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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0화 (10/210)

◈ 010.

현자의 싸움은 다채로웠다.

검을 들고 있다고 해서 그것만 고집하지 않았다. 시시각각으로 수단과 방법은 바뀌었고, 그야말로 천변만화(千變萬化)의 향연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캉-!

오러 블레이드의 궤적이 막히며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이진한의 왼손에는 어느새 꺼내들었는지 모를 푸른 창이 쥐어져 있었으니.

창끝을 하늘을 향해 세우자 이내 시퍼런 낙뢰가 허공을 찢어발기며 한 점으로 내리꽂혔다.

용아청성창 전용 스킬 「만운천뢰(萬雲天雷)」.

만상이 진동하고, 파괴되어 비산 했다.

싸움은 일방적인 양상이었다.

벨라시온은 필사적으로 정신을 가다듬으며 이진한을 공격하려 했지만, 약효가 절정에 달한 것인지 몇 발자국 채 움직이지 못하며 연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읏…!”

가까스로 그의 공격을 막아낼 때마다 뜨거운 숨이 섞인 신음이 내뱉어진다. 이진한은 다시금 용아청성창을 들어 올리며 만운천뢰를 사용할 찰나, 귓가를 파고든 그 야릇한 소리에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자꾸 이상한 소릴 내니까 기분이 이상해지는데.”

“애초에 네놈이 원인이지 않으냐!”

벨라시온은 수치에 몸부림치며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외쳤다.

어지간한 독이라면 인간 형태의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효과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흑백쌍린에 발라져 있던 것은 그가 특별히 준비한 약품이었다.

원액을 농축시켜 몇 배, 아니 몇십 배나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었으니 아무리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버티기 힘들었다.

“버티기 힘들면 폴리모프를 해제하라니까.”

“필요 없다!”

그놈의 자존심이 무엇인지 벨라시온은 드래곤의 위엄을 보이려는지 궁지에 몰리는 와중에도 끝내 폴리모프를 해제하지 않았다.

‘조금 더 세게 가볼까.’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이쪽이 유리한 일방적인 양상이었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했다.

용살검이 효과를 보려면 녀석이 본체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렇다면 이 상태에서 더는 버틸 수 없다는 위기감을 녀석의 머리에 때려 박아줘야 했다.

촤르륵-.

그가 선 땅의 뒤로 수많은 무기가 소환되어 자리 잡았다.

용아청성창을 시작해 흑백쌍린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종류의 컬렉션들이 하나 같이 자기를 사용해달라며 날카로운 이빨을 빛내고 있었다.

“버틸 수 있으면 더 버텨 봐.”

툭.

이진한은 그중 하나를 뽑아 들며 벨라시온에게 웃어 보였다.

***

벨라시온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모든 종족 가운데 정점에 선 드래곤인 자신이 고작 인간 한 명에게 농락당하다니.

물론 상대의 강함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 앞에서 주눅 들지 않을 정도라면 분명 인간 중에서도 수위로 꼽을 수준일 터.

면전에서 모욕을 내뱉고, 마법을 봉인하는 결계를 친 것도 웃으며 넘길 수 있었다.

본디 약한 존재들은 살아남기 위해 무리를 짓고 힘을 모으기 마련이었으니.

그렇다 한들 언제나 그랬듯 자신의 날갯짓 한 번에 지금껏 그들이 쌓아온 모든 것들과 함께 휩쓸려 날아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의 인간은, 눈앞의 존재는 무언가 달랐다.

지닌 힘도 예사롭지 않지만, 정말로 경계해야 할 것은 간교한 술수와 요사스러운 혓바닥이었다.

‘단 한 번도, 단 한 순간도 내 뜻대로 된 적이 없다.’

인사를 가장한 기습.

그것은 벨라시온이 자주 써먹던 수법이었다.

대체 어느 존재가 드래곤이 기습하리라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쪽에서 먼저 그러한 태도를 보여 오면 상대 역시 정중히 받아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가짜였고, 오히려 한 방 먹은 것은 자신이었다.

본격적인 치욕은 그 이후부터였다.

무슨 술수를 부린 것인지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충동이 그녀의 뇌리를 흔들었다.

몸이 달아오르고, 피가 빨라지고, 시야가 좁아진다. 마법을 사용하고 싶어도 이곳을 가두고 있는 결계와 빨라진 피의 흐름이 이성적인 판단을 가로막고 있다.

종래엔 녀석의 공격에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을 뿐.

벨라시온은 한계에 다다랐다.

충동을 억누르고 있던 이성을 던져버리고, 당장이라도 저 눈앞의 남자를 덮쳐 이 욕구를 해소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꾹 눌러 참았다.

드래곤으로서의 위엄.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그녀에게 있어 중요한 것이었다. 유희 생활을 즐기는 중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자신이 그럴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 모든 생각은 하나의 결말로 귀결되었다.

쿠구구구구구궁─.

