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6.
머지않아 모험가 길드를 찾을 수 있었다.
단 한 가지 예상외였던 점이라면, 모험가 길드의 규모가 예상보다 컸다는 점이었다.
“벨데르랑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것 같은데.”
모험가 길드는 보통 거주 도시에 따라 그 규모가 달라졌다.
이곳 미들턴은 벨데르와 비교하자면 작은 도시에 속했지만, 길드의 규모와 모험가의 숫자는 제법 견줄만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마경이 멀지 않고, 몬스터 산맥도 붙어 있으니까요. 미들턴의 모험가 길드는 이곳만이 아니라 네 곳은 더 있을 걸요?”
“수준은 한참 낮지만 말이지.”
규모만 그럴 뿐, 서로 간의 수준 차이는 감히 비교할 수 없었다.
애초에 마경 한가운데 있는 도시인 벨데르는 이레귤러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곳에 있는 모험가들의 실력이 업계의 평균이라는 것일 터.
‘시중에 떠돌던 용병단보단 약해 보이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돌발성 이벤트로 또 언제 어디서 기라성 같은 고레벨 네임드 NPC가 등장할지 모르니까.
“그러면 저는 마차 편을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안쪽에서 기다릴게. 겸사겸사 정보도 수집하면서.”
미르엘과 엘레오노라는 익숙한 태도로 역할을 나눴다.
이진한은 엘레오노라 쪽을 따라 모험가 길드 안으로 들어왔고, 이내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모험가들은 새로이 길드에 들어온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그저 자기들끼리 떠들며 치고받기를 계속했다.
“….”
그가 간단한 마실 거리를 사 왔을 때, 엘레오노라는 은밀히 마법을 발동시킨 상태였다.
소리를 결집하는 종류의 계통으로, 모험가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그 내용을 엿들으려 하는 목적으로 보였다.
“…그다지 특이점은 없어 보이네요.”
“그런가 보군.”
이진한은 마법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모험가들이 하는 말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전부 보이는 그대로 거친 말만 일삼으며, 어떻게든 몬스터를 많이 잡아 한탕 벌 생각만 하고 있었다.
“미들턴 영지가 자리한 페르포치아 왕국부터 리베라 제국까지는 한 달이 조금 더 걸려요. …중간에 별일이 없다는 가정하에서요.”
“냉정히 말하자면, 어렵겠네.”
“그렇죠.”
제국 암부 놈들이 순순히 엘레오노라를 포기할 리가 없었다.
이쪽의 목적지가 드러나 있는 이상 끈질기게 뒤를 쫓아올 테고, 늦든 빠르든 충돌하는 것은 시간의 차이였다.
‘문제는 녀석들이 뭘 준비하느냐인데.’
드래곤을 쓰러트린 드래곤 슬레이어가 자신들의 표적을 호위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을 터.
그렇다면 다음 습격 때는 자신이란 존재에 대항할 수단을 갖춘 채 올 것이 분명했다.
“미르엘.”
이진한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엘레오노라가 문 쪽을 보며 손을 흔들어 자신들을 찾는 미르엘을 불렀다.
“다행히 조금 뒤에 출발하는 마차 편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승객은 저희밖에 없으니 바로 준비하시면 될듯합니다.”
“그런가.”
이진한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79:00:59】
강제 종료까지는 어느새 1분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
로그아웃의 장소로 모험가 길드의 안쪽이라면 그나마 별 탈 없이 다녀올 수 있을 터.
‘독립 퀘스트니까 내가 로그아웃하면 이대로 세상이 멈추겠지?’
참으로 긴 1분이었다.
로그아웃하고 바로 뭘 할까 생각하며 두 눈을 감을 찰나, 카운트는 어느새 5초 안쪽까지 줄어들었다.
54321….
둥. 둥. 둥. 둥.
갑작스럽게, 균일한 간격을 둔 커다란 북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
그것이 무슨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북소리가 울린 것을 기점으로 길드 안이 순식간에 적막에 잠겼다.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이도 입을 닫았고, 서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주먹을 휘두르던 이들도 모두 움직임을 멈췄다.
“…전쟁.”
“…?”
찰나 동안 이어진 고요 속에서, 누군가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의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길드 안은 폭발적인 환호성에 휩싸였다.
