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2.
“대체 뭔…….”
이진한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번 메인 퀘스트의 보상인 대현자의 해금이 어째서 갑작스럽게 지금 이루어진다는 것인가.
하지만 상황을 이해할 새도 없이 수많은 변화가 그에게 닥쳐왔다.
“…윽.”
시야가 뒤틀린다. 녹색, 붉은색, 파란색. 세상이 여러 가지 색으로 뒤바뀌며 분열과 결합을 연속적으로 반복했다.
툭, 투둑.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바닥에 주저앉자, 눈코입을 막론하고 시뻘건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마도사』
인지(認知)를 초월한 자.
순리(順理)를 부정하며 왜곡하는 자.
이치(理致)를 만들어내는 자.
우리는 그를 경외하며 더 큰 이름으로 부를지니.
흘러나오는 피를 뱉으며 멍하니 고개를 들자, 대마도사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진짜?”
하지만 변화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파아아앗-!
하늘이, 열린다.
눈부신 빛줄기가 이쪽으로 떨어져 내리며 자신을 감쌌다.
그 안에서 포근함과 따뜻함을 느낌과 동시에 온갖 상처들이 사라졌고, 수많은 가호와 버프가 빈 공백을 가득 채웠다.
“…이건.”
익숙한 이펙트의 형태였다.
초월지경에 이르면 월드 전역에 메시지가 나타남과 동시에 그 캐릭터에 이런 형식으로 휘장이 떠올랐었다.
직접 두 눈으로 보는 그 모습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장엄함을 풍겼다.
[현상의 개변을 시작합니다.]
[대현자의 능력이 현자의 눈을 진화시킵니다.]
[대현자의 눈을 획득하셨습니다.]
대현자의 눈을 얻었다는 말과 함께 시야가 확 트였다.
말 그대로 흐름이 눈에 들어왔다.
비단 마나의 존재만이 아니라, 삼라만상의 온갖 것이 제 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존재를 환영해오는 것 같았다.
-그런…….
그 갑작스러운 현상은 드래곤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인지 벨라시온은 멍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꽈아악.
손을 꽉 쥐자 이전보다 더 강한 힘이 그 안에서 꿈틀거렸다.
“이러면 할 만하지.”
이진한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는 현자 클래스로 초월지경에 오르지 못했을 뿐 다른 캐릭터로 이미 그 경지를 경험한 바 있었다.
그러니, 처음 대마도사가 되었다고 헤맬 일은 당연히 없었다.
웅웅웅-.
힘껏 펼친 손 위로 기하학적인 마법진이 나타나자, 이때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마나의 양이 뭉텅이로 빠져나가며 초월 마법의 시작을 알렸다.
“초월 마법-”
그리고, 그 이름을 내뱉을 찰나.
벨라시온은 돌연 본체에서 인간의 형태로 다시 폴리모프를 했다. 그러곤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그 앞까지 다가와 물었다.
“…네가 당대의 용사라고?”
용사.
벨라시온이 내뱉은 그 단어에 이진한은 잠시간 신경을 빼앗겼다.
‘…설마 하늘에서 내리쬐는 이펙트를 보고 신의 계시니 뭐니, 착각한 건가?’
실제로 그녀는 이 일대를 뒤덮었던 초월 마법 흑염지옥을 해제하고, 심지어 인간 형태로 폴리모프를 한 뒤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래, 처음부터 이상했어. 평범한 필멸자로서 감히 수호자인 우리와 대적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지. 하지만 그 안에 용사의 운명을 품고 있다면….”
무언가를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긴 듯싶더니, 이내 고개를 번쩍 들며 그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인간의 아이야. 검을 거두고 예의를 표해라.”
벨라시온은 제 한쪽 팔을 쭉 뻗으며 로브 자락을 펄럭였다. 이미 추한 모습을 한껏 보였지만, 이제라도 위엄을 세우려는 듯 근엄한 표정까지 지어 보인 모양새였다.
“나는 중간계의 수호자, 블랙 일족의 벨라시온이니. 앞으로 네가 갈 여정의 나침반이 되어주리…….”
“좆까는 소리 하네.”
이진한은 마저 영창을 끝내며, 마법의 보조를 위해 인벤토리에서 꺼낸 스크롤 다발을 망설임 없이 찢어버렸다.
