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8.
느지막한 오후.
전날의 숙취 때문인지 이진한이 눈을 떴을 땐 이미 해가 하늘 높이 떠오른 뒤였다.
엘레오노라와 미르엘 역시 비슷한 시각에 일어났다.
전날 과음한 것 때문인지 숙취로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들은 마법으로 몇 번이고 정신을 가다듬은 뒤에야 겨우 평상시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일단 밥이나 먹으러 갈까.”
숙취로 가라앉은 분위기 가운데 이진한이 말을 꺼냈다.
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고, 일층으로 내려가 한참이나 늦은 아침을 들었다.
달그락.
그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만이 텅 빈 식당 안에 울려 퍼졌을 뿐, 이진한 역시 멍한 표정으로 접시에 코를 박고 무의식적으로 손을 움직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식사가 끝나갈 찰나, 먼저 입을 연 것은 미르엘 쪽이었다.
“…방심했습니다. 설마 이렇게까지 마시게 될 줄은.”
자책하는 표정이 강했다.
제 주인인 엘레오노라는 몰라도 기사인 자신은 자중했어야 했다며 포크를 쥔 채 긴 한숨을 내뱉었다.
“죄송스럽지만, 앞으로는 아무리 엘레오노라님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권유에 응하지 않겠습니다. 적들이 어디에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니까요.”
“…어, 미르엘.”
그 말을 끊은 것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시선으로 제 기사를 바라보고 있던 엘레오노라였다.
“혹시, 어젯밤 기억 안 나요?”
“…송구스럽지만, 도중부터 술에 취해 기억이 끊겼습니다. 저는 몰라도 엘레오노라님을 지켰어야 하거늘, 기사로서의 수치…….”
“아니, 흥에 취해 날뛴 건 미르엘 당신인데요.”
이어지는 말을 차마 더 듣지 못하겠다는 듯 툭 던진 엘레오노라의 말에 미르엘의 얼굴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네?”
“정말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네요.”
엘레오노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손에 쥐고 있던 포크의 끝으로 미르엘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죠. 엉엉 울지를 않나, 죽기 전에 한 번도 해보지 못하는 건 싫다며 베르너님께 매달리지 않나. 정말,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니까요. 하아…….”
엘레오노라는 이야기를 하는 자신마저 창피한 것인지 잠깐 멈칫거렸지만, 이내 원망 섞인 시선으로 미르엘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저는 당신이 그렇게 욕구 불만에 차 있는지 꿈에도 몰랐어요. 베르너님에게 달려드는 그 모습이….”
“그, 그런.”
그 직설적인 말에 미르엘의 얼굴이 더 없을 정도로 달아올랐다.
그녀는 황급히 이진한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저 말이 사실이냐는 시선을 보냈지만, 그는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럴 수 있지. 난 이해해.”
“아, 으, 아…….”
미르엘은 여전히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버둥거리고 있었다.
“참, 미르엘이 가장 동경하던 영웅이 검은 현자님이셨죠. 어릴 적부터 그 일대기를 몇 번이고 저에게 말해주곤 했으니까요. 동경하던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으니 매달 릴만도 하겠네요.”
엘레오노라는 이제 그런 제 수하의 모습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는지, 짓궂은 눈빛과 함께 본격적으로 그녀를 놀리기 시작했다.
“매, 매달린 적 없습니다!”
“술에 취했다고 있는 사실이 없어지진 않아요. 뭐, 오랜 친구의 새로운 일면을 볼 수 있게 돼서 제법 신선했어요. …조금 성가시기는 했지만.”
“으…….”
미르엘의 얼굴은 한계에 이르러 있었다.
홍당무처럼 새빨간 것이 곧 터질 것 같지 않은가. 그렇기에 엘레오노라는 자중하려는 듯 헛기침을 내뱉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오늘은 어쩌실 생각이세요? 드래곤이 찾아오기로 한 날짜는 하루 남았는데.”
“그렇네. 슬슬 준비해야지.”
어설픈 화법이었지만, 이진한 역시 미르엘의 얼굴이 터질 듯 새빨개진 것을 보고 엘레오노라의 말에 화답해주었다.