폭풍과도 같은 기세가 일어나 사방을 짓눌렀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중압감과 함께 그녀의 전신에서 일어난 검은 마나가 해일처럼 주위를 덮치며 휩쓸어나갔다.

인간의 형태가 무너져 내린다. 뒤이어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녀 본연의 형태. 광택이 흐르는 시커먼 비늘이 전신을 뒤덮고, 그 몸은 수십, 수백 배는 더 커다란 규모로 부풀려졌다.

-인간의 아이야.

블랙 드래곤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칠흑을 품은 비늘 사이로, 한 쌍의 샛노란 눈동자가 만상을 꿰뚫어 보았다.

-너는 잘못된 선택을 하였느니라.

블랙 드래곤 벨라시온.

그 거대한 본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

“거, 진짜로 비싸게 구네.”

벨라시온은 무참하게 두들겨 맞던 끝에 더는 버티기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폴리모프를 해제했다.

과연 2천 레벨의 드래곤.

본체로 돌아갔으니 이제 그 몸에서 맴돌던 약효는 가뿐히 사라져 버렸을 터. 이제부터는 한 치의 방심도 허용되지 않는 찰나의 싸움이었다.

펄럭-.

벨라시온은 제 날개를 움직여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칼날 같은 바람이 일어나 지상을 찢어발겼지만, 이진한은 입고 있던 로브의 자락을 끌어올린 것으로 어렵지 않게 그것을 막아냈다.

“무지막지하네.”

단순히 날갯짓만으로도 온몸이 들썩거릴 정도의 충격이었다.

녀석이 인간 형태일 당시 입혔던 상처들은 이제 생채기에 불과해졌을 터. 하지만 그 평정심을 흐트러트리기엔 충분했을 것이다.

찌이이이익-!

벨라시온이 하늘로 날아오르며 제 기운을 내뿜자 안티 매직 쉘이 무참히 찢겨나갔다. 아무래도 마도사들로는 전력을 드러낸 드래곤의 기운을 버티기에는 무리였을 테다.

웅웅웅웅-.

이 구역을 감싸고 있던 결계가 무력화되자, 벨라시온은 콧김을 내뿜으며 단번에 수십 가지의 마법을 허공에 발동시켰다.

그 하나하나가 모두 고위 마법으로, 상대하는 입장에선 식은땀이 절로 흘러나오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진한은 모두 예상했던 상황인 듯 태연한 모습으로 준비했던 스킬을 사용했다.

“[딜레이 샷]”

보우 마스터의 스킬, 딜레이 샷.

말 그대로 쏘아 보낸 화살을 잠시간 붙들어 원하는 때에 다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곡예와도 같은 스킬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드래곤을 상대하는 만큼 그 화살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으니.

스르륵-.

벨라시온의 머리 위, 한참 더 높은 상공.

드래곤조차 감지하지 못할 높이에서 머무르고 있던 거대한 두 줄기의 말뚝을 묶고 있던 구속력이 그 말에 호응해 풀려나갔다.

-……!

벨라시온 역시 그것을 눈치챘는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쉬이이이이익-!

거대한 말뚝이 마치 유성처럼 무지막지한 기세로 이쪽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 이름만 하더라도 「드래곤 킬러」라 불리는 대(代)드래곤 전용 결전 병기로, 용살검과 마찬가지로 용족 대상으로 추가 데미지를 입힐 수 있는 특수성 일회용 무구였다.

「드래곤 킬러」는 말뚝이라 칭했지만, 공성추와 닮은 형태였다.

이윽고 그것은 육안으로 보일 정도까지 이곳에 가까워져 왔다.

-같잖은 술수를!

벨라시온은 자신의 앞으로 수십 겹의 배리어를 쳤지만, 이진한 역시 그것을 두고만 보지 않았다.

“흡-!”

배리어는 외부의 공격을 막아내는 마법.

그러는 만큼 필연적으로 안쪽에서의 타격은 약했다.

기합성과 함께 그가 전력으로 검을 휘두르자, 시퍼런 오러 블레이드가 길게 이어지며 벨라시온 앞에 생겨난 배리어를 사정없이 깨부쉈다.

-텔레포……!

“[디스펠]”

아무리 탑 랭커라 할지라도 드래곤의 마법을 완벽하게 디스펠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 술식의 일부를 지워버리는 것은 어렵지 않은바. 텔레포트 같은 예민한 마법이라면 축을 하나 망가뜨리는 것만으로도 와해시킬 수 있었다.

픽-!

마법진 위로 스파크가 튀며 텔레포트 마법이 어그러졌다. 그러자 벨라시온은 경악한 듯 두 눈을 크게 뜨며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고작 인간 주제에 소드 마스터와 동시에 마도사의 경지를 이루었다고?!

자신의 마법을 없앤 힘이 아티팩트나 무언가에 의존한 술수가 아니라 그 본연의 힘이라는 것을 단번에 꿰뚫어 본 듯했다.

