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7.
조금 전 자신들이 지나온 텔레포트 게이트를 비롯해 다른 한 곳의 게이트 역시 폭파되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니, 분명 조직적으로 농간을 부린 것이 분명했다.
‘이만한 숫자의 몬스터를 움직이고, 굳이 번거롭게 텔레포트 게이트를 부숴 발을 막아버리는 수를 쓰는 건….’
두 가지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을 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드래곤과 마왕 정도였다.
물론 그런 존재들이 직접 나섰다고 보기엔 너무 잡스러운 일이었으니 그 휘하에 소속된 녀석들이 벌인 일일 터.
어찌 되었든 쉽게만 생각할 상황은 아니었다.
도시가 다시 한번 부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성벽으로 향하던 병력 중 일부가 방향을 돌렸고, 텔레포트 게이트로 향해 화재를 진압해나갔다.
하지만 게이트는 이미 원형을 잃어버린바. 수복할 가능성은 일말의 여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틀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차를 운용할 순 없다고 하네요.”
이진한이 대현자의 눈으로 도시를 살피던 사이, 황급히 밖으로 나갔던 미르엘이 낭패가 서린 얼굴로 되돌아왔다.
“말을 타고 우리만 빠져나가는 건?”
“산맥에서 내려온 몬스터 무리가 저쪽으로 넘어가는 길을 막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베르너 님께서 계시니 강행하려면 할 수는 있을 것 같지만….”
미르엘의 말에 엘레오노라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흠.”
어지간한 몬스터라면 어렵지 않게 쓸어버리며 나아갈 수 있을 터지만, 길을 막고 있는 숫자가 적지 않았다.
이 정도면 고위 마법을 몇 발이고 때려 박아야 그 앞이 열릴 터. 하지만 필연적으로 소란이 일어나 이쪽의 존재가 특정되고 말 것이다.
‘더군다나 퀘스트까지 뜬 이상.’
【78:37:21】
시간의 유예가 모두 소모되어 풍파가 찾아온다면, 그 자신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근원의 마탑에서 손발 끝이 가루가 되어 부서지면서 쓰러지던 때의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따로 대체할 방도를 찾지 못했으니 이번에도 아마 그렇게 될 가능성이 유력할 터.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황에 손바닥으로 식은땀만 흘러내렸다.
“저는 베르너님의 선택에 따를게요.”
“저도 따르겠습니다.”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말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던 이진한은 그런 그들의 모습에 짧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려 할 찰나, 등 뒤에서 낯선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 나가지 않은 모험가가 있었군.”
슬쩍 고개를 돌려 안쪽을 바라보니 오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렇다 할 특별한 요소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 길드의 마스터 정도로 보였고, 딱 분위기에 걸맞은 실력을 지닌 것으로 파악되었다.
“….”
오히려 눈에 띄는 건 그 뒤를 따라오던 동행이었다.
여성은 불이 붙지 않은 시가렛의 필터를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단지 남자의 뒤를 따라올 뿐 눈앞의 일에는 관심이 없다는 표정이다.
“호오?”
하지만 이내 호기심 어린 의문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짙은 보랏빛 머리카락이 그 움직임을 따라 흔들리며 삐죽 모습을 드러냈다.
퇴폐적인 미가 돋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살짝 짙은 다크서클을 품은 시선으로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을 탐색하듯 훑는다. 나른한 기색이 가득한 눈동자였지만, 이진한은 그 안에 서린 마력의 양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복장 역시 과감하기 짝이 없었다.
손에 든 스태프는 마법사라는 걸 알려주었으나, 옆이 활짝 트인 로브의 안쪽으로는 육감적인 몸매의 굴곡이 어렴풋하게 비췄다.
“이런 촌구석치고는 실력이 제법인 것 같은데….”
여성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던 두 여성을 보곤 옅은 미소를 품으며 걸어오다가, 이내 이진한을 발견하곤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사, 사람 맞아?”
“초면에 무례하시네요.”
