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5.
마경(魔境)의 도시 벨데르.
온갖 마물과 몬스터가 서식하는 사지(死地) 가운데 유일한 인간의 도시였다.
이름만 들어선 고렙 전용 구역이라 생각이 될법하지만, 가장 깊숙한 곳이 아니라면 300~500레벨 사이인 중하위권 플레이어들도 어렵지 않게 종횡할 수 있는 구역이었다.
다만, NPC들은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벨데르의 자경단인 속칭 ‘경비대’의 주 상대는 도시를 습격하는 마물과 더불어 안쪽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플레이어 역시 해당하는 바.
그렇기에 제일 약한 경비대원이 400레벨 이상일 정도로 그 수준이 높았다.
‘도시가 반파될 정도니, 예삿일은 아니겠지.’
그런 그들조차 막아내지 못한 것을 보니 기어 다니는 재앙이라 일컬어지는 자이언트 웜이라도 이곳을 다녀간 듯싶었다.
저벅.
포위망의 중앙이 갈라지며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다른 이들보다는 좀 더 출중한 기세로, 경비대를 이끄는 직책으로 보였다.
“본인은 벨데르의 경비대 부대장인 호데르만이라 한다. 그쪽의 신원을 밝혀라!”
“…….”
그 말에 이진한은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들은 아직 대체할 신분을 구하지 못한 것인지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셋을 세겠다. 불응할 시엔 이쪽과 대화할 의사가 없다는 것으로 파악하지.”
호데르만의 선포와 동시에 경비대의 기세가 날카로워졌다.
‘이거 곤란한데.’
이들을 쓰러뜨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경비대와 척진다면 벨데르의 지명 수배자가 되었다.
그렇게 된다면 다음 도시로 이동하기 위해 텔레포트 게이트 역시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바.
최악의 경우엔 이 넓디넓은 마경을 가로질러 넘어가야 할 수도 있었다.
“셋!”
카운트가 시작됨과 동시에 이진한은 인벤토리를 뒤적거렸다.
검은 현자를 증명하는 훈장을 바라보았지만, 그건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지 공신력이 있진 않았다.
설사 그것을 꺼내 든다고 하더라도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어올 터.
경비대를 설득할 만한 것이라면…….
“아, 이게 있었지.”
“둘!”
경비대의 전의가 절정에 도달함과 동시에 이진한은 인벤토리에서 빼낸 무언가를 호데르만에게 던졌다.
턱.
경계하는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 든 호데르만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손안을 살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패였다.
사각의 형태였지만, 그 끝은 동그랬고 황금색 바탕에 음각으로 여러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
이내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아본 호데르만이 두 눈을 크게 뜰 찰나, 뒤쪽에 있던 엘레오노라가 조심스레 물었다.
“뭘 던져주신 거예요?”
“용병패.”
호데르만이 황급히 손을 휘젓자 경비대원들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창을 내렸다.
“SS랭크 용병패, 확인했습니다. 저쪽에서 연락이 없었던 탓에 결례를 범했군요. 다시 한번 인사드리겠습니다. 벨데르 경비대의 부대장인 호데르만이라 합니다.”
“베르너다.”
호데르만의 반응에 이진한은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그 시절의 용병패가 과연 효력이 있을까 했는데, 다행히도 용병들의 체계는 여전히 이어져 오는 듯했다.
SS랭크 용병패라는 말에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용병도 하셨어요?”
“당연하지.”
SS랭크 용병패는 0.0001% 즉, 최상위 랭커들만 받을 수 있는 증표였다.
특히 1부 메인 에피소드의 최종 보스인 고대 신을 쓰러뜨리기 위한 원정대의 참여 조건 중 하나가 이 SS랭크 용병패의 획득 여부였으니, 랭커 중에서도 최상위권을 구분하는 하나의 기준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경비대에서 들으시지요. 경비대장님께서도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호데르만의 말에 이진한은 뒤쪽을 바라보았다.
경비대는 제국의 끄나풀로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기에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을 터.
어떻게 할지를 시선으로 묻자 엘레오노라가 작게 고개를 끄덕여왔기에 이진한은 턱끝을 당기며 입을 열었다.
“가지.”
“안내하겠습니다.”
호데르만을 비롯한 경비대원들은 앞장서서 경비대를 향해 걸어갔다.
“…처참하네요.”
“드래곤이 습격이라도 한 것 같습니다.”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주변 경관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확실히.’
호데르만이 옆에 있었기에 이진한은 별다른 내색하지 않으며 걸음을 옮겼지만, 도시는 텔레포트 게이트 쪽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 처참한 모습이었다.
“안쪽에 경비대장님이 계십니다.”