“고작 두 개로 놀라기엔 이른데.”

-크윽…….

무지막지한 기세로 떨어져 내리는 드래곤 킬러가 지척에 이르자, 벨라시온이 다급해졌다.

아무리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저것에 직격당하면 치명상을 피하지 못하리라 깨달은 것일 터. 그렇기에 황급히 자리를 벗어나려 했으나, 이진한은 씩 웃으며 다시 한번 손을 들었다.

“속박해라, 망자들이여.”

「심연의 얽매임」

네크로맨서 클래스의 최상위 스킬이었다.

수십 가닥의 사슬이 바닥에서 솟구치며 벨라시온의 몸을 옭아맸다.

네크로맨서 클래스의 최상위 스킬답게 심연의 얽매임은 시전자의 마나가 받쳐주는 동안은 제한 없이 계속해서 상대의 몸을 구속할 수 있었다.

-나와 힘 싸움이라도 해보자는 것이냐!

물론, 그것을 꿰뚫어 본 벨라시온은 코웃음을 치며 마나를 끌어올렸다.

곧 어둠을 품은 시커먼 마나가 사슬을 때렸고, 그것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출렁거렸다.

“…윽.”

마나가, 뭉텅이로 빠져나갔다.

전신을 휘청거리게 할 정도로 막대한 탈력감이 느껴짐과 동시에 현기증까지 찾아올 정도였다.

이대로 간다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마법이 풀릴 터.

하지만 이진한은 미소를 거두지 않으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건!

“뭔지 알지? 네 절반도 살지 못한 새끼용이긴 한데, 그래도 성룡 급인 이상 몇 초 정도는 더 버틸 수 있겠지.”

그 손에 들린 것이 동족의 심장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벨라시온이 두 눈을 부릅떴다.

이진한의 인벤토리에 잠들어 있던 드래곤 하트 중 하나였다.

본디 드래곤 하트는 무기의 제작이나 강화에 사용되기에 직접 그 안의 마나를 뽑아내는 사용 방법은 비효율적이었지만 지금은 그만한 배터리가 없었다.

[필리오스의 드래곤 하트를 사용합니다.]

드래곤 하트에 내장되어 있던 마나가 시뻘건 빛을 발하며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곧 이진한의 의지를 따라 벨라시온의 몸을 속박하고 있던 사슬로 스며들었고, 그 얽매임의 연결을 강화했다.

본디 천 년을 살아온 드래곤과 이천 년을 살아온 드래곤의 대결은 성립조차 되지 않는 일방적인 구도일 테지만, 이쪽은 말 그대로 몇 초만 버티면 되었다.

쿠우우우우웅-!

마침내 닥쳐온 드래곤 킬러가 벨라시온의 몸에 부닥쳤다. 녀석은 최대한 몸부림치며 저항했지만, 거대한 질량과 무지막지한 힘을 품은 드래곤 킬러는 이내 못을 박아버리듯 그녀의 몸과 함께 지상에 박혀 들었다.

“…….”

자욱한 먼지와 함께 큰 지진이 사방을 휩쓸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크나큰 크레이터가 생겨났고, 벨라시온은 그 모습조차 보이지 못한 채 땅 밑으로 깊숙이 파묻히고 말았다.

“후, 괜히 길드전 때 공성 무기로 사용되는 게 아니네.”

사용하기 힘들어서 그렇지, 제대로만 위력을 보인다면 설사 강철을 두른 벽이라 할지라도 단숨에 꿰뚫어버리지 않았나.

[빅 프로그를 처치하셨습니다.]

[나이트 스콜피온을 처치하셨습니다.]

...뒤이어 수많은 알림이 눈앞에 어지러이 차올랐다.

보아하니 조금 전의 여파로 땅 밑에서 잠자고 있던 마물들이 압사당한 듯하다. 하지만 그 알림의 끝에는 그가 원하는 내용의 메시지가 없었다.

“…역시 드래곤 킬러라 해도 한 번에 죽이는 건 무린가.”

이진한은 필드 위에 놓인 무기들을 전부 회수하고, 용살검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벨라시온의 숨통을 끝내기 위해 크레이터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찰나.

쿠우우우웅-.

“…어.”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 뒤로, 막대한 마나가 모여들었다. 벨라시온이 또 무언가 마법을 사용하려는가 싶어 디스펠을 준비했지만, 아쉽게도 녀석이 사용한 것은 마법이 아니었다.

후우우우욱-!

먼지를 비롯한 모든 것이 벨라시온의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뒤로 드러난 것은 감히 대적할 생각조차 못 하게 하는 막대한 기운의 응집이었으니.

-여흥은 이제 끝이다. 도시와 함께 지워주마.

이진한은 그것을 보며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이건 상정에 없었는데. 좆됐네.”

곧 벨라시온의 브레스가 천지간에 작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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