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7.
“자, 잠깐! 나는 그냥……!”
“다물어라. 듣고 싶지도 않으니.”
이진한은 피식 웃었다.
자신의 뒤를 쫓고 있는 이들이야 뻔했다.
마탑에서부터 따라온 제국의 암부거나, SS랭크 용병의 존재에 흥미를 느낀 정보 길드 쪽일 터다.
하지만 정보 길드 쪽은 어제 엘레오노라가 말했다시피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을 터. 그러니 자연스럽게 후보군은 한 곳으로 좁혀졌다.
“윽….”
조금 더 손에 힘을 넣자 남자는 반항하던 것을 멈추며 두 손을 들었다. 명백한 항복의 의사였지만, 이진한은 제국 암부 소속의 녀석들이 이 정도로 굴복하리라 믿지 않았다.
“일단 자리를 옮길까.”
대낮의, 그것도 거리 한복판에 있는 건물의 지붕 위에서 일어난 소란이다. 당연히 그것을 느낀 행인들이 의아함을 보이며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쉬익-.
다시 한번 발동한 그림자 순신 스킬이 이진한과 이 남자의 몸을 집어삼킨다. 뒤이어 도착한 곳은 아까 지붕 위에서 그가 눈여겨보았던 한적한 공터였다.
“큭.”
구속에서 해방된 남자는 막혔던 숨을 몰아쉬며 몇 번이고 헛구역질을 내뱉었다.
제법 인상적인 모습의 남자였다.
정리되지 않은 잿빛 머리카락에, 한쪽 눈은 탁한 색을 보이는 것이 의안처럼 보였다. 이쪽 세계관을 생각해본다면 아마 무언가 마법적인 장치가 되어 있을 가능성이 클 터.
이진한이 그것을 경계하고 있자니 남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이쪽을 향해 입을 열어왔다.
“…그 태도를 보니 이미 이쪽의 정체를 알고 있군.”
꽈드득.
말이 짧음에 이진한이 가볍게 손목을 한 바퀴 돌리며 인상을 쓰자, 남자는 움찔하며 말을 바꿨다.
“…알고 있으시군요. 짐작하셨다시피 제국 암부의 출신인 게헤라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나를 쫓아왔지?”
의아한 점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마탑에서 있었던 싸움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는 있다.
하지만 텔레포트의 경로를 추적해 벨데르에 왔다는 것까지는 알아낼 수 없었을 터.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의 몸에도 추적 마법이 걸려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외의 요소로 따라왔다는 건데.’
그 물음에 게헤라는 눈동자를 굴렸다. 필시 그럴듯한 변명을 생각해내고 있는 눈치였다.
“암부가 지닌 아티팩트의 능력입니다. 그걸로 베르너님의 뒤를 쫓았지요.”
“황녀에 대해선 보고했나?”
“…아직 보고하지 못했습니다. 돌아가는 즉시….”
쐐애애액-!
이진한이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날 선 바람의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게헤라는 설마 그가 다짜고짜 공격해오리라 예상치 못했는지 두 눈을 크게 뜸과 동시에 몸을 날렸지만, 칼날의 궤적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서걱-.
“…끄아악-!”
시뻘건 선혈이 허공에 흩날린다. 그와 동시에 게헤라의 왼팔이 팔꿈치 아래로 싹둑 잘려 나가 바닥을 굴렀다.
“내 앞에서 거짓을 고하다니. 배짱 한번 두둑하군.”
아쉽게도 현자의 눈은 그러한 기능까지 달고 있지 않은바.
솔직히 말하자면 이진한 역시 무엇이 사실이고 거짓인지 알지 못했지만, 알게 무엇인가.
이쪽이 절대적으로 갑인 입장에서 팔 하나 베어버렸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팔이 잘린 상태에서도 거짓말을 한다면, 그 정도는 믿어줘야지.’
하지만 게헤라는 입을 열지 않았다.
피가 주룩주룩 흘러나오는 왼팔을 부여잡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뿐이었다.
“뭐,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 팔은 하나 더 있을뿐더러, 다리 역시 두 개나 더 있으니.”
“…저, 정말입니다! 제국의 눈은 이곳저곳에 깔려 있습니다! 이곳 벨데르도 드래곤의 습격으로 주시하고 있던 차에 SS랭크 용병이 등장했다고 해서 추적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손을 들어 올리자 게헤라는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암부에선 필시 누군가의 조력이 있으리라 판단했습니다! 그렇기에 대륙 곳곳을 조사하던 중 벨데르에서 SS랭크 용병이 등장했다는 정보에 제가 나선 겁니다! 혹시라도 저를 죽이시면 암부에서 이곳을 예의주시할 겁니다!”