경비대 본부에 도착한 뒤, 호데르만은 안쪽을 가리켰다.
본래라면 이진한뿐만 아니라 그 일행까지 꼼꼼히 검사했겠지만, 급박한 상황과 더불어 SS랭크 용병패가 주는 무게는 모든 것을 생략하게 했다.
똑똑-.
“대장님. 호데르만입니다.”
이진한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서서히 열리는 문안 쪽을 바라보았다.
천 년 전의 경비대장은 800레벨이 넘었다.
단순히 그 수치만 따지자면 NPC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시야에 들어온 경비대장의 모습에 이진한은 작게 헛웃음을 토해냈다.
‘이건 상당히 기괴한 취향의 디자인인데.’
경비대장 마후마임은 핑크 모히칸에 갈색 피부를 지닌 근육질의 남자였다.
“끙, 이거 미안하군. 상태가 이 모양이라 결례를 양해해주게.”
팔다리를 비롯한 전신에 붕대를 두르고 있던 그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내 신음을 토해내며 그대로 쓰러지며 미안하단 표정을 지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겨우 붙은 뼈가 다시 부서집니다.”
“…그, 미안한데 방금 움직인 것으로 오른쪽 다리가 다시 금이 간 것 같다.”
“…….”
호데르만은 한숨을 푹 내쉰 채 뒤쪽에 있던 경비대원에게 치료사를 불러오라며 눈짓했다.
“이거 참, 적어도 앉을 수는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 무리였군.”
“당연한 소립니다. 솔직히 저는 대장이 지금 멀쩡히 두 눈 뜨고 누워서 입을 나불거리는 것만으로도 신기해 죽겠습니다.”
호데르만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제 상관을 바라보았다. 여차하면 발로 한 대 차버리고 싶지만, 환자라서 참는다는 기색이었다.
“어찌 되었든, 이 상태로 인사하는 것을 양해해주게. 나는 이곳 벨데르의 경비대장을 맡은 마후마임이라 하지.”
“베르너다. 모험가 겸 용병이지.”
“베르너라.”
“SS랭크 용병이십니다. 제가 확인했습니다.”
SS랭크 용병이라는 말에 마후마임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런 전력이 온다는 길드의 연락을 받은 적은 없는데.”
“비공식적인 루트로 왔다. 애초에 내 존재는 일반적이지 않으니.”
이진한으로서는 적당히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마후마임은 깊어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정체를 숨기고 싶어 하는가.’
SS랭크 용병은 극소수에 달했다.
그렇기에 그 신상은 대략적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베르너란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마후마임의 시선에선 그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싶어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비공식적이든, 일반적이지 않든 상관없네. 도시를 습격한 드래곤만 쓰러뜨려 준다면 그것으로 만족이야.”
드래곤이라는 말에 이진한은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규모의 재해를 일으킬 수 있는 존재는 극소수. 예상했다시피 그 원흉은 드래곤이었다.
“더욱이 상대는 갓 헤츨링을 어설픈 녀석이 아니라 성룡 중에서도 완숙에 이른 존재다. 그 강함은,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파괴된 도시, 그리고 상처투성이의 몸.
이진한은 침상 앞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핑크 모히칸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상당히 지독한 꼴을 당했군.”
“그런 셈이지. 나름 발악해보려고 애썼다만, 역부족이었다. 다른 국가에도 도움을 보냈는데, 아무래도 드래곤의 이름이 주는 무게가 너무 무거웠던 것 같군.”
그 이전에도 몇몇이 벨데르로 오긴 했지만, 처참하게 파괴된 도시 모습에 지레 겁을 먹고 다시 돌아갔다고 했다.
“그 드래곤은 사흘 뒤에 다시 오겠다고 했다. 그때까지 자신에 대적할 강자를 찾아 놓으라는 말과 함께.”
“흠.”
이진한은 턱을 쓰다듬었다.
드래곤이야 수십 번 넘게 사냥했다.
헤츨링, 그리고 성룡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드래곤이라면 혼자 사냥해도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완숙에 이른 정도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나 말고 다른 인원은?”
하다못해 랭커 셋, 아니 둘만 더 있다면 수월하게 사냥할 수 있을 터다.
국가 간의 지원이 거절되었으니 용병이라는 명목으로 다른 랭커와 합류하기에 딱 좋은 퀘스트가 아닌가.
그렇기에 조그마한 기대를 담아 슬쩍 물었지만, 마후마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 경비대가 전부겠군.”
“흠.”
이진한은 섣불리 대답을 내뱉지 않았다.
이미 한차례 쓴맛을 본 이들이다.