“마침 좋은 재료도 수중에 들어왔으니 괜찮은 걸 만들 수 있겠어.”
경비대와의 의뢰를 통해 계약금으로 받은 원석의 양이 적지 않았다. 그걸 이용한다면 효과적인 무기를 만들 수 있을 터.
남은 시간은 하루 남짓이었으나, 그 정도면 충분했다.
“직접 만드시는 건가요?”
“어. 나름대로 손재주가 있거든. 무기 몇 개 정도는 뚝딱이지. 장소도 이미 구해놓았고.”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어 눈을 반짝이며 물어오는 미르엘의 모습에 이진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벨데르에 있는 대장장이 계열 클래스의 장인들은 도시 복구에 여념이 없는 상태. 그렇기에 빈 공방이 많았고, 어제 계약금을 받으러 갔을 때 호데르만에게 요청해 그중 적당한 곳을 빌릴 수 있었다.
“보러 가도 되나요?”
“재미없을 텐데.”
잔뜩 흥미를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이진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엘레오노라가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미르엘의 취미가 그쪽이라서요. 태생이 검사인 건지, 검을 만드는 일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가.”
이진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켜보는 것 정도야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드래곤을 상대할 무기를 만드신다고.”
텅 빈 대장간의 입구.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가 있었다. 이 공방의 소속 대장장이인 듯 근육으로 꿈틀거리는 두 팔엔 거친 흉터들이 다수 자리하고 있었다.
“신세 좀 지겠습니다.”
“저희가 부탁드려야 할 일이 아닙니까. 혹,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보조를 붙여드리겠습니다. 급한 건 이쪽이니까요.”
“혼자서도 괜찮습니다. 도시 복구 쪽의 일이 바쁠테니.”
“그렇습니까. 참, 안쪽의 시설은 마음껏 사용하셔도 괜찮습니다. 재료 쪽은, 지금 철이 든 뭐든 재고가 다 떨어진 지 오래라…….”
대장장이는 미안하단 얼굴로 뺨을 긁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현재 파괴된 도시 복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기에, 지닌 자재 역시 그쪽에 모조리 투입된 이후라 더는 쓸 것이 없었다.
“재료 정도야 이미 다 준비해놓았습니다.”
이진한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대장장이는 다행이라는 듯 그 험상궂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불러달라는 말을 남기곤 자리를 떠났다.
“불까지 지펴주고 간 건가. 친절하군.”
텅 빈 대장간 안에 홀로 불을 피워 올리고 있는 화로 한 개가 있었다.
이진한이 그것을 뒤적거릴 찰나, 뒤쪽으로 다가온 미르엘이 의문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뭘 만드실 건가요?”
“어디 보자…….”
그는 일단 바닥에 재료를 모조리 꺼내 놓았다.
원래 지니고 있던 상등품의 철을 비롯해 계약금으로 받은 희귀 원석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의 두 눈이 반짝였다.
“현철(玄鐵), 거기에 미스릴까지.”
“순도 높은 적철과 황석이군요. 확실히, 제련을 잘한다면 항마(降魔)의 성질을 품는다고 하니 드래곤의 마력을 뚫어내기에 적합하겠네요.”
“오? 잘 아네.”
보편적인 반응을 보이는 엘레오노라와 달리, 미르엘은 상당한 지식을 지닌 듯, 예사롭지 않은 식견을 뽐내기 시작했다.
“옛적부터 이런 것들에 관심이 있었어요. 제 검인 아우스펜서도 빙결의 결정이라 불리는 던그래스프를 직접 구해 제련한 것이니까요.”
그녀는 살짝 부끄러우면서도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제 허리춤에 찬 검을 툭 쳤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재료로 무얼 만드실 생각이세요?”
“보고 있어 봐.”
이진한은 소매를 걷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현자 클래스의 특성으로 대장장이의 스킬 역시 습득했다.
비전투 계열의 클래스에서는 유일하게 숙련도를 마스터했고, 이전부터 각종 무기를 자급자족한 경험이 있었다.