“내리쳐라, 영원의 번개여.”
대마도사 클래스 초월 마법
「인피니트 라이트닝」
단 한 번의 마법에 삼분지 일에 달하는 마나가 뭉텅이로 빠져나갔다. 하지만 초월 마법인 이상 그 위력은 확실한바. 곧 그들의 위로 시커먼 먹구름이 모이며 하늘을 가리기 시작했다.
“이건?!”
이진한이 발동한 마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본 벨라시온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곤 당황하는 눈치로 다시 한번 팔을 휘저으며 다급한 태도로 그에게 말해왔다.
“아이야, 마법을 거둬라! 나는 네 적이…!”
“용사고 나발이고.”
퉤.
이진한은 언제 들어가 있었는지 모를 입안의 모래를 뱉어내며 스펠 브레이커와 함께 인벤토리에서 꺼낸 용살검을 꺼내 그 자루를 굳게 쥐었다.
“나한테 기회를 주면 안 됐어.”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시퍼런 낙뢰가, 지상을 향해 내리꽂혔다. 그 위력은 이전에 보였던 용아청성창의 전용 스킬인 만운천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규모였으니.
“꺄아아아아아아아악-!”
영원의 번개가 벨라시온의 머리를 강타했다.
마치 폭탄이 터진 것 같은 커다란 광음과 함께 눈부신 스파크가 튀어 올랐지만, 떨어진 낙뢰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중심으로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더 요란스럽게 몸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초월, 마법…….”
벨라시온은 자신의 몸을 지지는 것이 초월 마법인 것을 깨달았는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경악성을 토해냈다.
“알아차리는 게 늦었어.”
쐐애애애액-!
스펠 브레이커 위로 피어오른 오러 블레이드가 맹렬한 기세로 허공을 갈랐다.
“…윽!”
벨라시온은 다급히 무언가를 말하려 하는 듯 입을 벙긋했으나, 이진한의 검은 이미 그녀의 목을 사정없이 베어 가른 후였다.
서걱-.
벨라시온의 머리는 허공을 날아가면서도 두 눈을 크게 뜬 채 경악을 토해냈고, 이내 그것은 분노로 뒤바뀌었다.
“감히……!”
파아아앗-!
인간의 형태가 무너짐에 따라 폴리모프가 강제로 해제되었다. 곧 블랙 드래곤의 본체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녀는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피를 토해내며 절규를 내뱉었다.
-크아아아아아아-!
인피니트 라이트닝은 여전히 그녀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드래곤은 마법 저항력이 높았지만, 초월 마법에 괜히 초월이란 이름이 붙은 게 아니다.
그렇기에 그는 다시 한번 손을 뻗어 올렸다.
“초월 마법.”
비어버린 마나는 엘릭서로 대체했고, 스크롤 역시 무더기로 꺼내 들었다.
어차피 전부 소모품으로 나중에 다시 채워 넣으면 된다. 더욱이 대마도사 클래스에 올랐으니 좀 더 높은 등급의 아이템을 만들어낼 수 있을 터. 모두 벨라시온만 쓰러뜨린다면 해결될 이야기였다.
“[진홍의 보옥]”
대마도사 클래스 초월 마법
「진홍의 보옥」
곧 하늘을 뒤덮었던 시커먼 구름이 걷히고 그 뒤로 새빨간 태양이 떠올라 우리를 비추었다.
-윽……!
벨라시온은 거칠게 마나를 뿜어내며 겨우 인피니트 라이트닝을 떨쳐냈다. 하지만 그 위로 이미 다른 초월 마법의 발동이 지척에 다다라 있었다.
-같은 수법에 또 당할 것 같으냐!
벨라시온 역시 더는 좌시하고만 있지 않았다.
쿵.
그녀의 주위로 수십 개의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진 마법진이 떠올랐다.
이쪽과 같은 초월 마법으로, 메마른 마경의 대지 위로 울창한 수풀과 하늘을 뒤덮을 듯 거대한 나무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으니.
쿠구구구구궁-!
그것들은 이내 떨어져 내리는 태양을 지지하며 힘의 관계를 반전시키기 시작했다.
‘과연, 드래곤.’
순식간에 울창한 숲을 만들어내는 초월 마법 따위는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하지만 진홍의 보옥에 이목을 빼앗긴 그 부분까지가 이진한의 노림수였다.