막상 전투에 돌입하면 그리 도움이 되지 못할 터. 다른 플레이어의 조력이 없다면 실질적으론 혼자서 싸워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래도 퀘스트인 이상 활로는 있다는 건데.’
아무리 극악의 난이도를 지닌 퀘스트라 할지라도 공략 방법이 없지 않다. 하물며 지금은 아직 도입부에 불과했으니 무언가 묘수가 있을 것임은 분명했다.
띠링-.
그와 동시에 익숙한 알람이 귓가를 스쳤다.
「메인 퀘스트」 ─ ∑드래곤 슬레이어
◈ 사흘 후, 벨데르를 습격해 반파시킨 악룡(惡龍)의 공격이 예정되어 있다. 악룡과 싸워 승리하고, 마경의 도시, 벨데르를 지키시오.
보상: ‘99시간의 유예’, ‘클래스 【대현자】의 해금’
“…허.”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에 이진한은 헛바람을 내뱉었다.
사실 이쯤이면 퀘스트가 나타나리라 짐작했다.
사흘이라는 시간이 걸리는 만큼 시간제한의 유예가 있을 것은 예상했지만, 그 뒤에 적힌 것은 이진한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것이었다.
‘클래스 업데이트가 있을 거라더니, 진짜였구나.’
『현자』
모든 클래스의 스킬을 제약 없이 극한까지 익힐 수 있는 히든 클래스였다.
…얼핏 들으면 매력적인 이야기였지만,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그냥 잡캐라는 소리였다. 거기에 익히는데 제약이 없을 뿐 경험치나 숙련도는 그대로 적용되었기에 다른 클래스에 비해 시간이나 재화가 몇 배는 더 필요했다.
우습게도 이진한은 돈도 시간도 넘치는 글러 먹은 한량이었다. 어떻게든 몸을 굴려 가며 경험치와 숙련도를 채웠고, 과금을 통해 그 시간을 비약적으로 단축하며 캐릭터를 육성했다.
진짜 문제는 육성하는 데 들어가는 시간과 재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들을 모두 ‘극한’까지만 익힐 수 있다는 것이 치명적인 점이었다.
검사라면 소드 마스터까지.
마법사라면 마도사까지.
궁사라면 보우 마스터까지.
신관이라면 추기경까지.
그랜드 마스터엔 도달하지 못했고, 대마도사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으며, 신궁의 이름을 갖는 것이 불가능했고, 교황이 되지 못했다.
그것들은 각 직업이 갖는 고유의 초월지경.
극한을 넘어선 초월의 경지이자, 현자라는 이름으로는 발을 내디디는 것조차 금지당한 영역이었다.
아쉽긴 했지만, 형평성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익힌 클래스 전부가 초월지경에 도달한다면 자신은 걸어 다니는 일인 군단이 될 터니.
하지만 2부가 업데이트되면서 그 제한이 풀린 것인지 메인 퀘스트의 보상으로 떡하니 나타났다. 그러니 이진한으로서는 눈이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베르너?”
이진한이 퀘스트창에 눈이 멀어있을 찰나, 그 모습을 의아하게 여긴 마후마임이 입을 열었다.
“…잠시 생각을 좀 했다.”
“그래서, 견적이 나왔나?”
“먼저 말해두지. 난 지는 싸움을 하지 않아. 상대가 궤를 벗어난 존재라고 판단되면 언제든 후퇴하겠다.”
굳이 결사의 각오로 싸울 이유는 없었다.
그 말에 마후마임도 호데르만도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차할 경우를 대비해 일반 주민은 모두 대피시켜 놓을 예정입니다. 나머지는, 대부분 용병이나 모험가이니 남을지 떠날지는 스스로 판단할 문제겠지요.”
“경비대는?”
“저희는 벨데르를 버리지 않습니다.”
가슴을 두드리며 말해오는 호데르만의 모습에 그 옆에서 듣던 마후마임이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의뢰를 받아들이겠는가?”
“…….”
이진한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고민했다.
‘선택지는 두 개인가.’
드래곤을 쓰러뜨리고 벨데르를 구할 것인지, 아니면 그들을 외면한 채 벨데르를 떠날 것인지.
솔직히 말하자면 전자 쪽은 미래가 불투명했지만, 퀘스트창에 적힌 보상이 눈에 아른거리며 유혹하는 몸짓을 해왔다.
“…그러면 보수 이야기를 해볼까.”
이윽고 결정을 내린 이진한은 싱긋 웃으며 마후마임을 바라보았다.
퀘스트창에 떠 오른 보상은 ‘월드’의 시스템이 주는 것. 그렇다면 경비대에 받아야 할 것도 있지 않겠는가.
이왕 이렇게 된 것 확실하게 뽑아먹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