엘레오노라가 인상을 찌푸리며 답하자, 그녀는 당황한 기색으로 손을 흔들며 황급히 말을 이었다.
“아니, 이건 말이지. …어지럽네. 아니, 그래도 어떻게 사람이 이런….”
옆에 있던 남자는 그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더니 여성을 슬쩍 밀어내곤 그들 앞으로 한 발짝 다가왔다.
“모험가 조항에 따라 모든 모험가는 유사시에 해당 영지에 징집되어 고용된다. 지금 역시 유사시에 해당하는 때인데, 혹시 전투에 나서지 못하는 무슨 사정이 있는가?”
“이 둘은 모험가가 아니다.”
“그럼 자넨?”
이진한은 대답할 것 없이 제 용병패를 던졌다.
남자는 의아한 얼굴로 그것을 잡아채더니, 이내 크게 뜬 눈으로 용병패를 바라보았다.
“…SS랭크?”
“SS랭크는 그런 제약에서 자유로울 텐데. 문제라도 있나?”
“문제…랄 것보다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인…!”
이진한을 보던 남자는 돌연 말을 멈췄다.
무언가를 알아차렸다는 듯 냉정을 되찾더니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곤 다시 입을 열었다.
“장소를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는 아직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여성의 머리를 손날로 후려갈기더니, 이내 그들을 위쪽으로 안내했다.
미들턴 웨스트 길드의 지부장실.
곧 이진한을 비롯한 그녀들이 자리에 앉자 직원이 차를 내왔다.
그들이 그것을 마시며 잠시 숨을 돌릴 찰나, 한참을 뜸 들이고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명성이 자자한 드래곤 슬레이어를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직 벨데르쪽에 계신다고 들었는데, 설마 지금 이곳에 와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SS랭크 모험가인 것보다 드래곤 슬레이어 쪽의 위명이 더 높은 것인지 남자는 뺨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진짜로 드래곤을 쓰러뜨렸어요?”
“입 닫고 있거라.”
그는 실없는 표정으로 옆에서 입을 연 여성의 말을 단호하게 잘라냈다.
“가능하면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이야기는 숨겨줬으면 좋겠군. 사정상 행적을 숨겨야 해서 말이야.”
“당연히 협조해드려야지요. 저희는 모험가 조합에 묶여 있어 외부의 일을 함부로 발설하지 못하는 데다, 현재 드래곤 슬레이어의 거취에 관한 정보 역시 특급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조금 전까지 이곳에 계신 줄도 몰랐으니까요.”
“그런가.”
“아,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미들턴 지부의 지부장을 맡은 소르뎀이라 합니다. 여기 이쪽은 부지부장인 일레이나라 하지요.”
“임시직이지만 말이죠.”
일레이나가 옆에서 툭 하고 끼어들었다.
그러자 소르뎀은 와락 얼굴을 구겼고, 이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자. 손님들 앞에서 괜한 추태를 보이지 말고.”
“그러면 확정시킬 거잖아요. 하도 삼촌이 해보라고 성화를 부려서 잠깐 해본다고 한 거지 오래 할 마음은 없어요.”
“…하하, 죄송합니다. 제 조카인데, 제국 마탑에서 활동하다가 쉬고 싶다고 고향으로 내려오는 바람에….”
“뭐, 정확히는 멍청한 윗대가리들이랑 치고받으면서 싸우다가 잘렸어요. 빌어먹을, 잘리기 전에 먼저 박차고 나왔어야 하는 건데.”
“일레이나.”
소르뎀은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 서슬 퍼런 표정에 일레이나는 입술을 삐쭉 내밀더니 이내 쥐 죽은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하하, 하여튼 밖의 소란도 금방 정리될 겁니다. 다들 요란을 떨지만, 예년 있는 연례행사 같은 일이니 말이지요. 올해는 시기가 조금 이른 것 같긴 한데, 곧 끝날 겁니다.”
