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9.
「메인 퀘스트」 ─ ∑드래곤 슬레이어
◈ 사흘 후, 벨데르를 습격해 반파시킨 악룡(惡龍)의 공격이 예정되어 있다. 악룡과 싸워 승리하고, 마경의 도시, 벨데르를 지키시오.
보상: ‘99시간의 유예’, ‘클래스 【대현자】의 해금’
해가 중천에 떠오른 시각.
이진한은 벨데르를 빠져나와 그 앞에 펼쳐진 허허벌판에 홀로 자리했다.
【03:27:12】
남은 시간은 세 시간 남짓.
즉, 그 안에 드래곤을 쓰러뜨려야 다음 에피소드로 나아갈 수 있다는 소리였다.
“살짝 아슬아슬할 것 같은데.”
그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저 너머의 공간을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거리에서부터 커다란 기운을 지닌 존재가 빠른 속도로 이곳을 향해오고 있었다.
“후.”
이진한은 짧게 숨을 내뱉은 뒤, 아마 마지막이 될 점검을 끝마쳤다.
사방에 깔린 온갖 마법과 트랩, 그리고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는 조력자들까지. 상대가 상대인 만큼 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전부 준비해두었다.
이렇게 하고도 쓰러뜨리지 못한다면 엘레오노라와 미르엘만 챙겨서 냅다 도망칠 생각이었다.
쉬이이이익-.
거센 광풍이 벨데르를 휩쓴다. 그와 동시에 하늘 높이서 시커먼 한 쌍의 날개를 펄럭이며 내려오는 한 존재가 있었다.
흑단처럼 시커먼 비늘, 허공을 날카롭게 찢으며 휘둘러지는 기다란 꼬리까지.
마치 도마뱀을 닮은 외형이었지만, 그 전신에서 뿜어지는 기세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맹한 것이었다.
“…더럽게 크네.”
이진한은 단순히 그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저릿저릿해져 옴을 느꼈다.
파아앗-!
돌연 눈부신 빛이 허공에 작렬했다.
뒤이어 블랙 드래곤의 거체가 순식간에 줄어들었고, 사람과 같은 크기에까지 도달한 끝에 바닥에 사뿐히 내려섰다.
“흠.”
인지를 벗어난 아름다운 외모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흑단 같은 머리카락을 출렁거리며 한껏 오만한 태도로 세상을 좌시했다.
이윽고 자신 앞에 있던 이진한을 바라보며 한쪽 눈을 찡그리더니, 의아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족…은 아닌 것 같구나. 아이야, 너는 인간이 맞느냐?”
폴리모프 마법을 사용한 듯 인간의 모습을 완벽하게 의태하고 있었다.
외모는 흠잡을 곳 없이 아름다웠고, 그와 더불어 은은한 절대자의 존재감이 그 전신에 서려 있었다.
이진한은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 세운 계획은 드래곤의 모습으로 싸움을 걸어왔을 때를 상정하고 짜둔 것이었다.
물론 이런 상황 역시 예상한 범주 이내에 있는바. 하지만 여유롭게 움직이기엔 시시각각 줄어드는 유예가 눈에 밟혔다.
“적어도 더러운 도마뱀은 아니지.”
이진한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도발하듯 대답하자, 그녀는 피식 웃으며 팔짱을 꼈다.
Lv.2785 「블랙 드래곤 벨라시온」
“같잖은 도발이구나.”
쿠우우웅-.
대지가 짓눌렸다.
벨라시온으로부터 발해진 막대한 압력이 사방을 찍어 누른다. 허공을 유유히 노닐던 바람의 흐름조차 그것에 거스르지 못하며 무릎을 꿇고 그 앞에 굴복했다.
‘과연.’
이진한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드래곤의 나이는 레벨과 같은 수치였다.
헤츨링을 벗어난 성룡은 1천 레벨부터, 완전체라 불리는 에이션트, 고룡이라 불리는 드래곤은 5천 레벨부터였다.
