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9.
성벽에 가까워질 때마다 은은하게 울리는 진동과 거슬리는 소음에 입체감이 더해진다. 저 너머의 열기가 스멀스멀 느껴지기 시작하자 이진한은 목과 어깨를 돌리며 제 몸을 풀었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적은 근원의 마탑에서 엘레오노라의 뒤를 쫓아왔던 망령이었고, 두 번째 에피소드의 적은 마경의 도시, 벨데르를 침공한 블랙 드래곤 벨라시온이었다.
두 에피소드 모두 개인 전투로 이루어졌다.
벨라시온과의 싸움은 규모가 컸지만, 어찌 되었든 개인 대 개인의 싸움.
하지만 월드의 진가는 전쟁에 있었다.
수천, 수만의 대군이 평야를 가로지르며 서로가 딛고 선 땅을 점령하기 위해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이는 전장은 수많은 플레이어를 전율케 하는 것이었으니.
이진한 역시 전쟁 관련 컨텐츠를 선호했다.
특히 수성(守城) 전투는 빼놓을 수 없는 재미를 지니고 있는바. 공성(攻城) 전투의 재미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그의 취향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을 따름이었다.
“서둘러-!”
소르뎀은 성벽에 도착하자마자 일레이나를 데리고 무너진 남쪽 구역을 향해 달려갔다.
이진한 역시 그 뒤를 따라 성벽에 올랐고, 이내 눈앞에 펼쳐진 광대한 풍경에 두 눈을 크게 떴다.
후욱-!
동시에 형용할 수 없는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진득한 피, 찌들은 기름, 그리고 온갖 군상이 몰려든 가운데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악취까지.
“….”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한 감각에 손끝이 떨려왔다.
한껏 날뛸 기분에 가벼웠던 발걸음은 비틀거렸고, 이내 성벽 끄트머리를 붙잡은 채 그 위에 섰다.
그가 선 곳은 몬스터의 습격을 직접 막아내고 있는 외성과 조금 거리가 떨어진 내성으로, 병사의 이동과 물자의 보급을 위해 만들어진 길이자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바로 아래쪽의 외성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전투가 눈에 훤히 들어왔다.
몬스터 군단이 들이닥친 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거칠게 숨을 내쉬며 악에 받친 표정으로 그 위에 서 있던 병사 한 명이 보였다.
그는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오르는 오크들을 향해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베어내는 것보다 더 많은 물량이 물밀듯 밀려 들어왔고, 그 용맹함도 이내 한계를 맞이했다.
제일 먼저 얼굴이 반쯤 갈라진 오크가 찌른 조잡한 창날에 어깨를 꿰뚫렸고, 그 동족의 시신을 밟고 올라온 녀석의 도끼에 가슴이 쩍 갈라졌다.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오크는 병사의 몸에서 흘러내린 내장을 짓밟으며 다음 사냥감을 물색했고, 이내 죽고 죽이는 장면이 반복되었을 뿐이었다.
성벽을 붙잡은 이진한의 손이 새하얗게 될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이전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요소였다.
일반 병사가 얼마나 죽든, NPC이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플레이어의 숫자였으니, 그쪽에만 주의를 기울였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째서인지 속이 울렁거리며 금방이라도 구역질을 할 것같이 역겨운 감각이 치밀어 올랐다.
‘…이게 진짜 게임이라고?’
애써 시선을 돌렸던 의문이 다시금 마음속 한가운데서 떠올랐다.
찰나 동안 수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숫자의 몬스터가 짓이겨지며 숨을 거두었다.
전장에 선 이 중 한 명 한 명 살아있지 않은 자가 없었으며, 모두 각자의 간절함을 지닌 채 처절한 모습으로 싸워나갔다.
피부 위로 생생히 느껴지는 그 감정의 편린들에 이진한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베르너님, 괜찮으세요? 얼굴이 창백하신데.”
어느덧 옆으로 다가온 엘레오노라가 걱정하는 표정으로 이진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뒤쪽에 선 미르엘은 그들을 호위하고 있는바.
