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1.
냉정한 판단을 내리자면 피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그 뒤쪽, 브레스가 쏘아지는 궤적엔 벨데르가 있지 않은가.
그곳에는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을 비롯해 이쪽을 돕기 위해 기꺼이 도시에 남은 이들이 있었다.
만약 자신이 이대로 벨라시온의 브레스를 피해낸다면, 그들은 도시와 함께 소리소문 없이 소멸하는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
“…시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을 죽게 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나지막한 욕지거리를 내뱉은 뒤 그는 땅 위로 두 발을 강하게 내디뎠다.
화아악-!
팔라딘 클래스의 스킬인 대천사의 가호가 날개처럼 피어올라 그의 전신을 감쌌다. 그 뒤를 따라 수많은 버프와 가호가 중첩되었고, 끝으로 전설 등급의 방패인 아이기스를 꺼내 땅에 박아 넣었다.
‘사용할 수 있는 건 전부 사용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레벨과 스펙이 있는데 한 번에 즉사하진 않으리라.
이진한은 마음 밑바닥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애써 무시하며 힘껏 아이기스 위로 힘을 실었다.
콰아아아아앙-!
칠흑을 품은 브레스가 그를 향해 쏟아졌다.
마치 거센 해일이 몰아치는 듯한 충격이었다. 단 한 번의 격돌에 온갖 버프와 가호가 순식간에 깎여 나갔고, 대천사의 날개 역시 그 끝에서부터 마모되어 으스러지기 시작했다.
“크윽…….”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아이기스의 끝을 땅에 박아 넣은 채 고정했지만, 브레스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 그 상태로 질질 끌리며 밀려날 정도였다.
팔라딘 클래스는 거의 모든 클래스 중 최강의 방어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드래곤의 브레스를 정면으로 막아내는 것은 만용이었던 것 같았다.
파직, 파지직-.
성물이라는 칭호까지 붙어 있는 아이기스의 위로 자그마한 균열이 번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이내 걷잡을 수 없이 퍼지더니 이내 그 전체를 뒤덮었다.
콰직.
아이기스에 균열이 일어났을 때, 그가 착용하고 있던 무장 역시 하나둘씩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부서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투구가 날아갔고, 그다음 견갑, 장갑, 상의, 하의, 각반…….
대(代)드래곤 전용으로 세팅했던 장비가 모조리 브레스에 휘말려 파괴되어갔으니, 그 위력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스르륵-.
벨라시온의 브레스는 이진한의 HP가 절반이 조금 더 넘게 날아갔을 때가 돼서야 겨우 끝이 났다.
“하…….”
사방을 뒤덮으며 찢어발기던 칠흑의 나선이 사라지자 온몸을 덮치던 막대한 압박감이 해소되었다.
진한 탈력감이 전신을 아우르자 그는 비틀거리다 못해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쉬이익.
몸 위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진한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자신이 서 있던 곳을 제외한 모든 땅이 시커멓게 변해 사지(死地)로 변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과연, 대단한 담력이다. 감히 내 브레스를 정면에서 막아낼 생각을 하다니.
브레스를 뱉어낸 뒤 잠시 숨을 고르던 벨라시온은 드래곤 킬러의 여파로 만들어진 크레이터 한가운데서 몸을 일으켰다.
이진한이 만신창이가 된 것처럼 벨라시온 역시 정상은 아니었다.
위엄 넘치던 한 쌍의 날개는 사정없이 찢겨나가 그 형태의 절반도 채 남아 있지 않았고, 온몸을 뒤덮던 매끄러운 검은 비닐들은 여기저기 움푹 파이고 부서져 제 모습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알았겠지. 격의 차이를.
하지만 그 샛노란 눈동자만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한 분노를 품은 채 이진한을 노려보고 있었다.
툭.
그는 엘릭서를 한 병 시원하게 비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모된 HP와 마나가 순식간에 회복된다. 지친 정신이나, 몸을 아우르고 있는 탈력감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지만, 싸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같잖은 소리 말고 빨리 회복 마법이나 써. 다 디스펠 해줄 테니까.”
