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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5화 (15/210)

◈ 015.

다음날 새벽.

경비대에서 마중이 오기 전까지 얼마 남지 않았기에 그들은 조금 이른 아침 식사를 했다.

음식은 엘레오노라 본인이 직접 준비한 것들로 스스로 생각해도 제법 훌륭하다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

그렇게 식사하던 중, 그녀는 장내에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를 느끼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연신 베르너의 눈치를 살피는 미르엘의 모습에 엘레오노라는 고기를 썰던 나이프를 우뚝 멈췄다.

‘…설마.’

의문은 이내 의혹이 되었다.

순식간에 갖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뒤덮었고, 가장 선명했던 것은 얼마 전 술에 취했을 때 그에게 매달리던 미르엘의 모습이었다.

그녀가 검은 현자를 동경했던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보였던 모습은 동경과는 사뭇 거리가 있던 감정이었으니.

한창때의 건장한 남녀다.

더욱이, 자신들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더욱 불타오를 수도 있지 않은가.

“…엘레오노라 님?”

“왜 그래. 갑자기 손을 부르르 떨고.”

서로 비슷한 호흡으로 자신을 향해 말을 걸어오는 그 모습에 엘레오노라의 의혹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아니에요. 잠이 조금 덜 깼나 봐요.”

오랜 친구가 자신보다 더 일찍 어른의 계단을 올라가 버렸다.

그 사실에 엘레오노라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치밀어 오르는 열기를 애써 감추었을 따름이었다.

‘나중에 물어봐야지.’

물론, 그녀도 아예 관심이 없는 일은 아니었다.

***

마경에 펼쳐진 지평선 끝으로, 조금씩 해가 떠오르며 어둠을 몰아낸다. 하늘은 짙은 푸르스름한 색으로 물들어 여명이란 이름의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모시러 왔습니다. 샛길을 터놓았으니 조용히 이동하실 수 있을 겁니다.”

마후마임은 약속한 대로 경비대원을 보내왔다.

은밀함을 기하기 위함인지, 그들은 전부 사복을 입고 있는바. 혹시나 다른 이들의 이목을 끌까 싶어 철저히 준비한 듯싶었다.

숙소 뒤쪽에 있는 건물을 따라 이어지는 샛길로 방향을 잡은 것도 모자라 경비대 소속 마법사가 인비져블 마법으로 일행의 기척까지 지워버렸다.

빙 둘러 가느라 예상보다 시간이 걸렸지만, 그들은 곧 경비대 본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조용히 떠나기엔 딱 좋은 날씨군요.”

호데르만이 옅은 미소와 함께 인사해왔다.

이진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인사를 받아주었지만, 마후마임의 그 개성적인 핑크 모히칸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장님께선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런가.”

“예. 아무래도 그분이 움직이시면 시선이 쏠리기 마련이니까요. 지금 도시 내부를 순찰하시면서 드래곤 슬레이어의 위명을 듣고 찾아온 이들을 단속하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이곳에 오지 못할 것 같으니 대신 인사를 전해달라고 말씀까지 하시더군요.”

“이쪽도 고맙다고 인사 부탁하지.”

경비대장이 직접 나섰으니 몰려든 인파도 함부로 여관에 침범하지 못할 터.

애초에 거래 조건으로 예정된 일이긴 했으나, 그래도 성심껏 움직여주는 모습에 그는 감사를 전했다.

“그럼 텔레포트 게이트 쪽의 연락이 오는 대로 출발하겠습니다.”

호데르만의 말에 엘레오노라와 미르엘 역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은 출발 이전 마법으로 외형을 바꾼 상태였다.

확연하게 튀는 머리색을 바꿨고, 얼굴 역시 원래의 것과 동떨어진 평범함을 가장했다.

“….”

이진한은 얼굴까지는 바꾸지 않았다.

어차피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직접 대면한 이도 소수였으니 그리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다만, 판타지 세계의 정석대로 돋보이는 그 검은 머리의 색은 두 여인과 같이 다른 색으로 물들였을 따름이었다.