즉, 물량으로 밀어붙여 추적해왔다는 이야기였다.
절실한 그 표정을 보니 거짓을 고하는 것 같진 않았기에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래도 제 목숨 귀한 줄 아는군.”
“…하하.”
게헤라는 경직된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럽게 제 팔을 지혈했다. 그러곤 살짝 떨리는 눈빛으로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사실 이런 식으로 접촉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조금 더 지켜보아 베르너님의 성향을 파악한 뒤 협상에 나설 생각이었으니까요.”
“협상?”
“예. 저희 암부는 가능한 베르너님과 적대하고 싶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기에 대화를 통해 적절한 조건을 제시함으로 서로 간의 원하는 것을 조율했으면 하는 바람이었습니다.”
“호오.”
제법 괜찮은 이야기였다.
그가 대충 무슨 조건을 제시할 수 있는지 조건이나 들어보자며 턱짓으로 묻자, 게헤라는 안도하는 표정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곤 말을 이었다.
“이쪽에선 가급적 원하는 것을 전부 맞춰드리겠습니다. 사실 베르너님 정도의 실력자라면 저희 쪽에서 모시고 싶군요. 굳이 암부가 아니더라도 제국 쪽으로 오시겠다면 높은 작위를 얻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작위라.”
이진한이 흥미를 보이자, 게헤라는 기세를 잡은 듯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제국은 반역에 대해선 철저히 죄를 묻습니다. 설사 이곳 벨데르를 무사히 빠져나간다고 해도 언젠가 발목이 잡히겠지요. 애초에 그들이 목적을 이룬다는 것은 성립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국가가, 어느 도시가, 어느 세력이 저희 오스칼 제국와 척진 배신자들을 받아주겠습니까.”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만약 엘레오노라에게서 제국 황실 뒤에 암약하고 있는 마족과 마인들에 관해 듣지 않았더라면 제법 혹할만한 것이었을 터.
여기서 그녀들을 팔아넘긴다면, 앞으로의 전개가 어떻게 구렁텅이로 떨어질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것도 제법 나쁘지 않아 보이지만.’
오랜 염원인 대현자 클래스의 해금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이상, 구태여 사서 고생할 필요는 없었다.
“뭐, 이야기는 잘 들었다.”
“그렇다면…!”
“식후시간을 보내기로는 제법 괜찮은 이야기였어.”
게헤라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았으나, 이진한은 콧방귀를 끼며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가벼운 바람이 일어남과 동시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선명한 예기가 그들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아.”
붉은 실선이 목 위로 새겨졌다.
게헤라는 하나 남은 팔을 잘게 떨며 어째서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이진한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너 같은 쥐새끼들이랑 손잡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뭐, 외롭진 않을 거다. 먼저 간 녀석들도 많고, 앞으로 뒤따라갈 놈들도 많을 테니.”
그간 우스갯소리를 내뱉었을 뿐이지, 정말로 제국과 손을 잡을 생각은 없었다.
어찌 되었든 그 끝에선 배신당하고 버려지는 전개가 될 터니.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아마 제국을 향한 복수 에피소드가 진행되지 않을까 싶었다.
툭.
서로 나뉜 머리와 몸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진한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시퍼런 불꽃이 일어나 그것을 흔적도 없이 태웠고, 곧 한 줌의 재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시시껄렁한 대화였지만, 그래도 한 가지 수확은 있었다.
‘이들은 내가 검은 현자라는 것을 모른다.’
자신에게 핵을 잡혀 죽은 망령이 미처 전달하지 못한 것인지, SS랭크 용병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을 뿐 검은 현자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앞으로의 전개에 있어 큰 메리트가 될 터.
“날 상대하려면 검성 정도는 데려와야지.”
머지않아 이곳의 기억을 읽어낼 암부 녀석들에게 이죽거리는 도발을 내뱉는 것으로, 이진한은 자리를 떠났다.
***
“…습격당하셨다고요?”
경비대에서 계약금을 받아온 뒤, 숙소로 돌아온 이진한에게 엘레오노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습격이라고까지 할 만한 일은 아니었어. 뒤를 쫓기에 붙잡아서 캐물은 일이지.”
“…생각보다 알아차리는 게 빠르군요.”
미르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저쪽에도 확신을 지니고 추격한 건 아니더라. 입을 막았으니 적어도 며칠은 벌었겠지.”
설사 곧바로 추격해온다고 하더라도 드래곤의 습격이 예정된 곳으로 섣불리 오기 힘들 터.
