지막 배려다.”
“저는 마법사가 아니라서 마나의 맹약을 할 수 없…….”
난처한 얼굴로 말하던 이내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소르뎀은 고개를 돌려 일레이나를 바라보았다.
마나의 맹약은 마법사가 자신의 존재를 걸고 맺는 거래 방식이었다.
맹약을 어길 시 정말로 죽는 건 아니지만, 본인이 가진 마나를 잃게 되니 마법사에게 있어선 그야말로 죽는 것보다 더 한 일이었으니.
“…뭐? 싫어. 절대 안 해.”
자신에게로 향하는 시선을 느낀 일레이나는 당연히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일레이나. 대국적인 결단을 내릴 때다. 부지부장으로서의 모습을 보여라.”
“임시직이잖아! 다, 당신도 신용이 떨어지는 대상과는 거래는 하기 싫잖아요. 그러니까 차라리 빨리 사람을 보내 계약서를 가져오게 한다면…….”
“이터널 학파의 애머시스트라면 충분하고도 남지.”
이진한은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마나의 맹약은 별다른 의식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거래자 두 명이 손을 맞잡고 동의하면 그것으로 끝인바. 일레이나는 절대 하지 않겠다는 듯 빼액 소리를 질렀지만, 상황은 그들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콰아앙-!
성벽의 하단 부분이 광음을 내며 터져 나갔다.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으나, 이런 충격이 몇 번이고 가해진다면 머지않아 제 기능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일레이나님! 부디 결단을!”
“일레이나님!”
주위에 있던 병사와 모험가들 모두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
일레이나는 주저앉은 상태에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싫은 표정이 역력했지만,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그녀 역시 지금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그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빌어먹을.”
결국 일레이나는 이진한의 손을 잡았다.
“도시를 지켜주는 대가로 천만 골드. 만일 배상하지 못할 시 그에 준하는 가치를 지닌 것으로 받아 가지.”
“이 녀석들이나 확실히 정리해줘요.”
우웅-.
옅은 빛이 맞잡은 손 위로 어렸다.
[마나의 맹약이 성사되었습니다.]
시스템의 메시지에 이진한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일레이나를 일으켜 세워 그녀의 손에 포션 한 병을 쥐어주었다.
“…나도 싸우라고요?”
“그러면 나 혼자 이 전부를 상대하라고?”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자 일레이나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계약은 이미 성사된바. 그녀는 울며 겨자 먹기로 포션을 들이켰고, 빈 병을 들어 성벽을 타고 올라오던 오크의 머리를 향해 신경질 적인 모습으로 내던졌다.
“…잔인하시네요.”
“동감.”
이때까지 그 뒤에서 잠자코 있던 미르엘이 쓴웃음을 지으며 슬쩍 말해오자, 엘레오노라가 그것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때. 좋은 게 좋은 거지.”
이진한은 시원한 얼굴로 미소 짓곤 고개를 돌려 소르뎀을 바라보았다.
“외부에서의 지원은?”
“…게이트가 박살났고 통신 회선이 전부 끊겼습니다. 저쪽도 이곳의 일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요. 지원이 오려면 최소 한나절은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나절이라.”
소르뎀의 말에 이진한은 성벽을 짚으며 밖을 바라보았다.
말이 좋아야 한나절이지 설사 지원이 온다고 하여도 이 정도 규모의 몬스터를 눈앞에 둔다면 말머리를 돌릴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마법사들의 공세로 성벽에 몸을 던지던 대형 몬스터 무리는 잠시간 뒤로 물러난 상태.
허나 저 흉흉한 눈빛들을 보니 조금이라도 저항이 잠잠해진다면 다시 달려들 것이리라.
그는 팔을 걷고 성벽 위에 발을 걸쳤다. 그러곤 뒤쪽에 있는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을 바라보며 턱끝으로 소르뎀을 가리켰다.
“너희는 안전한 곳에 숨어 있어. 대충 저 아저씨를 따라다니면 될 것 같은데.”
“도와드리지 않아도 되겠어요?”