“괜찮아요, 잘 어울리세요.”

그가 옅은 금발로 염색한 머리카락이 어색해 살짝 만지작거리자 옆에 있던 엘레오노라가 작게 웃으며 말해왔다.

“검은 머리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금발도 좋네요. 눈동자도 어울리시고요.”

“…그래?”

금발벽안이란 말이 있듯, 엘레오노라는 이진한의 머리색을 바꾸며 눈동자의 색까지 푸른색으로 바꿔버렸다.

그는 외모를 칭찬받는 삶과는 조금 동떨어진 인생을 살아왔기에 살짝 부끄러워져 시선을 피하자, 그녀들은 또다시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게이트 쪽의 준비가 끝났다는군요. 곧바로 출발하시죠.”

경비대원의 전언을 받은 호데르만이 알려왔다. 곧 그들은 응접실을 떠났고 이내 경비대 본부 옆에 있는 텔레포트 게이트로 향했다.

“…왜?”

게이트의 입구를 앞에 둔 엘레오노라의 얼굴은 복잡한 감정으로 얼룩져 있었다. 슬쩍 그 옆에 다가간 이진한이 묻자, 그녀는 살짝 쓴웃음을 지으며 발끝을 땅 위에 비볐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일이 잘 풀리라곤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당장 벨데르에 도착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했으니까 말이죠.”

엘레오노라의 손이 꼼지락거리며 품에 있는 목걸이를 매만졌다.

“저는, 저와 미르엘은 베르너 님께 감사하고 있어요. 벌써 몇 번이나 목숨을 구해주셨으니까요.”

엘레오노라는 천천히, 마치 기도라도 하는 것처럼 가슴 앞에서 두 손을 꼭 움켜쥔 채 이진한을 올려다보았다.

“….”

잠시간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가늘게 떨리는 눈동자 속에 애절함이 담긴다. 말이 이어지지 않았지만, 이진한은 그녀가 자신에게 하고픈 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저희를 떠나지 말아 주세요.」

그들의 의뢰는 리베라 제국의 마르딘 영지까지 자신들을 호위해달라는 것.

즉, 다가올 이별은 예정되어 있다는 소리였다.

이진한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제삼자에 의해 방해를 받고 말았다.

“…끼어들어서 죄송하지만, 준비가 끝났습니다. 바로 오르시지요.”

어색한 표정을 지은 호데르만이 쭈뼛거리는 태도로 이진한과 엘레오노라를 향했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뒤이어 경비대원들과 같이 텔레포트 게이트를 확인하고 있던 미르엘 역시 그들 쪽으로 다가와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바로 출발하지.”

엘레오노라와 이진한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상황을 무마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졸지에 불청객이 되어버린 호데르만은 그 옆에서 머리를 벅벅 긁었을 따름이었다.

곧 그들은 텔레포트 게이트 앞에 섰다.

외관은 중세 종교에서나 볼 법한 제단의 형태로, 그 가운데 커다란 문이 자리했고 주위에는 텔레포트 술식이 대규모로 새겨져 있었다.

“열다섯 명. 전부 확인했습니다.”

호데르만을 필두로 모두 그 위에 서자 게이트를 관장하는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텔레포트가 시작함을 고했다.

“조금의 멀미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전이가 끝난다면 머지않아 멎을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웅웅웅-.

게이트의 문이 닫히자 텔레포트 술식 위로 마나석의 마나가 주입되었다. 그와 동시에 주위가 새하얀 빛으로 물들었고, 찰나의 부유감이 전신을 감싸 안았다.

“….”

텔레포트는 그리 길지 않았다.

한 번 두 눈을 깜빡이자 눈부신 빛이 사라지며 마법의 발동이 끝났음을 알려왔다.

뒤이어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자 이전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으니.

“미들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도착지의 게이트를 관장하던 실눈의 마법사는 옅은 미소와 함께 그들을 맞이했다.

***

미들턴은 마경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제일 가까운 나라인 페르포치아 왕국 끝자락에 있는 도시였다.