“우선은…….”
바닥에 늘어진 원석을 집어 화로에 녹였다.
특정한 순서와 배합에 따라 그것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섞어나갔고, 적당한 시간이 될 때까지 저어주었다.
곧 안쪽에서 틀을 꺼내왔다. 그러곤 검신의 형태를 잡았고, 불순물을 제거하며 완전히 혼합한 그 쇳물을 틀 안에 부었다.
[「용살검(龍殺劍)」을 제작합니다.]
용살검(龍殺劍).
말 그대로 용을 살해하는 검이었다.
드래곤 계열의 용족을 상대할 때 추가 데미지가 붙는 대(代)드래곤전 특화 무기였다.
검의 성능은 솔직히 말해 그리 좋지 않았다.
랭크는 높았으나, 동급 무기와 비교해 현저히 그 스펙이 밀렸고 부가 능력도 변변찮았다.
그럼에도 랭커들이 눈에 불을 켜고 용살검을 구하려고 했던 이유가 바로 용살검에 붙은 「용족에 대한 추가 데미지」 보정 효과였다.
높은 스펙의 무장을 몸에 두르는 것보다 용살검 하나를 드는 것이 훨씬 더 데미지가 잘 들어갔다.
거기다 들어가는 재료도 비싸고 희귀한 것들이라 공급도 턱없이 적었기에, 그 가격이 천정부지로 솟은 검이기도 했다.
‘조금 지출하더라도 사놓을 걸 그랬나.’
이진한은 차라리 컨트롤에 집중해 한 대 더 때리는 편이 효율 높게 먹힐 것 같아 굳이 용살검을 사놓지 않았었다.
용살검뿐이 아니다. 업데이트가 끝나기 전날 술 먹고 자느라 이것저것 준비할 시간을 놓쳤다. 최상위 랭커로서 미흡한 모습이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어찌할 수 있겠는가.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다. 어찌 되었든 용살검을 만들 재료가 수중에 들어왔기에 열심히 망치로 그 쇳덩이를 두드리며 형태를 잡았다.
그렇게 얼마 뒤.
[「용살검(龍殺劍)」을 제작에 성공했습니다.]
두 번의 실패 이후, 세 번째에서 원하던 결과를 낼 수 있었다.
“…와.”
“…이런 수준의 실력이시라니.”
이진한은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무렵부터 밤의 끝자락에 도달할 때까지 망치를 두드린 끝에 매끄러운 황금색 검신을 가진 용살검을 완성할 수 있었다.
쉬익-.
가볍게 그것을 휘두르자 날카로운 파공성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음.”
그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손맛이 별로였다.
용족에게 추가 데미지가 들어간다는 것을 빼면 지금 사용하는 검보다 스펙이 낮았으니 당연한 일. 다른 몬스터를 상대할 때는 그냥 일반 검을 사용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아마 이번 싸움 이후로는 사용하지 않을 터.
“…….”
다만, 미르엘은 용살검의 황금빛 검신에 흠뻑 빠졌는지 반짝거리는 두 눈으로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싸움이 끝나면 줄까?”
“…아, 아니에요. 이런 과분한.”
“그렇지? 사실 빈말이었어.”
“…….”
놀리는 듯한 그 말에 미르엘이 샐쭉한 표정을 짓는다. 살짝 시무룩한 것을 보니 잠깐이나마 기대한 모양이었다.
‘뭐, 어차피 나한텐 필요 없을 테니.’
이 이후에 드래곤이랑 싸울 일이 더 있을까.
설사 있다고 한들, 의뢰의 보상으로 받을 원석이 산더미다. 그 정도 양이라면 용살검보다 더 높은 등급의 무기를 만들 수 있을 터.
“그러면 준비는 끝났고.”
저 멀리, 지평선으로부터 어둠이 걷히며 옅은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밤사이 싸늘해졌던 공기는 천천히 달아올랐고, 도시 역시 긴장감에 잠기기 시작했다.
벨데르에 온 지 사흘째.
예정된 재앙의 날이 도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