“이터널 학파의 애머시스트 되시는 분이 계시니 알아서 하시겠지.”
“…….”
잠시 자리에 앉아 눈을 감은 채 포션으로 얻은 마나를 받아들이고 있던 일레이나의 이마 위로 시퍼런 힘줄이 툭 튀어 올랐다.
하지만 이진한은 어쩌라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고, 가볍게 하늘 위로 손을 들어 올렸다.
“일단은 가볍게 한 발.”
우웅-.
이때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마나가 성벽 위로 휘몰아쳤다.
찬란한 빛이 그를 중심으로 집약되었고, 이내 하나의 현상을 만들어냈다.
마도사 클래스 상위 마법
「유성의 진혼곡」
수십 개의 마법진 아래로 시뻘건 화마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일레이나가 사용한 마법 같은 것이었지만, 그 위력만은 천지 차이였으니. 단숨에 수백, 수천에 달하는 몬스터가 불길에 휩싸여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와.”
성벽 위에서 그것을 바라보던 병사 중 한 명이 탄성을 내뱉었다. 다른 이들 역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 눈앞에 일어난 현상에 할 말을 잊은 듯했다.
“진심을 내시면 더 대단하신데 말이죠.”
“맞습니다.”
엘레오노라는 그것이 마치 제가 한 일이라도 되는 듯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미르엘과 작게 속삭인바.
그녀들과 멀지 않은 곳에 우두커니 있던 일레이나는 어렵지 않게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이것보다 더 대단하다고?’
순간 일레이나는 베르너가 드래곤 슬레이어였다는 것을 떠올렸다.
이터널 학파의 최강자인 마탑주가 온다면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단 한 번의 마법으로 몬스터 대군을 휩쓸 수는 있으리라.
하지만 그조차 단신으로 드래곤과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니.
“솟아올라라.”
이진한의 손짓에 따라 성벽 주위로 거대한 토벽이 솟아올랐다.
떨어져 내리는 화마에서 목숨을 부지한 몬스터들이 그 위로 다시금 몸을 날렸지만, 흔들리던 성벽과 달리 흙벽은 견고하기 짝이 없었다.
“…….”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저 너머의 아랄 산맥을 바라보았다.
그 주위에 펼쳐진 결계 때문에 안쪽까지 들여다볼 수는 없었으나, 이 정도 규모의 마법을 행사했으니 당연히 교단 쪽에서 나서리라 생각했다.
‘하다못해 토벽 쪽은 없애려고 할 줄 알았는데.’
유성의 진혼곡과 달리 흙벽 쪽은 현상을 개변시켜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마법으로 디스펠하려 하면 충분히 치워버릴 수 있을 터.
하지만 산맥 너머는 잠잠했고, 몬스터 대군은 이때까지와 다름없이 맹목적으로 이쪽을 향해 달려올 뿐이었다.
“드래곤 슬레이어께서 벌어주신 틈을 타서 정비하라!”
“부상자 먼저 호송해!”
“정비병! 성벽의 수리를 서둘러라!”
“화살! 화살 보급부터 해줘!”
전장에 잠시 공백이 생긴 틈을 타 성벽 위는 태세를 정비하는 것에 집중했다.
부상자들은 들것으로 실려 나갔고, 망치와 돌덩이를 든 이들이 부서진 성벽의 틈 사이를 메꾸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으으…….”
병사 대부분은 성벽 끄트머리에 기대앉아 짤막한 휴식을 누렸다.
전쟁이 일어난 지 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그들의 얼굴은 몇 날 며칠을 밤새워 싸운 사람마냥 피로에 절어 있었다.
‘이건, 오래 버티지 못하겠는데.’
지원 부대가 온다고 하더라도 어지간한 규모가 아니라면 성 앞의 녀석들을 뚫기도 힘들 터다.
아마 당분간은 외부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우리라.
“골치 아프네.”
이진한은 머리를 긁었다.
남은 것은 사흘 남짓한 시간.
여차하면 단신으로 이 무리를 돌파해 교단과 결착을 내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