소르뎀은 가벼운 태도로 그렇게 말해오자, 오히려 이야기를 듣던 이진한이 의아해질 정도였다.
몬스터 군단은 산맥 끝에서부터 성벽까지 까마득하게 이어질 정도의 규모였다.
거기에 텔레포트 게이트도 파괴되어 진퇴양난이 되어버린 상황. 빈번하게 있는 일이라고 보기엔 스케일이 심상치 않았다.
“혹시 모르는가?”
“무엇을 말입니까?”
이진한이 입을 열어 대답할 찰나, 누군가 쿵쿵거리며 이쪽으로 달려오는 다급한 뜀박질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그것은 이내 문 앞까지 당도했고, 바로 그 직후 지부장실의 문이 떨어져 나갈 듯 거칠게 열렸다.
“이 무슨 무례한…!”
소르뎀은 두 눈에 쌍심지를 켜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무려 드래곤 슬레이어를 접견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그런 가운데 도대체 누가 이런 소란을 일으킨단 말인가.
괘씸한 마음에 불호령을 내뱉으려 했지만, 곧 불청객의 얼굴을 보곤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펠 경?”
아펠이라 불린 기사는 거칠게 숨을 헐떡거리며 호흡을 가다듬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번쩍 들고 다급한 목소리로 말해왔다.
“비상, 비상 연락망. 모험가 길드의 비상 연락망이 가동되는가!!”
“…비상 연락망 말입니까.”
그 모습이 워낙 다급해 보였기에 소르뎀은 다른 것을 묻지 않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제 책상 위로 다가가 한쪽 구석에 놓여 있던 수정구를 건드렸다.
“…?”
하지만 이상한 것이 충분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 인상을 쓴 소르뎀이 방안에 내려앉은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이게 왜 이러지? 고장이 난 건 아닌데.”
“…젠장!”
아펠 경은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며 분노를 토해냈다.
“텔레포트 게이트가 파괴되고 다른 도시와 연락할 수 있는 모든 회선이 끊겼네! 밀려드는 몬스터는 어림잡아 이십만 이상이야! 잘못하다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전부 죽게 생겼어!”
데구루루, 툭.
그 말에 소르뎀은 들고 있던 구슬을 떨어뜨렸다.
“모르고 있었군.”
그 경직된 모습에 이진한은 어깨를 한 번 으쓱여주었다.
어쩐지 너무 태평하더라.
***
미들턴과 아랄 산맥의 경계.
시커먼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이들이 수백 명은 더 넘게 모여 있다. 하나 같이 흉흉한 기운을 품고 있는 것이 좋은 의도를 가지고 이 자리에 선 것이 분명했다.
“드디어 계시의 날이 도래했으니.”
그 가운데 독보적인 존재감을 발하는 인영이 있었다.
창백한 피부에 옅은 잿빛 머리카락을 지닌 초췌한 얼굴의 남자는 유달리 선명한 눈빛으로 제 손에 든 스태프를 치켜세웠다.
“모두 고개를 들라! 그간 핍박받고 배척받았던 고난은 끝이다! 우리는 이곳 미들턴을 시작으로 온 대륙을 피로 얼룩지게 할 것이다!”
“와아아아아-!”
남자의 이름은 아이돈.
마계의 72 마왕 중 마르바스와 계약을 맺은 흑마법사로, 그 교단의 세 교주 중 한 명이었다.
웅웅웅-.
그들의 외침에 화답하듯 아이돈이 든 스태프 끝에 박혀 있는 보석이 요사스러운 빛을 발하며 그 주변을 뒤덮었다.
그러자 곧 아랄 산맥에서부터 수많은 기운이 요동치며 그 존재를 드러내었으니, 그 웅장한 위용에 흑마법사들이 더욱 크게 환호를 내지르며 기세를 드높였다.
“가라-! 짓밟고, 유린해라! 그것이 우리의 주인께서 바라는 일이니-!”
두 팔을 활짝 벌린 아이돈의 움직임에 따라 수많은 몬스터의 대군이 미들턴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