벨라시온의 경우는 혼자 상대하기엔 조금 버거웠으나 그렇다고 잡지 못할 정도까진 아닌 것으로 아슬아슬하게 한계치에 걸쳐 있는 수준이었다.
“언제까지 그리 여유가 넘칠 수 있을지 궁금하구나.”
검은 마나가 곧 사방을 뒤덮으며 청명한 하늘을 물들여갔다.
마기(魔氣)가 아닌, 블랙 드래곤의 성질을 띤 순수한 마력의 집약이었다.
금이 간 대지는 삐걱거리며 비틀리기 시작했고, 이내 가뭄이라도 일어난 듯 쩍쩍 갈라지며 더 큰 균열을 만들어냈다.
드드드드-.
종래엔 땅속까지 영향이 미친 듯 지진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진한과 벨라시온은 아무런 변화 없이 처음 그대로 그 자리에 오롯이 서 있을 뿐이었다.
“호오.”
벨라시온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이윽고, 무슨 생각인지 주위를 찍어누르던 기운을 거둬들인 그녀는, 고혹적인 자태로 그에게 다가가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흥미가 생겼다. 어떠하냐, 아이야. 네가 내게 예의를 표한다면 오늘은 이 도시를 공격하지 않으마. 그건 너로서도 환영할 만한 일이겠지?”
어둠을 품은 검은 눈동자가 호를 그리며 가늘어진다. 이진한은 가만히 자신 앞에 내밀어진 그녀의 새하얀 손을 바라보았다.
“…….”
이윽고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가 벨라시온의 손을 천천히 맞잡았을 때.
푹-!
등 뒤를 찔러오는 무언가에 의해 이진한의 몸이 들썩이며 앞으로 몇 걸음 밀려나고 말았다.
“…컥.”
그와 동시에 보이지 않는 힘이 그 주위를 경직시켰다. 그러자 꿰뚫린 가슴에서 솟구친 핏줄기는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그 형태로 움직임을 정지했다.
“후훗.”
벨라시온은 맞잡은 손을 천천히 당겼다. 그러곤 요사스러운 미소와 함께 이진한의 귓가에 속삭였다.
“드래곤을 능멸한 죄는 크단다, 아이야.”
“…인사치고는, 살벌한 것 같은데.”
그는 잘게 떨리는 눈으로 밑을 바라보았다.
시커먼 가시가 가슴의 중심을 꿰뚫고 있었다. 심장을 관통 당했는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고, 입에서 역시 시뻘건 선혈이 토해졌다.
“네가 죽으면 아쉽게도 약속을 지킬 대상도 사라지는구나.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라. 저 도시와 그 밑에 숨어 있는 쥐새끼들 역시 모조리 한 줌의 재가 될 테니 가는 길이 그리 외롭지는 않을 것이야.”
서늘한 웃음을 그리며 벨라시온이 말을 잇던 그때, 이진한의 입술 또한 호선을 그렸다.
“…그럴 줄 알았다. 이 도마뱀 새끼야.”
“……?”
벨라시온은 죽어가는 와중에도 웃음을 토해내는 그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아 의아한 시선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이진한이 노린 것도 그 타이밍이었다.
쉬이익-!
어쌔신 마스터의 스킬, 「그림자 분신」과 「그림자 순신」의 연계였다.
“……!”
벨라시온에게 잡혀 가슴이 꿰뚫린 것은 그림자로 만들어낸 이진한의 분신이었다.
그 본체는 이미 진즉에 그녀의 그림자에 숨어서 때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법은 꿰뚫어 볼지 몰라도, 스킬은 예외지.’
치명상을 입은 분신이 그림자로 변해 녹아내렸다.
그제야 자신이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벨라시온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몸을 돌렸지만, 이미 이진한이 그녀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와 쇄도한 직후였다.