쐐애애애액-!
그는 초월 마법의 발동을 끝마침과 동시에 땅을 박찼다. 시커멓게 죽어버린 대지를 질풍처럼 가르며 단숨에 그 앞까지 쇄도하니, 벨라시온은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
서로 한계까지 쥐어짠 싸움의 연속이었다.
이진한은 엘릭서를 비롯해 여러 가호로 어느 정도 회복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지친 상태였다.
초월 마법의 연발은 아무리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무리였던 것인지 그의 기습적인 접근에 반응이 살짝 늦었다.
촤라라라라락-!
그야말로 찰나라고 할 수 있던 시간. 벨라시온은 황급히 제 앞으로 수십 겹의 베리어를 만들어냈지만, 이전과 같은 단단한 강도는 없었다.
“흡-!”
이진한은 왼손에 힘을 가득 불어넣었다. 그러곤 스펠 브레이커를 힘껏 내던지자 앞을 가로막던 베리어들이 속절없이 부서져 나갔다.
-아이야, 멈추어라! 너는 지금 큰 실수를……!
맨몸이 드러난 벨라시온은 울컥 피를 토해내면서도 필사적으로 이쪽을 만류해왔다.
“설령 내가 진짜 용사라고 해도-.”
이진한은 씩 웃으며 두 손으로 용살검의 자루를 쥐었다.
“일단 네 모가지는 따고간다.”
쐐애애애액-!
용살검이 흉악스럽게 몸부림치며 그 목에 날카로운 이빨을 박아 넣었다.
이윽고 블랙 드래곤의 시커먼 비늘을 뚫은 검이 그 피륙마저 찢었고, 이내 용살검은 벨라시온의 목을 베어냈다.
-……!
벨라시온은 끝까지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으나, 단 한 순간 보인 틈은 이미 그녀의 운명을 결정지은 뒤였다.
쿵-.
목이 잘려 나간 블랙 드래곤의 사체가 떨어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주변을 뒤덮었던 초월 마법인 울창한 삼림 역시 신기루처럼 스르르 사라져 버렸기에, 이진한은 떨어져 내리던 진홍의 보옥을 캔슬해버렸다.
“…….”
전장이, 적막에 잠겼다.
오직 벨라시온이 쓰러지며 피어오른 자욱한 먼지만이 그 위에서 퍼져나갈 뿐이었다.
이진한은 한동안 용살검을 움켜쥔 채 경직된 자세로 목이 잘려 나간 녀석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음흉하기 짝이 없는 놈이었다. 그러니 제 죽음을 가장해 기습해오거나, 도망갈 수 있었으니 한동안 경계를 거두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뒤, 눈앞으로 기다렸던 알림이 떠올랐다.
[Lv.2785 블랙 드래곤 벨라시온을 처치했습니다!]
“후우…….”
뒤이어 처치 보상으로 얻은 아이템들이 차곡차곡 인벤토리에 쌓이기 시작했다.
“오.”
이번 역시 운 좋게 드래곤 하트를 얻을 수 있었다. 천천히 살펴보니 이천 년을 넘게 산 드래곤인 만큼 막대한 기운을 품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하하.”
해냈다.
그런 성취감을 느낌과 동시에 이진한은 천천히 뒤로 쓰러져 내렸다.
더는 서 있을 힘도 없었다.
대마도사에 올랐다곤 하나, 아직 그 직후일 따름이다. 연이은 싸움에서 무리하게 초월 마법을 두 발이나 갈겨버린 탓에 정신력 쪽은 이미 바닥을 치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엘릭서를 한 병 더 마실까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것에는 정신력을 회복시켜주는 능력까진 없어 그냥 내버려 두었다.
“…날씨는 더럽게 좋네.”
이때까지의 싸움 탓인지 이 주위에는 평상시 사방을 뒤덮고 있던 뿌연 기운이 말끔하게 사라진 상태. 누운 상태로 하늘을 올려다보자 마경답지 않게 청명한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도마뱀 새끼. 까불더니 꼴좋다.”
[「메인 퀘스트」 ─ ∑드래곤 슬레이어 달성]
눈앞에 떠오른 상태창의 메시지와 함께 드래곤 사냥은 끝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