솔직히 벨데르는 벨라시온의 습격 때문에 거의 절반 정도 파괴되어 있다시피 했기에 그리 도시다운 느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미들턴은 규모가 작긴 했어도 중세 유럽 느낌을 물씬 풍기는 분위기였기에, 그 한 가운데를 걷고 있자니 마치 해외여행을 온 기분이 들었다.

형형색색의 블록.

뾰족한 첨탑과 둥그스름한 지붕을 보아하니 서로 다른 시대의 문화 양식이 섞여 있는 것 같았지만, 알게 무엇인가. 보기 좋으면 그만이었기에 이진한은 복잡한 생각 따위는 집어치우고 그저 도시의 경관을 즐겼다.

“이쯤 오면 된 것 같습니다.”

번화가의 목전에서 호데르만이 말해왔다.

그들의 도시 재건에 들어가는 자재를 구매하기 위해 미들턴으로 온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안쪽까지 무사히 들어왔으니 이제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신세 졌다. 나중에 또 들리지.”

“신세는 저희가 졌지요. 언제든 다시 벨데르에 방문해주신다면 성심성의껏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열두 명의 경비대원이 차렷 자세를 취했다.

그 제일 선두에 선 호데르만은 왼손으로 검 자루를 감싼 채, 주먹 쥔 오른손을 들어 제 심장에 가져가 그 위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드래곤 슬레이어께 경의를.”

결코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선명한 의지를 품고 있었다. 그 절도 있는 동작들에 이진한 역시 쓴웃음을 지으며, 마찬가지로 손을 올려 이쪽의 가슴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마경의 수호자들에게 축복을.”

곧 호데르만을 비롯한 경비대원들은 자리를 떠났다. 남은 것은 이진한을 비롯한 원래 일행 세 명뿐.

그는 고개를 돌려 이만 가자고 말할 찰나, 뒤쪽에 있던 미르엘이 살짝 오묘한 시선으로 바라봐오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왜?”

“…조금 의외라서요.”

“의외? 무엇이?”

그 물음에 미르엘은 살짝 뺨을 긁으며 답했다.

“베르너 님은 냉철하신 성격일 거라 생각했거든요.”

“아, 무슨 이야긴지 알 것 같아요. 경비대 인사에 화답해준 것 때문에 그러는 거죠? 저도 가볍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걸로 끝날 줄 알았거든요.”

그녀들의 말에 이진한은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내가 그런 식으로 보이고 있었어?”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그에게 있어서 이 세계는 게임에 불과했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달했어도, 눈앞에 있는 이들은 NPC에 불과한바. 그러니 그런 이질적인 태도를 보였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알고리즘에도 변화가 있었나? 업데이트 이후에는 정말로 사람을 상대하는 것 같단 말이야.’

마탑에서 깨어난 직후 부터는 정말로 살아있는 사람과 만나고 대화하는 느낌이 들었다.

눈앞에 있는 엘레오노라나 미르엘도 그렇고 마후마임이나 호데르만도 그렇고, 앞서 싸웠던 블랙 드래곤 벨라시온 역시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지 않았나.

2부 업데이트에서 무엇을 패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공지능의 퀄리티가 한 번에 훅 올라가서 무심코 착각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면 먼저 모험가 길드로 갈까요? 다른 도시로 가는 마차 편도 알아봐야 하니 말이에요.”

“그래.”

엘레오노라의 말에 그들은 먼저 모험가 길드를 찾아 나섰다.

미들턴에 왔을 때와 같이 텔레포트 게이트를 통해 리베라 제국까지 단숨에 이동했으면 좋았겠지만, 지금 그녀들은 오스칼 제국에 의해 수배가 되어 있는 상황.

벨데르에서 위조 신분증을 구해 도시와 도시 사이를 직접 건너는 것은 괜찮았지만, 텔레포트 게이트와 같이 마나의 인증을 받아야 하는 부류의 이용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도 이번엔 게이트에서 나오자마자 창을 겨누는 놈들이 없어서 조금 낫네.’

이제 좀 제대로 된 에피소드의 진행이 되는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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