아직 싸움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이진한이 그런 의지를 담아 도발적인 시선을 보내자, 벨라시온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인간의 아이야, 너희 필멸자와는 달리 우리는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다. 찰나의 현상을 개변하는 마법 따위가 우리에게 개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호오?”
처음 듣는 이야기에 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간 곰곰이 생각해보니 확실히 드래곤들은 다른 몬스터와는 달리 자체적으로 체력을 회복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못했던 것인가.’
마법 내성이 강해 자신의 마법을 적용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 다른 연유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왜 이렇게 당당하게 해주지?”
중요한 것은 이쪽이 얼추 회복을 끝마쳤다는 것이었다.
아직 완전히 정상은 아니었으나, 벨라시온에 비해 양반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진한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여흥은 이 정도로도 충분하니 말이다.
“자만하다가 처맞고 그 꼴이 됐으면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그가 이죽거리며 한심스럽다는 시선을 날리자, 벨라시온은 더 이상의 말장난은 하지 않겠다는 듯 제 기세를 맹렬하게 부풀렸다.
“후우…….”
이제는 준비한 함정도, 외부의 조력도 없다.
순수하게 자신의 실력으로만 싸워 녀석의 목을 베어야 했다.
솔직히 가능만 하였다면 드래곤 킬러를 수십 발이고 때려 박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그 또한 구하기 힘든 것으로, 그나마 가지고 있던 두 개도 현자 길드의 길드장이라는 이유 덕분이었다.
쉬이이이익─!
곧 지상을 향해 수많은 마법이 내리꽂히며 본격적인 싸움이 재개됨을 알렸다.
이진한은 지체하지 않고 땅을 박찼다. 그러자 그가 달려 나간 경로를 따라 마치 미사일이 꽂히듯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장비는, 마법 저항력이 높은 걸로!’
그가 입고 있던 드래곤 전용 장비는 조금 전의 브레스에 의해 전부 파괴되었다.
그렇기에 땅을 박차고 앞으로 쇄도하며 순식간에 대마법전의 장비로 바꾸어 착용했다.
-언제까지 그리 도망만 다닐 수 있을까.
벨라시온의 손짓에 따라 시뻘건 불꽃 무리가 기다란 궤적을 그리며 이진한의 뒤로 따라붙었다.
요리조리 방향을 틀어보아도 끈질기게 쫓아오는 것이 유도탄 같은 성질을 지닌 듯했다.
“…그렇다면.”
그는 돌연 도망치던 것을 멈추며 몸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로브 밑자락에서부터 한 자루의 검을 뽑아 들었으니.
날이 물결치며 마치 가시처럼 삐죽 솟아오른 기묘한 형태였다. 마법을 베어 가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무구, 스펠 브레이커였다.
“흡-!”
웅웅-.
스펠 브레이커가 주인의 의지에 공명하며 제 능력을 발휘했다.
꼬리로 따라붙던 불덩이 정도야 손쉽게 베어 가른바. 이진한은 땅을 박차 기습적으로 벨라시온에게 쇄도했다.
-또 기묘한 술수를!
스펠 브레이커 위로 막대한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쳤다. 벨라시온은 이미 경계하고 있던 듯 그 앞에 수없이 많은 숫자의 배리어를 만들어냈다.
쿠구구구구궁-!
하지만 스펠 브레이커는 제 이름에 걸맞은 위력을 발하며 그것들을 사정없이 부숴나갔다.
그렇게 얼마 남지 않은 배리어의 위에서 이진한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까 이렇게 열심히 막아보지.”
-놈……!
그 이죽거림에 벨라시온의 눈동자 위로 불꽃이 튀었다.
쿵.
동시에 녀석은 크게 발을 한 번 굴렀다. 그러자 그 밑으로 거대한 마법진이 생겨나며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마법이 시작됨을 알려왔다.
‘이건……!’
상식을 뒤트는 마나의 흐름.
