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4.
【88:59:42】
메인 퀘스트의 달성으로 늘어난 시간의 유예가 시시각각으로 줄어들고 있다.
옆에 있는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불러왔지만, 이진한은 심각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업데이트 오류인가? 아니, 그러면 훨씬 더 전에 알림이 왔을 텐데.’
월드 같은 가상 현실 게임은 오류에 민감했다.
잘못되었을 시 뇌에 직접 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위험성이 있으니 당연한바. 그렇기에 오류 관련으로는 몇 개나 되는 부서가 24시간 모니터링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월드가 오픈한 지는 벌써 6년이 되었다.
그간 거의 이 안에서 살다시피 한 이진한의 플레이타임 역시 그것과 비슷했지만, 지금껏 이런 현상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기에 곤혹스러울 따름이었다.
“…!”
곧 정신을 차린 그는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온 주홍색 눈동자에 움찔하며 몸을 내뺐다.
그러자 엘레오노라는 다행이라는 듯 옅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조금 더 쉬셔야 할 것 같아요. 경비대장에게 시일을 미뤄달라고 할까요?”
“맞습니다. 며칠 더 쉬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리 급할 건 없어 보이는데.”
미르엘 역시 그 말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진한은 고개를 저으며 사역마가 송출하고 있는 여관 앞의 모습을 가리켰다.
“물밑에서 움직이는 암부의 행적이 경비대장의 귀에 들어갈 정도라면 의도적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냈다는 거다. 지금 당장은 드래곤 슬레이어의 파장 때문에 대놓고 접근해오기 힘든 건 맞지만, 그만큼 더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우릴 덮쳐오겠지.”
실제로 마후마임과의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몇 번이나 이쪽을 스쳐 지나가는 은밀한 기운들이 있었다.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느끼지 못할 정도의 미약한 것이었으나, 마후마임의 등장 직후 이진한이 펼친 결계 때문에 이쪽을 탐지하지 못했다.
아마 마후마임이 오스칼 제국의 이름을 꺼낸 것도 그런 기척을 느꼈기에 앞뒤 사정을 대강이나마 파악하고자 했던 것일 터.
“마후마임에겐 얼마간 계속 우리가 이곳에 머물다 간 것처럼 꾸며달라 할 생각이야. 그러면 최소 며칠은 시간을 벌 수 있겠지.”
“그렇군요.”
“그거라면 확실히.”
그 말에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 깊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둘 다 푹 쉬어둬. 아마 이 이후부터는 바쁘게 움직여야 할지도 모르니까.”
***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내일을 위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을 때, 이진한은 아직 남아 있는 피로감에 침대에 누워 뒹굴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
로그아웃과 운영자 호출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하다못해 다른 친구들에게 메시지라도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에피소드에 진입했기 때문인지 처음 눈을 떴을 때와 같이 비활성화된 상태였다.
‘만약 이대로 시간이 계속 지난다면….’
월드와 현실의 시간 비율은 8:1.
이쪽에서 사흘하고도 얼마가 더 흘렀으니 현실에선 10시간이 넘게 지난 것이 되었다.
가상현실 게임 규정에 따라 한 번에 최대 접속할 수 있는 것은 12시간, 그렇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강제로 접속이 종료될 터였다.
“…이번에는 벌금 낼 텐데.”
이진한은 머리를 긁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하드 게이머로 이전에도 몇 번이나 규정 시간이 넘도록 월드를 플레이한 바가 있었다.
기억하기로 이번 횟수까지 포함한다면 위법 수치에 걸리게 되었다. 그깟 벌금 몇 푼 정도야 내면 그만이었지만, 그 다음부터는 게임 접속이 금지 당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무조건 월드 본사에 따져야지.”
로그아웃과 운영자 호출이 먹통이 되는 오류였으니 월드 운영진 측에서도 심각하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컸다.
잘하면 꽤 짭짤한 보상도 받을 수 있을 터.
