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3화 (13/210)

◈ 013.

“…….”

이진한이 두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그를 반겼다.

잠들어 있은 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다.

창밖을 보려고 해도 커튼이 쳐져 있어 지금 시각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끄응.”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그 위를 덮고 있던 이불이 흘러 내렸다.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겁기 그지없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깊게 한숨을 내쉬자, 간호하고 있던 것인 듯 침대 끝자락에 엎드려 졸고 있던 미르엘이 비척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

“….”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어.”

먼저 입을 연 것은 미르엘 쪽이었다. 그녀는 곧 정신이 돌아왔는지 두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엘레오노라 님! 베르너 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정말?!”

요리라도 하고 있던 것인지 앞치마 차림의 엘레오노라가 잔뜩 상기된 목소리와 함께 문 사이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

일어나자마자 이런 미인들이 반겨주다니.

순간 천국에 온 줄 알았으나, 뒤이어 물밀듯이 밀려오는 기억들에 이진한은 정신을 차렸다.

“내가 얼마나 누워있었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어요. 경비대장의 말로는 그만한 싸움이었으니 못해도 일주일 정도는 누워있을 거라고 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셨네요.”

“하루라.”

벨라시온과 싸운 여파일까.

대마도사에 올라 각성한 탓일까.

곰곰이 생각해보자니 둘 다일 가능성이 컸다.

【대현자】 그리고 「대마도사」

이진한은 상태창에 쓰인 그 이름들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배고프시죠? 간단하게 죽이라도 끓여 봤어요. 아무래도 며칠간 누워 계시다가 일어난 뒤에 무거운 식사는 별로일 것 같아서요.”

“여기는? 여관이 아닌 것 같은데.”

“경비대장이 구해준 별채에요. 드래곤 슬레이어가 등장했잖아요. 저희가 원래 묵던 여관 쪽은 난리가 났죠.”

엘레오노라는 옅은 미소를 띠며 식기를 내밀었다. 미르엘 역시 그 옆에 있는가 싶더니, 무언가 떠오른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경비대 쪽에 베르너 님이 깨어나신 걸 알리고 오겠습니다.”

“알린다고?”

“네. 마후마임 대장과 호데르만 부대장이 꼭 부탁했습니다. 아무래도 새로운 드래곤 슬레이어의 출현인지라 도시 내외가 시끄럽다고 했으니…….”

“흠.”

확실히, 그들의 눈앞에서 블랙 드래곤을 물리쳐 보였으니 이목이 끌리지 않을 수가 없었을 터.

“지금도 별채 밖은 경비대 간부들이 지키고 있어요. 베르너 님이 드래곤을 쓰러뜨린 직후 사방으로 소문이 퍼져 다른 도시에서도 사람들이 몰려왔으니 말이죠.”

“다른 도시에도 왔다고?”

딱.

이진한의 물음에 엘레오노라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허공으로 그녀의 사역마가 보고 있는 화면이 떠올랐다.

“…많기도 하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여관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경비대의 실력자들이 그 앞을 지키고 있는 덕분에 무작정 돌입해오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어떻게든 기회를 엿보고 있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드래곤 슬레이어는 대륙을 강타할 만한 업적이니까요. 내로라하는 용병 길드, 기사단, 그리고 각 왕국, 아 저긴 오스칼 제국의 귀족도 있네요. 아마 전부 스카웃이 목적이겠죠. 그것도 아니라면 최소한 안면은 트고 싶어 하거나.”

“…….”

이진한은 그 광경을 보니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이만큼이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던 적이 있었던가?

‘…성기사이즈킹 닉네임 달고 길드원 모집한다고 공지 올렸을 때 닉네임 때문에 온 커뮤니티에서 조리돌림 당한 이후로는 처음인 것 같네.’

그때는 처음 퍼간 새끼를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뭐. 지금은 그리 나쁜 기분만은 아니었다.

***

미르엘이 경비대에 연락을 넣으니 마후마임과 호데르만이 직접 찾아오겠다며 답신이 돌아왔다.

이진한은 그 뒤로 가볍게 몸을 풀었다.

하루 동안이라고 하지만, 누워만 있었으니 찌뿌둥하기 그지없다. 마후마임과 호데르만이 오고 있지만 않았다면 당장 밖으로 뛰쳐나갔을 터였다.

“…그나저나 정말로 죽는 줄 알았어요.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규모의 마법들이 휙휙 날아다니고, 눈 깜빡할 찰나마다 날 선 칼날 같은 폭풍이 들이닥치고……. 여파만으로 도시가 무너지는 줄 알았다니까요.”

이진한 옆에 앉아있던 엘레오노라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솔직히 조금 무서웠거든요. 아무래도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확실히 이천 년을 산 드래곤이더라. 혼자서는 조금 버거웠어.”

이진한은 강한 척 허세를 부릴 생각은 없었다.

실제로 대마도사의 각성에 이르기 전까진 서로 치고받는 난타전을 벌였고, 그 끝에선 궁지에 몰리지 않았는가.

“그나저나 그 빛은 뭔가요? 하늘에서 빛의 기둥을 쏟아지게 하는 마법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건…….”