“…전쟁이다-!”
“전쟁이다! 돈 벌 기회가 왔다!”
“와아아아아-!”
다들 대충 걸쳐 놓은 병장기를 챙기며 무장하기 시작했고,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전의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길드 내부의 공기가 달아오른다. 그녀들만이 어리둥절한 채 그 가운데서 우두커니 서 있었을 뿐. 무슨 상황인지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단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아무래도, 저희가 골치 아픈 때에 이곳에 온 것 같네요.”
“하아….”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성가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을 때, 이진한은 부릅뜬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78:59:50】
“…대체 뭔데.”
규정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음에도, 강제 로그아웃은 일어나지 않았다.
***
무장하며 장비를 점검하던 모험가들은 이내 접수처에서 공고가 내걸리자 쏜살같이 그곳으로 달려갔다.
곧 무언가를 작성하는가 싶더니 이내 우르르 빠져나갔고, 길드 안은 곧 텅 비어버렸다.
“정말로 전쟁이라도 난 걸까요?”
“그런가 봅니다.”
모험가들의 행동거지를 보니 작은 소라는 아닌 듯싶었다.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신경 쓰인다는 듯 모험가들이 나간 문가를 바라보았지만, 이진한의 의식은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로그아웃은 안 된다. 운영자 호출이랑 프렌드 메신저는 여전히 비활성화인 상태고.’
온갖 상상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제일 마지막에 남은 것은 상상하기조차 싫은 최악의 가정이었다.
‘만약, 만약 내가 게임을 하던 도중 죽은 거라면?’
그렇게 게임에 접속된 정신만이 남아 있는 거라면.
근래 몸을 조금 막 굴리긴 했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자리를 가졌고, 그대로 밤새 게임을 즐겼다.
식습관도 엉망이었고, 운동은 쥐뿔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영양제를 챙겨 먹는 것도 아니고, 따로 관리를 받는 것도 아니었다.
쓰레기 같은 생활이었지만, 아직 파릇파릇한 이십 대 중반의 나이인지라 괜찮다며 웃어넘긴바.
하지만 이 지경까지 오니 도저히 웃어넘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베르너님?”
“후유증이 남으셨나 봅니다.”
이진한이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 쥐자,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왔다.
“…아니.”
이진한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곤 두 눈을 번쩍 떴다.
자신이 죽었다고 보기엔 이상한 점이 많았다.
설사 게임에 접속한 상태로 사망한다고 하여도 그 정신이 계속 유지될 리는 만무했다.
뇌와 월드는 서로 쌍방향인 관계다. 어느 한쪽의 전원이 꺼지면 그 관계는 양립할 수 없게 될 터.
‘식물인간… 이 되면 모르겠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운영자의 호출이나, 프렌드 메신저의 기능이 비활성화인 상태를 설명할 수 없다.
즉,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면 게임 자체의 문제라는 것일 터.
‘…설마.’
다른 이들과의 통신할 수 없는 것이 단순히 독립 퀘스트이기 때문이 아니라면.
NPC들의 움직임이나 대화가 이전보다 ‘진짜’ 사람다워졌다는 것이 착각이 아니라면?
“….”
이진한, 베르너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인식을 달리하자 세상이 변화했다.
단순한 NPC 취급을 하던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의 선명한 눈빛이 보인다. 자신을 바라봐오는 그 우려 섞인 시선은 절대 인공지능 따위가 따라할 수 있는 편린이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살, 팔을 딛고 있는 탁자의 딱딱한 감촉, 길드 안에 감도는 퀴퀴한 냄새와 어딘가 칙칙한 분위기까지.
전부 당연시하게 여겼던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생생히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미친 건가?”
“미치…진 않으신 것 같은데. 또 그렇게 물어보시니 그런 것 같기도….”
“확실히 정상적인 언행은 아니시지만.”
미르엘은 진지한 얼굴로 이진한 앞에 서서 그 양 뺨을 잡고 자신과 시선을 맞췄다.
“미치지 않으셨습니다. 이곳이 현실입니다.”
미르엘로서는 그가 천 년 전의 기억과 현재를 혼동해 착란을 일으키는 것이리라 생각해 그리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이진한의 뇌리를 시원하게 관통해버렸다.
