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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8화 (18/210)

◈ 018.

“…잠시 상황을 파악하고 오겠습니다. 일레이나, 너는 여기 남아 베르너님 일행과 있도록.”

소르뎀은 그렇게 말하며 두 눈을 흉흉하게 부라렸다.

쓸데없는 말을 하면 나중에 혼낼 거라는 뜻이었으나, 곧 그가 아펠 경과 함께 자리를 떠나자 일레이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코웃음을 쳤다.

“평소엔 근엄한 척하지만, 실상은 속 빈 강정이라니까요. 조금이라도 상황이 뒤틀리면 허둥지둥 거리면서 저런 꼴이라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그 말이 통용되지 않는 흔한 유형이죠.”

“…신랄한 평가네.”

숨 쉴 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악평에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옆에 있던 엘레오노라와 미르엘 역시 순식간에 바뀌어버린 그녀의 모습에 질린 표정을 지어왔을 정도였다.

“당연하죠. 자신의 무능력을 감추려고 계속 저를 부지부장으로 머물게 하려는 것이니.”

일레이나는 사뭇 태평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몬스터 대군의 출현으로 도시 전반이 어수선한 가운데, 그녀만이 홀로 여유로운 분위기인바.

이진한은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도시 분위기가 이런데, 덤덤한 모습이군.”

“급할 이유가 있을까요?”

“정이 없네.”

그녀는 여차하면 모두 버리고 떠날 기색으로 보였다.

마도사 클래스에 있으니 어지간한 강적이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어렵지 않게 빠져나갈 수 있을 터.

지금의 여유는 그 자신감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였다.

“고향이라고 특별 취급할 생각은 없어요. 제게 중요한 것은 저 자신, 하나뿐이니까요. 마법사는 모두 이기적인 존재잖아요? 당신이나, 그녀도 마찬가지로.”

일레이나의 시선이 이진한에서 엘레오노라 쪽으로 향한다. 그러자 옆에 있던 미르엘이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무례하군요.”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하네요.”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형식적이라고도 하지 못할 성의 없는 사과였다.

그렇기에 미간을 좁힌 미르엘이 발끈하려 하자, 엘레오노라가 시선을 보내며 나지막하게 고개를 저었다.

“….”

이진한은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다리를 꼬았다.

그러곤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시선을 보내자, 일레이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할 말이 있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려왔다.

‘인공지능이 발전하긴 했네. 이쪽을 떠보려고 같잖은 도발이나 걸어오는 걸 보니.’

이전엔 없었던 대화의 양식이었다.

빅데이터니, 뭐니 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성장하는 인공지능이라 했지만, 그 한계는 명확했다.

그렇기에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큰 틀을 벗어나진 않았다.

하지만 2부 업데이트를 하면서 디테일을 더한 것인지, 진심으로 아니꼬워질 정도로 생생한 반응에 실소가 절로 나왔다.

“아까 제국 마탑의 소속이라 했지. 오스칼 제국 측인가?”

굳이 그 도발에 어울려줄 이유는 없었다.

그렇기에 가볍게 화제를 바꾸자, 일레이나는 별다른 내색 없이 말을 받았다.

“아니요. 이곳에서의 제국은 리베라를 뜻해요. 끄트머리라곤 하나 서대륙 영역권에 들어가니까요. 내친김에 다시 소개할까요? 일레이나 유클리드라 해요. 리베라 제국 소속 마탑의 마도사랍니다.”

그 말에 엘레오노라는 옅게 숨을 내쉬었다.

아까 제국 마탑의 소속이라 했을 때부터 신경 쓰였던바. 오스칼 제국 마탑의 소속이라면 자신을 알아볼 수 있었기에 가슴을 졸였다.

이진한 역시 그것을 눈치챘기에 대신해서 물어준 것이었다.

“베르너님 소개는 들었고, 옆의 두 분은?”

“…저는 엘렌, 옆은 엘이라 해요.”

엘레오노라는 제법 자연스러운 어조로 자신들의 가명을 말했다.