엘레오노라의 물음에 이진한은 잠시간 말을 멈췄다.

대마도사로 각성했다고 말하기엔 조금 그러니 적당히 둘러댈 찰나, 좋은 핑계가 떠올라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몰라. 갑자기 빛의 기둥이 머리 위로 떨어지더니, 벨라시온이 나보고 용사라고 중얼거리던데.”

“…용사요?”

그녀의 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이진한 역시 마찬가지인 심정이었다.

설마 그 이펙트를 보고 혼자 착각해 치명적인 틈을 드러내 줄 줄이야.

“…일단은 영웅이라 불리기는 하는데, 용사라. 하긴 업적만 보자면 용사라고 해도 무리가 없겠네요. 현시대에서 베르너 님과 대적할 자가 누가 있겠어요.”

“그래도 몇 명은 있지.”

그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자, 이번엔 미르엘이 살짝 놀랐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몇 명이나 있는 건가요?”

“어. 제국이나 각 왕국을 대표하는 강자들이 그럴 것이고, …내 동료들도 있겠네.”

“고대 영웅분들이요?”

이번엔 엘레오노라의 두 눈이 동그랗게 뜨자, 이진한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을 가리켰다.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데, 다른 녀석들도 그러지 않을까.”

아마 서대륙에 도착해야 그들과 합류할 수 있으리라 그는 생각했다.

“확실히.”

“저, 저는 검은 현자님 다음으로 불멸의 팔라딘이라 불렸던 영웅분을 만나고 싶었는데…….”

두 여성이 진지한 얼굴로 토론을 시작하는 사이, 이진한은 침대에 걸터앉아 인벤토리를 살폈다.

벨라시온을 쓰러뜨리고 얻은 보상이 작지 않다. 드래곤 하트를 비롯해 가죽과 비늘, 그리고 그 뼈까지 그의 인벤토리에 차곡차곡 쌓였으니.

블랙 드래곤이란 종족답게 녀석의 드래곤 하트는 마치 시커먼 보석의 결정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그것을 허공에 던지며 받기를 반복하자, 엘레오노라가 은근한 눈빛으로 바라봐왔다.

“그건 어떻게 사용하실 건가요?”

“글쎄, 스태프라도 하나 만들까?”

“드래곤 하트가 박힌 스태프라…….”

엘레오노라는 상상만 해도 부럽다는 듯 감탄을 터트렸다.

아쉽게도 그의 인벤토리에는 대마도사 전용 장비가 거의 없었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와 신궁 클래스의 것은 대부분 준비해놓았으나, 대마도사의 장비는 다른 두 클래스에 비해 가격이 워낙 비쌌기에 천천히 사려고 했던 것이었다.

‘대마도사 부캐 쪽에 있는 장비를 그대로 가져오고 싶네. 그것도 나름대로 그 당시에 제일 좋았던 스펙으로 맞춰놓은 건데.’

그래도 좋은 재료가 손에 들어왔다.

이천 년을 산 드래곤 하트라면 제법 좋은 스태프를 만들어낼 수 있을 터.

똑똑-.

곧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진한은 드래곤 하트를 다시 인벤토리에 넣었다. 뒤이어 미르엘이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의 두 남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이군.”

어느덧 멀쩡해진 모습의 마후마임이 씩 웃으며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진한이 가볍게 그 손을 맞잡자, 그는 팔을 위아래로 크게 흔들며 뒤쪽에 있던 호데르만에게 물었다.

“이러면 내가 처음으로 드래곤 슬레이어의 손을 잡은 사람이 되는 건가?”

“…소름 끼치게 그게 무슨 소립니까. 대장님 모습으로 그러면 사람들이 정말로 오해한다고요.”

확실히 방금 말엔 살짝 소름이 돋았었다.

“…….”

엘레오노라와 미르엘 역시 진즉에 거리를 둔 채 벽에 붙어 있었다.

“뭐, 사람에게는 각자의 개성이 있는 법이지. 그렇지 않나?”

“…너는 너무 넘쳐서 탈인 것 같은데.”

마후마임은 여전히 분홍색 모히칸에 선글라스, 달라붙는 검은색 가죽 바지와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체 위를 가로지르는 두 줄기의 멜빵끈 차림이었다.

곧 있으면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될 NPC일 터.

“흠흠, 우선 감사 인사부터 하지.”

잠시간 헛기침하며 목청을 가다듬은 마후마임은 이진한의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인다. 뒤쪽에 선 호베르딘 역시 그와 같이 깊게 허리를 숙여왔다.

“드래곤 슬레이어에게 경의를. 저희 도시를 구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그 정중한 인사에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자, 마후마임은 슬쩍 고개를 들고는 입꼬리를 히죽이며 웃었다.

“그렇지?”

“대장님.”

곧바로 호데르만이 인상을 써왔기에 그는 농담이라며 어깨를 으쓱인다. 그러곤 수하에게 눈짓하며 말을 이었다.

“약속한 보수다. 우리가 준비한 것에 더해 도시의 시민들이 알음알음 보탰지. 뭐, 공적에 비하자면 초라한 보상이지만, 부디 받아주었으면 하는군.”