“하, 하하….”
그는 어깨를 떨며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이윽고 웃음을 그치더니,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 당면한 과제부터 해결해야지.”
「메인 퀘스트」 ─ ∑이단심문관
◈ 미들턴에 닥쳐온 몬스터 대군을 막아내고, 마르바스 교단의 음모를 저지해 영원의 결정 조각을 수집하시오.
보상: ‘99시간의 유예’, ‘영원의 결정 조각’.
이진한은 북소리와 함께 눈앞에 떠 오른 퀘스트 창에 잠시 생각을 미뤘다.
게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면 월드 운영진 쪽에서 조치해올 터.
만약 그것이 아니라 정말로 게임 속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이라면….
‘이제는 나도 모르겠다.’
그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대현자 클래스의 전직으로 해방된 대현자의 눈을 활성화했다.
슈우욱-.
순식간에 시야가 넓어지며 자신들이 있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범위를 넓히자 이 구역 전체를 볼 수 있었고, 종래엔 도시 전반을 살필 수 있게 되었다.
‘볼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진 대신에 마나 소모량도 대폭 늘었나.’
하지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는 데에 신경을 집중했다.
도시는 전체적으로 분주했다.
조금 전 이곳을 뛰쳐나간 모험가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 역시 바삐 움직이며 무언가를 서둘렀고, 도심에 있는 영주성과 병영으로 보이는 곳에선 무장한 병력이 성벽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면….’
주체가 되는 대상을 바꿨다.
성안에서 성 밖으로 시점을 옮기자 광활한 풍경이 보였다.
미들턴은 동쪽엔 마경이, 남쪽부터는 마경의 가장자리를 타고 이어진 아랄 산맥이 위치한 지형이었다.
구조적으로 본다면 산을 끼고 있어 전략적으로 외세를 막아내기 좋은 형태였지만, 맞서 싸우는 것이 같은 인간이 아니라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졌다.
“…몬스터군. 엄청 많은데.”
“몬스터의 습격인가요. 하긴 미들턴은 주위 환경이 그런지라 곧잘 이런 일이 있다곤 들었는데, 하필 오늘일 줄은….”
엘레오노라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리 염려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곧잘 있는 일이라는 말은 사실인 듯 도시의 분위기는 더없이 자연스럽다.
마치 잘 짜인 하나의 톱니바퀴처럼 구성원 모두가 제 할 일을 파악해 서둘러 움직이고 있었다.
문제는 몰려드는 몬스터의 숫자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어림잡아 10만 아니, 20만은 넘는 것 같은데 이것도 곧잘 있는 일인가?”
“…20만이요?”
이진한의 말에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산맥에 있는 몬스터가 전부 몰려온 것 같네. 벌레 때처럼 바글바글해.”
절로 혀가 내둘러지는 광경이었다.
과거 1부 에피소드에서도 이 정도 규모의 몬스터를 본 적은 몇 번 없었다.
북방 산맥의 대규모 방어전을 치를 때가 겨우 근처에 따라올까 싶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무리 봐도 지금이 더 많은 것 같았다.
“제국이 움직였다고 보기엔 어려울 것 같아.”
“확실히, 그러기엔 규모가 너무 크네요.”
단순히 엘레오노라를 잡기 위해 움직였다고 하기엔 너무 번잡스럽고, 스케일이 컸다.
높은 확률로 이쪽과는 별개의 일이라 보는 것이 맞을 터. 자신들은 운이 나쁘게도 휘말렸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래도 많아봤자 몬스터야. 성벽은 두껍고 병력은 많으니 적어도 뚫리진 않겠지. 곧잘 있는 일이라 했으니 알아서 잘 대처하지 않을까.”
“그렇겠죠. 영주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 규모를 파악하고 곧장 지원을 요청했을 테니까요. 텔레포트 게이트도 있으니 유사시엔….”
콰아아아아아앙-!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커다란 폭음이 터졌다.
황급히 성벽 쪽에 무언가 문제가 생긴 건가 싶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도시 가운데 두 줄기의 시커먼 연기가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무슨…”
“…방금, 이 도시의 텔레포트 게이트가 전부 파괴됐다.”
이진한은 대현자의 눈으로 보이는 광경에 눈살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