대마도사 클래스의 초월 마법이었다. 보통이라면 그것을 발동하는 데에 긴 시간이 걸리겠으나, 과연 마법의 종주인 드래곤이라는 것을 입증하듯 초월 마법은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대마도사 클래스 초월 마법
「멸염지옥(滅炎地獄)」
이 일대가 말 그대로 지옥이 되었다.
보통은 울긋불긋한 불꽃이 피어오르는 불바다가 되기 마련이지만, 블랙 드래곤 특유의 마나 때문에 그런 것인지 시커먼 흑염이 솟아나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림자 순신」
이진한은 황급히 그림자로 몸을 휘감았다.
조금이라도 저 불꽃에 닿는다면 순식간에 휘말려 버릴 터.
그렇기에 어쌔신 클래스의 이동 스킬로 멸염지옥의 영역 밖으로 벗어나려 했지만, 초월 마법은 스킬로도 완전히 피해내기 힘든 것이었다.
우당탕탕!
그는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직후, 몇 바퀴나 바닥을 굴렀다.
“…큭!”
흑염의 잔재가 로브의 끝자락에 붙어버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직후 황급히 물의 정령을 소환해 흠뻑 젖을 정도로 물을 들이부었으나, 그것은 멸염이라는 이름답게 대상을 전부 소멸시킬 때까지 꺼지지 않는 불꽃이었다.
거칠게 로브를 뜯어 벗어버리자, 이진한이 받는 온갖 가호와 버프의 제외 대상이 되어버린 그것은 순식간에 불타버려 재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
“…몸에 닿으면 망설임 없이 잘라내야겠는데.”
만약 팔이나 다리에 그 불꽃이 번졌더라면 어찌 됐을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어 절로 모골이 송연해졌다.
“마법만 사용할 수 있었다면…….”
새로이 로브를 착용한 이진한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현자의 장기는 다채로운 클래스에서 기인해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연환계였다.
보통의 상대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속절없이 밀려났겠으나, 상대는 성룡 급의 드래곤이었다.
대마도사 클래스는 기본으로 탑재하고 있다. 거기에 검술이나 다른 분야의 기술로도 자신에게 밀리는 것이 없었으니. 어찌 보면 현자의 상위 호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쪽이 먼저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했던 것처럼 곧바로 디스펠당해 애꿎은 마나만 소비할 터.
‘최후의 방법은…….’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시간 한정의 제약이 달린 능력, 가령 광전사 클래스의 광폭화를 비롯해 기사회생, 회광반조 같이 뒤가 없는 한정 스킬들을 모조리 사용해 짧은 시간 동안 승부를 본다면 이길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정말로 도박수에 가까웠다. 까딱해서 실패라도 한다면 정말로 뒤가 없었다.
“그런 상황이 온다면 차라리 도망치고 말지.”
스스스스-.
초월 마법이 일으킨 현상의 개변은 쉬이 잠들지 않았다. 여전히 그 일대는 흑염의 지옥으로 뒤덮인 상황. 그 가운데 오롯이 서 있던 벨라시온은 큰 웃음을 토해냈다.
-더욱 발버둥 쳐라! 그리해야 조금이라도 더 그 비루한 목숨을 연명할 수 있을 테니!
“…….”
이진한은 도발에 대답하지 않은 채 조용히 스펠 브레이커를 들었다.
‘생각해라. 어떻게 헤쳐나갈지.’
현자 클래스의 랭킹 1등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의 가장 큰 이유는 유연한 사고가 아니었던가.
온갖 스킬과 장비의 리스트를 눈앞에 띄워놓고, 벨라시온이 허용한 잠시간의 방심을 틈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소드 마스터나 마도사 클래스 둘 중 하나라도 초월지경에 이르렀다면, 눈앞의 드래곤 정도는 어렵지 않게 쓰러뜨릴 수 있을 텐…….’
[마도사 클래스의 경험치가 충족되었습니다.]
[현자 클래스의 개변이 시작됩니다.]
[대현자 클래스가 해금되었습니다.]
“…데?”
갑작스러운 상태창의 알림에 이진한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