각각 이름의 앞과 뒤를 따서 지어낸 이름이었다.

“실례지만 일레이나님 나이가….”

“올해로 스물셋이에요.”

“…그런데 마도사의 경지라니.”

엘레오노라는 나지막하게 감탄을 표했다.

자신의 나이가 올해로 스물둘이었다.

일레이나와는 고작 한 살 차이였지만, 마법사로서 서로 간의 격차는 쉬이 메울 수 없는 수준이지 않은가.

엘레오노라 역시 혈통으로 인한 재능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또래에 비해 뛰어난 경지에 올라 있었다.

어릴 적부터 수재 소리를 들었고, 이대로 간다면 제국에 새로운 마도사가 탄생할 것이라며 자자한 칭찬을 들었다.

하지만 일레이나는 그보다 훨씬 앞서 있는 천재였으니.

스윽-.

일레이나의 손이 허공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그러자 적, 황, 흑의 색으로 이루어진 불완전한 형태의 원이 각각 나타나 각기 영역을 겹치며 하나의 문양을 이루어냈다.

눈앞에 일어나는 현상을 직시한 엘레오노라의 두 눈이 이내 잘게 떨려왔다.

“…이터널.”

“그래요. 일레이나라는 이름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 개의 원으로 이루어진 문양은 제 역할을 끝냈다는 듯 허공으로 흩어져갔다.

일레이나는 옅은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당신도 마법사라면 이터널 학파의 애머시스트(amethyst)란 이름은 들어보셨겠죠.”

“…애머시스트?”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어온 이진한의 모습에 일레이나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SS랭크 모험가에게도 제 존재가 알려져 있다니, 제법 자랑스럽네요.”

“…확실히. 들어본 적 있어요. 이터널의 애머시스트. 이터널 학파의 최연소 마도사로, 영원의 대마도사님 연구에 가장 근접했다는 세기의 천재….”

이진한은 그 익숙한 이름을 곱씹었다.

이터널(eternal), 영원의 마도사라 불렸던 옛 동료에게서부터 파생된 학파로 보였다.

“애머시스트, 자수정입니까. 확실히 당신에게 어울리는 이름이군요.”

미르엘은 그녀의 자주색 머리카락을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수정을 뜻하는 거였나. 그럴듯하게 적당히 가져다 붙였군.’

확실히 일레이나의 머리카락의 색은 자수정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아마 그런 요소에서 착안되어 지어진 이름일 터.

“…뭐. 이야기를 되돌리자면, 밖의 일은 그리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예년 있는 일이고 머지않아 정리될….”

쿠웅-.

일레이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묵직한 진동이 발밑에서 느껴졌다.

텔레포트 게이트가 파괴될 때처럼 요란한 소리가 나지도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지도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의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본능적인 위기감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어.”

일레이나는 엉거주춤한 태도로 고개를 들며 마법을 사용했다.

멀리 내다 볼 수 있는 원시(遠視)의 마법이었다.

동시에 엘레오노라도 그것을 따라 했고, 이진한 역시 대현자의 눈을 활성화했다.

“…성벽이 무너졌어?”

“게다가 이 숫자는….”

곧 상황을 파악한 일레이나와 엘레오노라가 크게 뜬 눈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렇다곤 해도 아직 혼자 도망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지닌 것인지 다급한 기색은 없다.

그 착각을 비웃듯 이진한은 실소를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성가신 놈들이 붙은 것 같네.”

“몬스터 군단을 움직이는 배후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미르엘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고약한 놈들이야. 몬스터로 도시를 둘러싼 것도 모자라서 이 구역에 결계를 깔아놓았어. 이래선 독 안에 든 쥐로군.”

“…그런.”

일레이나는 그 이름처럼 실력이 뛰어난 마도사였다.

그렇기에 곧 이진한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대체 어떤 놈들인가요?”

“난들 알겠나.”