“암부는 끈질긴 놈들입니다. 어찌나 찰거머리같이 달라붙어 오던지.”
미르엘이 어두운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이전에 듣기로 엘레오노라를 지키는 기사는 그녀 말고도 여럿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곳으로 오는 여정까지 모두 목숨을 잃었고, 이젠 미르엘 혼자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니 암부에 대한 증오는 클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나보고 자신들과 손을 잡지 않겠냐며 제안해오더라. 높은 작위니, 많은 재화니 하는 조건을 내세우면서 말이야.”
“…그런가요. 하긴 그들도 예상하지 못하겠죠. 저희를 지켜주는 사람이 고대 영웅이라는 걸.”
“고대라는 말을 계속 들으니까 구닥다리가 된 것 같은데.”
이진한이 툴툴거리자, 엘레오노라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저녁은 어쩌실래요? 어떤 분께서 혼자만 맛있는 점심을 드시고 느긋하게 돌아오신 덕분에 저희는 한참 늦은 시각에 이 여관의 맛없는 음식으로 끼니를 때웠는데.”
“그건 미안하다고 했잖아.”
그는 두 손을 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까 나가면서 미르엘에게 점심을 사다 준다고 말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제국 암부의 조직원과 마주쳐 그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렸고, 결국엔 맨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대신 저녁을 살게. 뭐든 지 말해.”
“그러면 술은 어때요?”
“엘레오노라 님.”
“…술이라.”
엘레오노라가 두 눈을 반짝거리며 이진한에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미르엘은 부정의 뜻으로 나지막하게 제 주인을 불렀지만, 이진한으로서도 제법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뭐, 제국 암부 녀석들도 곧바로 습격해 오진 않겠지. 그러니까 적당히 한잔할까?”
“그래요, 미르엘. 이때까지 고생했잖아요. 하루 정도는 쉬어도 괜찮겠죠. 베르너님도 계시니까!”
“…전 마시지 않겠습니다. 두 분도 적당히 즐겨주세요.”
여관에도 술은 팔았으나, 조용히 마시고 싶어 나름대로 고급스러운 가게를 선택했다.
처음엔 미르엘의 말대로 어느 정도 선까지만 즐기고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열 잔이 되면서 그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니, 더는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으.”
호위를 서야 한다며 거듭 술을 사양하던 미르엘 역시 제 주인에 손에 이끌려 한 잔 두 잔 홀짝이더니, 이내 불그스름한 얼굴로 그 옆에 앉아 연신 술잔을 홀짝였다.
“…그래도, 베르너님을 만나서 다행이에요. 정말로 성역에서 붙잡히는 줄 알았으니까요. 텔레포트 게이트가 고장 났을 땐 솔직히 전부 포기했었어요.”
술이 들어간 엘레오노라는 이야기를 술술 털어놓았다.
이진한은 취기를 즐기면서도, 가늘어진 눈으로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그녀들의 목적지인 마르딘 영지는 서대륙의 패자인 리베라 제국의 영토였다.
엘레오노라의 어머니가 되는 둘째 황후는 마르딘 영지를 다스리는 마르딘 공작의 동생으로, 어릴 적부터 무언가 문제가 생긴다면 마르딘 영지로 가라는 말을 남겼다.
이런 상황을 예견한 것은 아니었지만, 권력 구도는 언제나 복잡하기 그지없지 않은가. 아마 제 딸의 안위를 걱정해 혹시 모를 보험을 들어둔 것일 터라고 이진한은 생각했다.
“외숙부께는 이미 연락을 드렸어요. 하지만 지금 그쪽도 보는 눈이 많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고 하시더군요. 어떻게든 리베라 제국의 안쪽 영역으로만 들어온다면 자신이 지켜줄 수 있다고 하셨는데, 거기까지 가는 일이 고역이죠.”
엘레오노라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제국의 황녀라는 위치에서 지금 이 자리까지 전락하게 된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적인 말이었다.
“…엘레오노라 님. 저는 언제까지고 당신 곁을 지킬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표정은 짓지 마세요.”
미르엘은 그런 제 주인의 손을 슬며시 붙잡으며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엘레오노라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를 바라보았고, 둘은 이내 쑥스러운 듯 작게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그런 시시콜콜한 것들은 전부 던져 버리고 마시도록 하지. 언제 또 이렇게 쉴 수 있을지 모르니.”
이진한 역시 미소를 지으며 새로운 술병의 마개를 열었다.
“그렇네요. 또 언제 이렇게 쉴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하아.”
당연한 기색으로 화답해오는 엘레오노라의 태도에 미르엘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