제 검의 손잡이 위에 손을 올려놓은 채 언제라도 그것을 뽑아 들 수 있도록 날카롭게 감각을 벼린 상태였다.
“…별일 아니야. 옛날 생각이 나서 그래.”
이진한은 가까스로 그렇게 둘러댈 수 있었다.
다행히 그에겐 고대 영웅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이 있는바.
엘레오노라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옛날 생각이 났다는 말에 그럴 수도 있겠다며 고개를 끄덕였을 따름이었다.
“그나저나 직접 눈으로 보니 더 굉장하네요. 제국에 있을 때도 이만한 규모의 몬스터 군단은 본 적이 없었어요.”
동요하는 이진한과 달리 엘레오노라는 전장에 익숙한 것인지 비교적 태연한 모습이었다.
“…확실히.”
몇 번의 심호흡을 끝으로 겨우 평정을 되찾은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1부 에피소드 때에도 몬스터와 대규모 전쟁을 벌인 적이 몇 번 있었지만, 이 정도로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피잉-!
그때, 하늘로 한 줄기 불꽃이 쏘아졌다.
그것이 무슨 신호였는지 바로 직후 형형색색의 마법이 성벽 위에서 터져 나와 성벽 앞에 펼쳐진 평야를 향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무차별적인 폭격이었다.
평야 위로 빼곡했던 몬스터 군단 위로 한동안 공백이 생길 정도로 큰 타격이 전장을 휩쓸었고, 그사이 병사들은 무너진 남문의 성벽 안으로 들어온 몬스터를 몰아낸 뒤 임시로 구조물을 세워 그 공백을 채웠다.
“…하지만 몬스터가 너무 많군요.”
미르엘은 살짝 찌푸린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확실히 줄줄이 이어지던 육탄공세가 잠시간 끊기자 전황의 흐름이 나아지긴 했지만, 말 그대로 아주 잠시간일 따름이었다.
다시금 몬스터가 꾸역꾸역 밀려들어 그 빈자리를 채웠고, 겨우 수복돼가던 성벽은 다시금 무너질 듯 위태롭게 출렁거렸다.
콰아아아앙-!
성벽 위에서 쏘아진 마법들이 재차 전장을 휩쓸었다.
하지만 그것은 첫발째보다 명백히 약화된바. 플레이어와 달리 한계가 뚜렷한 NPC들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플레이어 역시 정신력이라는 스탯이 있어 그것이 고갈되면 마법을 쓰기 힘들 정도로 어지럼증이 일었으나, 대부분 급한 상황에선 이를 악물며 버텨내는 편이었다.
‘그걸로 대회까지 있었으니.’
나중엔 자존심 싸움으로 번져 비공식적인 대회가 열렸다.
이진한은 매끄러운 테크니컬로 이루어진 연환계로 승부를 보는 편이라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수많은 이들이 그 대회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수많은 미친놈 가운데 당당히 우승을 차지한 것은 자칭 해병대 출신이라는 대마도사 클래스의 랭커였다.
같은 랭커로 아는 사이였기에 그 역시 진짜 해병대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는 한 번 해병대는 영원한 해병대라며 악기바리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며 제 가슴을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어 왔다.
나중엔 법적으로 규제 항목에 들어가 일정 수치 이상으로 피로도가 누적되면 마법사용이 애초에 불가해지는 시스템이 추가되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다들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했다.
우웅-.
그가 옛 추억의 향수에 잠겨 있을 찰나, 성벽 위로 이때까지와는 조금 다른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일레이나인가.”
마도사 급의 기운은 그 하위 클래스인 위저드 수십을 데려다 놓아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막대했다.
곧 결집된 마나가 폭발적으로 부풀어 올랐고 마법의 발현을 전장에 고했다.
“확실히 대단하네요. 이터널의 애머시스트라 불릴 법해요. …뭐, 아무리 높이 쳐줘도 베르너님과 비교할 수준은 아니지만 말이에요.”
“드래곤과의 싸움은 세상이 이대로 멸망하지 않는가 싶었으니 말이죠.”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의 말에 이진한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웅-.