인간의 모습을 의태한 드래곤은 설사 목을 벤다고 할지라도 단번에 죽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몸에 유의미한 타격을 준다면 본체에까지 영향을 끼치는바.
푹-!
마스터 어쌔신의 전용 무구인 흑백쌍린(黑白雙鱗)의 두 어금니가 벨라시온의 살갗을 파고들며 시뻘건 피를 흩뿌렸다.
블랙 드래곤이라 해서 피도 검을 줄 알았지만, 보통의 인간과 같은 붉은 색의 피였다.
쐐애애애액-!
그와 동시에 무시무시한 파공성이 귓가를 스쳤다.
위험을 감지한 이진한이 본능적으로 흑백쌍린을 놓으며 뒤로 물러서자, 보이지 않은 칼날이 간발의 차이로 그를 스쳐 지나갔다.
스륵-.
그럼에도 전부 피해내지 못했는지 뺨 위로 옅은 실선이 그어지며 한 줄기의 피가 흘러내렸다.
“후.”
다시 한번 훌쩍 땅을 박차 거리를 벌린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벨라시온은 귀기 어린 표정으로 이를 빠득거리며 자신을 상처 입힌 이진한을 향해 날 선 시선을 보냈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먼저 기습한 주제에 잘도 지껄이네.”
드래곤이란 종족을 표현하는 단어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명석하고 지혜로우며 위대함과 동시에 음험하며 음습했고 인내심이 짧았다.
그렇기에 한 가지에 치우치지 않으며 온전하면서도 그릇된 존재들이었으니.
‘패턴 D도 상정해둬서 다행이었네.’
이진한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드래곤의 반응 패턴은 몇 가지 부류로 나뉘었다.
그중 가장 악질적인 것이 패턴 D.
D는 Dirty의 D로, NPC인 척 인간의 형태로 다가와 대화를 걸어오는 패턴을 말했다.
무언가를 부탁하려 하는 듯 흥미로운 주제를 꺼내고, 종래엔 퀘스트 창까지 떠오르니 그것을 보고 있던 유저는 당연히 NPC라 생각한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방심하는 기색을 보인다면 태세를 바꾸어 조금 전의 벨라시온처럼 치명적인 기습을 감행했다.
이진한 역시 그 이전에 몇 번이나 겪어본바.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무슨 질 나쁜 농담이냐며 우스갯소리로 치부했지만, 직접 당해보니 그렇게 화가 나는 일이 없었다.
“빌어먹을 새끼들. 이젠 안 통한다.”
사망 패널티로 손실된 경험치와 랜덤 드랍한 아이템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렸다.
그렇게 욕지기를 내뱉고 있자니, 벨라시온은 제 등 뒤를 찌른 두 자루의 검을 거칠게 붙잡았다.
“이까짓 것.”
다량의 피와 함께 진득한 살점이 검신을 따라 떨어져 나왔지만, 그녀는 서늘한 표정으로 그것을 뽑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기발함은 인정하지. 하지만 고작 이따위 상처로 내게 우위를 점할 수 있…….”
벨라시온은 서늘한 비웃음을 흘렸다.
동시에 거센 기운을 흩뿌리며 으름장을 놓던 그 순간, 그녀는 이내 움직임을 멈추며 두 눈을 부릅떴다.
“…독? 감히 블랙 드래곤인 내게 독을 써? 간도 크구나. 겨우 그따위 것을 믿고 있는 것이라면 그 알량한 지식이 네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
흑백쌍린의 날을 타고 자신의 몸에 들어온 이질감을 느낀 듯 그녀는 깔깔거리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이진한은 천연덕스러운 태도로 어깨를 으쓱이며 그 말을 부정했다.
“아니, 독 아닌데?”
“…뭐?”
벨라시온은 인상을 찌푸리며 의문을 표했다.
그는 물음에 답하지 않은 채 하늘 위로 손을 뻗어 한 줄기 불꽃을 쏘아 올렸다.
“……!”