이진한은 어깨를 으쓱이며 시야 한 편에 떠올라 있는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메인 퀘스트」 ─ ∑이단심문관

◈ 미들턴에 닥쳐온 몬스터 대군을 막아내고, 마르바스 교단의 음모를 저지해 영원의 결정 조각을 수집하시오.

보상: ‘99시간의 유예’, ‘영원의 결정 조각’.

마르바스 교단.

생소한 이름이었지만, 대충 상황을 보아 흑마법사 부류인 것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결계 규모로 보아 최소한 초월지경이나, 그에 가까운 강자가 섞여 있겠지. 그렇다 한들 혼자서 이 정도로 일을 벌일 수 없을 테니 세력의 숫자도 만만치 않겠네.’

이진한이 그렇게 결론을 내렸을 때, 일레이나 역시 입술을 씹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듯 사뭇 초조해진 표정이었다.

우당탕탕-!

잠시간 장내로 내려앉은 적막을 깨고, 소르뎀이 거의 넘어지듯 문을 박차며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 일레이나! 성벽이 무너졌다! 화력이 부족하다니 마도사인 네가 나선다면…!”

일레이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더니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요.”

“베르너 님은….”

소르뎀이 기대를 담은 시선으로 자신들을 바라봐오자, 이진한은 느긋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동행하지. 상황은 파악해야 하니.”

“감사합니다!”

그들은 곧 길드를 나섰다.

그 앞엔 이미 인원수에 딱 맞는 마리의 말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것을 보고 피식 웃은 이진한은 그대로 말에 올라타, 앞서 달려 나가기 시작한 소르뎀의 뒤를 쫓았다.

“…도와주실 생각이신가요?”

슬쩍 말을 몰아 옆으로 붙은 엘레오노라가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아직 모르겠는데.”

“베르너님의 능력이시라면 어렵지 않게 몬스터 군단을 물리치고 뒤에 도사리는 이들까지 몰아낼 수 있겠죠?”

“무….”

이진한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대현자 클래스에 속한 모든 하위 클래스가 초월지경에 이른다면 어렵지 않았을 터.

하지만 아직 대마도사밖에 도달하지 못한 상황에선 아무리 그라 할지라도 이 정도 규모를 혼자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론 가능하지. 그래서 너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지?”

하지만 이리 기대감이 가득 찬 눈이 향한 상태에서 사실대로 대답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그렇기에 어깨를 으쓱이며 가벼운 일인 것처럼 말하자 엘레오노라는 살짝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이기적인 소리로 들리겠지만, 당장은 적극적으로 나서고 싶지 않아요. 이쪽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여력을 남겨두고 싶으니.”

“그런가.”

“그래도….”

그녀는 잠시간 입을 벙긋거렸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결론을 내렸는지 선명한 의지가 서린 눈으로 말을 이었다.

“여유가 된다면 도와주고 싶어요.”

“말의 앞뒤가 다른데.”

“…두서가 너무 없었나요. 하여튼 그래요. 뭐, 결정은 베르너님이 내리시는 거니까요. 저는, 저희는 그것을 따를게요.”

엘레오노라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진한 역시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제법 나쁘지 않은 대답을 들었다.

방금의 대화를 통해 ‘엘레오노라’라고 하는 NPC의 성향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말을 몰아 뒤쪽으로 물러났지만, 그 목소리의 잔향만은 귓가에 선명했다.

이진한은 땅을 박차고 달려가는 말의 위에서 가늘어진 눈으로 먼저 나아가는 소르뎀과 일레이나의 등을 응시했다.

‘정석대로, 위기에 몰렸을 때 나선다.’

사실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시간의 유예라는 절대적인 요소가 있는 이상, 퀘스트를 받아들이는 선택지 말고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섣불리 먼저 나서서 도움을 줬다간 그 공적의 빛이 바랠 수도 있었다.

영웅 서사의 정석대로 에피소드 절정 부분의 끄트머리에서 구세주처럼 나타난다면 제법 밀도 있는 주목을 받을 수 있을 터.

확실한 효율을 뽑아내는, 고인물의 동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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