곧 하늘 위로 거대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마도사 클래스 상위 마법
「유성의 진혼곡」
마치 유성이 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시뻘건 궤적이 지상에 무차별적으로 내리꽂혔다.
유성의 진혼곡은 흔히 말하는 메테오의 축소판으로, 이런 대규모 전장에서 높은 효율일 보이는 마법이었다.
평야는 지옥을 보는 듯했다.
유성에 직격당한 몬스터는 흔적도 없이 산화했고, 그 불이 옮겨 붙은 녀석들은 몸부림치며 기괴한 비명을 질러댔다.
숫자가 무식할 정도로 많다는 것을 뺀다면 무력할 정도로 너무나 손쉽게 그 공격에 당해주었으니.
‘…교단 쪽에선 나서지 않는 건가.’
조금 전의 마법을 캔슬하거나 방해하려면 충분히 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들은 방관하는 것을 택했고, 최소 몇천 단위에 이르는 몬스터가 한순간에 소멸했다.
아무래도 몬스터는 버리는 패로 이용해 힘을 빼놓고, 그 뒤를 노릴 가능성이 커 보였다.
쿵.
쿵.
쿵.
그때 전장 위로 이변이 생겨났다.
이때까지 그 위에 빼곡하게 자리한 것은 오크나 고블린 같은 하위종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라는 듯 트롤이나 오우거 같은 상위종 대형 몬스터가 수십 단위로 속속히 모습을 드러내며 성벽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으니.
쿵-!
성벽이 들썩하며 그리 좋지 않은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작은 축에 속하는 녀석이 집채만 한 것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더욱이, 그들을 아우르는 트윈헤드 오우거나 드레이크 같은 존재는 태곳적 신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거인과 비슷한 크기였다.
“…비정상적인 크기네요. 인위적으로 확대된 것이군요.”
“저들만으로 막을 수 있을까요?”
성벽은 아직 단단했다.
무너진 남쪽 구역도 수복했고, 그 위에 선 병사들 역시 많았다.
기사들은 제 검 위로 찬란한 오러를 흩뿌리며 전의를 불태웠고, 마법사들은 쉴 새 없이 포션을 마시며 마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곧 그들에게 닥칠 재앙은 불합리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것이었다.
아무리 일레이라가 영원의 대마도사의 계보를 잇는 천재 마도사라 할지라도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격차였으니.
“베-르-너-님-!”
이제 완전히 평정을 되찾은 이진한이 성벽에 기대 전쟁을 구경하고 있을 찰나, 땀투성이의 소르뎀이 미친 듯이 그에게로 달려왔다.
그 손엔 기진맥진한 일레이라가 덜렁거리며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토할 것만 같은 얼굴로 소르뎀에게 붙들려 그들 앞까지 끌려왔다.
“부디, 부디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드래곤 슬레이어께서 도와주신다면 능히 이 위기를…!”
“…드래곤 슬레이어라고?”
“벨데르에서 그 블랙 드래곤을 쓰러뜨렸다던?!”
소르뎀의 말에 그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두 눈을 크게 뜨며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당연하게도 그 옆에 있던 엘레오노라와 미르엘 역시 주목 대상이 되었다.
‘일부러 그랬군.’
아까의 대화를 통해 이쪽이 행적을 숨기고 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시선을 모으는 것을 이용해 자신들을 돕게 하려는 속셈일 터.
“수많은 이들의 목숨이 달려 있습니다! 부디, 부디…!”
그는 이진한 앞에 무릎을 꿇고는 매달고 온 일레이나의 뒤통수를 찍어 눌러 그 얼굴을 바닥에 박았다.
“읏…이런…염병할…왜…나까지…!”
일레이나는 거친 욕지거리와 함께 벗어나려 몸을 버둥거렸지만, 상위 마법을 사용한 여파인지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이진한은 그 꼴을 보곤 피식 웃었다.
그러곤 무릎 꿇은 소르뎀의 앞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고는, 그와 시선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맨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