“상태창.”
접속이 강제로 종료될 때까지는 30분 정도가 남았다.
그렇기에 이진한은 그전까지 벨라시온과의 싸움에서 도달한 대현자 클래스의 변화를 살필 생각이었다.
“처음은 마도사인가. 아무래도 숙련도가 높은 소드 마스터가 제일 먼저 될 줄 알았는데.”
마법의 종주인 드래곤과 싸웠기 때문인지 마도사 클래스 쪽의 경험치가 제법 짭짤하게 들어온 것 같았다.
그는 가벼운 손짓으로 대마도사 클래스에 오르게 되며 얻게 된 초월 마법의 리스트를 허공에 띄웠다.
“어디 보자….”
보통의 게임에선 상위 클래스로 전직하면 지급되는 포인트를 투자해 원하는 스킬을 익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하지만 초월지경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그 이름답게 경지에 오르는 순간 모든 초월 마법이 해금되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숙련도에 따라 마법의 성공 확률과 위력이 천차만별이 되긴 했지만, 이진한에겐 스크롤이라 하는 좋은 보조 아이템이 있었다.
“일단 이 세 개는 대충 위력을 확인했고.”
벨라시온이 사용했던 마법으로, 지정된 구역을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뒤덮는 「멸염지옥(滅炎地獄)」.
내 여력이 허락하는 한, 영원히 대상을 공격하는 사라지지 않는 번개를 떨어뜨리는 「인피니트 라이트닝」.
그리고 광범위 폭격 마법인 「진홍의 보옥」까지.
이미 이전에 한차례 대마도사 클래스 캐릭터를 육성한 적이 있기에 스킬 세팅은 대충이나마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당장 쓸 만한 마법들로 그 공백을 채웠고, 머지않아 작업이 모두 끝났다.
【88:02:13】
규정 시간이 되기까지 아직 9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오늘 밤이 지나고 내일 아침이 되었을 때쯤 강제 로그아웃될 터.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그때까지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낼까 싶어 고개를 돌리자, 탁자 옆에 놓여있던 서류 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정보 길드에 의뢰한 고대 신의 원정대에 관한 기록이 적힌 서류들이었다.
이진한은 염동 마법으로 그것들을 허공에 띄운 뒤, 침대에 누운 사제로 기록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세상이 잊어버리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이곳에 적는다. 적어도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망각하지 않기를 바라며.」
“…무슨 서사시 같네.”
기록이라기보단, 영웅담을 적어놓은 것 같다. 도입부부터 느껴지는 괜한 장엄함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계속해서 그것들을 읽어나갔다.
「세상은 불균형한 비애와 강압적인 시련으로 그 운명을 뒤틀었다.」
「그 모든 역경을 딛고 일어선 자를, 우리는 영웅으로 불렀나니.」
「전란과 혼란이 가득한 어지러운 세상 가운데, 그들은 확고한 신념과 명확한 기준을 지닌 채 맞서 싸웠다.」
「불멸」
「영원」
「안식」
「창조」
「정의」
「불굴」
「지혜」
“이야, 제법 멋들어지게 써놨네.”
이진한은 흡족해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얼마 전까지의 일이었지만, 자신들이 퀘스트를 깨며 고대 신의 앞에 도달하기까지의 여정을 무슨 소설처럼 서술해놓았다.
“흐음.”
그는 중간까지의 기록을 대충 훑어 넘겼다.
어차피 그때의 내용은 장본인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는바. 주목한 것은 고대 신의 공략을 끝낸 뒤의 일이었다.
「고대 신을 쓰러뜨린 영웅들은 각자의 땅으로 돌아갔다.」
누구는 나라를 세워 왕이 되었고, 누구는 마탑을 세워 마탑주가 되었고….
오직 「지혜」의 현자만이 그 이후의 행적이 묘연하다며 기록되어 있었다.