마후마임의 눈짓에 따라 호데르만이 묵직한 주머니를 건넸다.

확실히 생각보다 무게가 심상치 않았다. 곧바로 그 리스트를 확인해보니, 원래 받기로 한 것보다 삼할은 더 많은 양이 담겨 있었다.

“무리한 거 아니야? 도시 복구에 바쁠 텐데.”

“마경은 척박한 땅이지만, 벨데르는 예로부터 희귀한 원석과 몬스터의 사체 덕분에 궁핍한 적은 없었다. 복구 사업은 차질 없이 진행될 테니 걱정하지 말도록. 당장 가시적인 위험이었던 드래곤이라는 큰 적이 제거되었으니 이제 천천히 복구하는 일만 남았군.”

“그런가.”

그러면 부담 없이 받을 수 있었다.

사실 뱉어낼 생각도 없었지만.

“…그리고.”

마후마임은 제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며, 주홍빛이 감도는 눈동자를 나에게 향했다.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고 싶다고 했었지.”

“그렇다. 이들과 함께.”

엘레오노라와 미르엘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녀들이 고개를 끄덕여왔다.

“흠.”

마후마임은 제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곤 잠시간 뭔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오스칼 제국과 관련된 일이군. 근래 제국의 암부 조직원이 도시 안쪽에서 어슬렁거린다던 이야기가 물밑에서 돌고 있었지.”

“…….”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마후마임의 뒤쪽에 있던 호데르만 역시 설마 그들이 그쪽과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듯 몸을 움찔했다.

툭.

이진한은 가볍게 하품을 내뱉었다. 그러곤 인벤토리에서 용아청성창을 꺼내 들었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쪽이랑은 관계없는 이야기 텐데?”

그의 예상하기로 아마 마후마임은 호탕한 성격으로 모델링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100% 맞는다고 볼 순 없다. 굳이 용아청성창을 꺼내 든 것도 그들에게 하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의 얼굴에 긴장이 서리고, 눈치를 보고 있던 호데르만 역시 경직된 표정으로 연신 제 주먹을 주억거렸다.

“상관없지는 않지. 나는 이곳, 벨데르의 경비대장이다. 제국은 요주의 경계 대상이니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대답은?”

잠시간 침묵을 지키던 마후마임은 곧 두 손을 흔들며 항복이라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리 겁주지 마. 설마 드래곤 슬레이어에게 대항하겠는가. 네가 도시를 공격하지 않는 이상, 우리도 널 적대할 생각이 없다.”

그 말에 이진한과 마후마임, 둘을 제외한 다른 세 명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이쪽의 인원과 기록을 조금만 손보면 되는 것이니 말이야. 호데르만이 말했듯 자제를 사러 가는 행상에 섞이면 된다. 그것으로 끝나는 문제지.”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이진한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용아청성창을 다시 인벤토리에 넣었다.

꿀꺽-.

압박을 가하며 한껏 발산한 기세 때문인지, 이야기가 잘 풀렸음에도 호데르만의 턱 끝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마후마임은 슬쩍 그것을 보고는 작게 실소를 내뱉은 뒤 입을 열었다.

“날짜는?”

“가능한 한 빨리.”

“내일이라도 가능하다. 내일 새벽에 사람을 보낼 테니 그때 조용히 오면 되겠군.”

“그러지.”

“그래, 그러면 그때까지 푹 쉬도록. 우리는 이만 가지. 부대장이 오줌이라도 지리지 않았는지 걱정이 돼서 말이야.”

“…안 지렸습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호데르만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마후마임은 수하의 그런 순진한 반응에 껄껄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이내 자리를 떠나갔다.

“…정말로, 끝까지 시끄러운 사람이었네요.”

“그러게요. 나쁜 사람이 아니란 건 알겠지만 좀…….”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질색한 표정으로 마후마임이 떠나간 자리를 바라보았다.

이진한은 쓴웃음을 짓고는 이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도입부 시나리오도 제법 진행했다고 할 수 있다.

현실과 게임 속의 시간 비율이 같은 건 아니었지만, 꽤 오랫동안 접속해 있었으니 정신적으로 한계가 왔다.

‘조금만 자고 올까.’

다른 랭커들은 어디까지 진행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잘하면 앞으로 에피소드 전개에 있어서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을 들어올 수 있을 터.

“로그아웃.”

그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직후에 나올 시스템 메시지를 기다렸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화는 없었다.

“…로그아웃.”

“베르너님?”

의미 모를 소리를 내뱉는 이진한의 모습에 미르엘의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그는 그 부름에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속 편하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고, 이내 손끝이 잘게 떨려왔다.

“운영자 호출.”

확실한 의사를 담아 키워드를 말했다.

전투 중이나 특수한 상황 가운데라면 로그아웃이 거부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운영자 호출은 그 말이 인식되는 순간 그 즉시 일어나는 현상인바.

예외는 없었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설사 운영자가 부재중이더라도 시스템이 그 말에 호응해 플레이어를 대기 상태로 치환하여야 했다.

“…….”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유의미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은 채 시간은 계속 흘러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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