이진한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가 싶어 잔뜩 경계심이 서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경계가 무색하게도, 쏘아 올린 불꽃은 단순한 신호였을 따름이었다.
웅웅웅-.
그 순간, 그들이 선 땅을 중심으로 결계가 펼쳐졌다.
정확히는 안티 매직 쉘이란 이름으로, 해당 구역 안에서 마법을 사용을 제한하는, 결계 마법의 일종이었다.
“슬슬 본체로 변하는 것이 어때. 그렇지 않으면 벗어나기 힘들 텐데.”
“고작 이따위 결계로?”
벨라시온은 피식 웃으며 가볍게 손을 들었다.
그 위에 어린 술식은 해독 마법과 동시에 광범위 폭격 마법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사용 못 한다니까, 누가 짠 술식인데.”
이진한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안티 매직 쉘은 용살검과 함께 그가 직접 준비한 것이었다.
엘레오노라를 비롯한 30여 명의 마법사가 필사적으로 그것을 붙들고 있는 상태다. 아무리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형태로는 절대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벨라시온은 입술을 씹었다.
그녀 역시 폴리모프를 풀고 본체로 돌아가지 않는 한 안티 매직 쉘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고작 인간을 상대하는 데에 그렇게 힘을 뺄 필요는 없지.”
하지만 자존심 때문인지 결국 폴리모프를 해제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그렇게 여유로울 수 있을지는 나도 궁금한데.”
이진한은 아까 그녀가 해왔던 조롱을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
그러자 벨라시온의 눈빛이 사나워지며 그 전신으로 무지막지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스릉-.
이진한은 그 압박에 개의치 않고 검을 뽑아 들었다.
용살검은 결정적인 순간에 벨라시온의 목에 이빨을 박아 넣을 히든카드였다. 그러니 그 손에 쥔 것은 용살검이 아닌 평소 사용하던 검이었다.
우웅-.
이진한의 검 위로 시퍼런 오러 블레이드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기세는 일전 근원의 마탑에서 망령과 싸웠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맹한 기운을 지닌 것이었다.
“우습기 짝이 없군. 고작 마법을 봉했다고 해서 감히 날 상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코웃음을 친 벨라시온 역시 검을 뽑아 들었다.
과연 드래곤이라는 것일까. 그녀의 검 위로도 시커먼 오러 블레이드가 서리며 막대한 기운을 내뿜었다.
이진한은 그 모습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드래곤이라 그런가, 효과가 늦게 도네.”
“같잖은. 인간의 독 따위가 내게 통할 것 같더냐. 설사 해독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더라도 이 몸의 저항력으로 금세…….”
“아니, 그러니까 독이 아니라니까.”
“……?”
벨라시온은 거듭 그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의문을 표했다.
“……!”
그러나 그 직후, 반응이 왔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몸을 움찔 떨었다.
“이, 이게 대체…….”
“독이 아니라 약이야 약. 그 앞에 붙은 이름이 조금 그렇긴 한데.”
이진한은 품에서 꺼낸 손톱만 한 병을 가볍게 흔들었다.
춘약, 미약, 음약, 혹은 최음제.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그것은 상대의 몸을 달아오르게 만드는 효과를 지녔으니. 곧 성욕을 끓어오르게 만들어 이지를 어지럽히고 이성을 잃게 했다.
마법사, 그리고 인간 형태의 드래곤을 상대하는 방법 중 이것보다 효율적인 수는 없으니.
“…으읏.”
벨라시온은 입술을 깨물며 흘러나오는 신음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쭉 뻗은 다리는 어느새 잘게 떨리기 시작했고, 그 얼굴엔 감출 수 없는 홍조와 함께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선명한 반응에 이진한은 짙은 미소와 함께 검을 들어 올렸다.
“날 능멸하려 했던 그 죄 역시 아주 크다.”
좋아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지?
그러니 힘껏 몸부림쳐 보아라, 도마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