검은 현자를 기리고, 또 그를 추종하는 이들이 모여 오스칼 제국 북부 끝자락에 검은 마탑을 세웠지만, 현대에 와서는 그 명맥이 끊겼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 기록은 끝이 났다.
“복잡하네.”
아직 지금 단계에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그다지 없어 보였다.
이제 혼자서만 진행하는 독립 퀘스트가 끝나고 같은 원정대에 속해 있던 다른 동료들과 만나면 본격적인 에피소드가 시작되리라고 막연하게 짐작만 했을 뿐이었다.
끼이익-.
그때, 방문이 자그마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린다. 이진한이 그곳을 향해 시선을 옮기자, 은백색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며 미르엘이 얼굴만 빼꼼 내밀어 온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직 안 주무셨나요?”
“이걸 읽느라.”
이진한이 염동력으로 서류를 펄럭거리자 그녀는 아, 하는 표정과 함께 고개를 끄덕여왔다.
“저도 읽어봐도 되나요? 고대 영웅들에 관한 전승은 동화로 알고 있던 것이 전부라.”
“괜찮은데, 정보 길드라고 해도 딱히 특별할 건 없더라.”
그가 소설을 보는 것 같았다며 어깨를 으쓱이자, 옅은 미소를 지은 미르엘이 총총거리는 발걸음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왔다.
평상시 보이는 격식 있는 딱딱한 모습과 달리 그 나이대 소녀와 같은 모습이었다.
곧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그녀는 허공에 띄워져 있는 서류들에 집중하며 그것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음.”
단시간에 읽기엔 꽤 양이 많았지만, 대부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인 듯 휙휙 지나갔다. 그러곤 마지막에 이르러 살짝 허무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진짜로 별거 없네요. 제가 어릴 적에 읽었던 동화는 이걸 조금 더 쉬운 단어들로 각색한 거였어요.”
“천 년 전의 일이니까 정보 길드로서도 그 정도라는 거겠지.”
허공에 떠올라 있는 서류들을 한데 모아 가지런히 정리해 탁자 위에 내려놓은 미르엘은 제 머리를 단정히 쓸어 올리며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베르너 님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어떻게?”
“저희 의뢰가 끝난 다음에요.”
“아직 깊게 생각해보진 않았는데 아마 이곳저곳 돌아다니겠지?”
“그러면 그 이후엔?”
“…글쎄?”
앞으로의 에피소드가 어떻게 진행될지 그로서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아마 서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고대 유적을 조사하는 일이 주를 이르지 않을까 싶었다.
“…그, 그러면 저희랑 계속 함께하는 건 어떠세요? 베르너 님이라면 리베라 제국에서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으실 거예요. 어지간한 작위 정도는 쉽게 손에 넣으실 수 있으실 걸요?”
“그건 조금 생각해봐야겠네.”
그 말에 미르엘은 촉촉한 시선으로 고개를 들었다.
방금 막 씻고 나온 듯 머리카락엔 윤기가 흘렀고 그 주위에선 좋은 향기가 풍겨왔다.
잠시간 그 모습에 이진한이 시선이 팔렸을 찰나, 그녀는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베르너 님이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한없이 서투르고, 한없이 투박한 고백이었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 부끄러움에 두 주먹을 꽉 쥐고 있던 미르엘과 눈이 마주쳤다.
백금색 머리카락, 그리고 새하얀 피부와는 반대로 그 붉은 눈동자에는 기이한 열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
잠시간 서로 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진한은 잠시간 말을 머뭇거렸다. 뭐라도 말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먼저 입을 연 것은 미르엘 쪽이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무리를 부렸죠.”
그녀는 서글픈 미소를 짓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
문가에 다다라서는 머뭇거리며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무언가 미련이 잔뜩 담긴 시선이었다. 하지만 이내 짧게 고개를 숙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좋은 밤 되시라는 말을 끝으로 방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