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4.
“…르엘, 미르엘.”
“……?”
미르엘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다.
머리는 지끈거렸으며 전신은 물을 잔뜩 머금은 솜처럼 무겁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두 눈을 찌푸리며 초점을 잡으려 애썼고, 이내 자신을 내려다보는 한 쌍의 연분홍빛 눈동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엘레오노라 님?”
“정신이 들어요?”
엘레오노라는 자신의 품에 안겨 멍한 표정으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미르엘의 모습에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신성력에 의해 치료를 받았다곤 하나 그만한 출혈이 있었지 않은가.
맥박은 틀림없이 뛰고 있었지만, 쥐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읏?!”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살피는 엘레오노라를 보던 순간, 미르엘의 머릿속에 쓰러지기 직전의 다급한 상황이 떠올랐다.
그녀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황급히 제 주인의 품에서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조금 전의 격렬했던 싸움은 모두 신기루였던 것처럼 장내는 적막하기 짝이 없었다.
“엘레오노라 님. 이건 대체….”
미르엘의 시선이 제단 쪽으로 향했다.
그곳으로 이어지는 계단 위, 한 남자가 인상을 찌푸린 채 허공을 바라보며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의식을 잃었던 탓에 앞뒤 경과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자신들을 도와주었다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슬쩍 제 주인을 향해 묻자 엘레오노라는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목소리를 낮췄다.
“쉿. 저분이 바로 검은 현자님이세요.”
“…예?”
뜬금없는 이야기에 미르엘이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들자, 엘레오노라는 예상했던 반응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저희를 쫓아온 제국 암부의 조직원을 전부 쓰러뜨리고 당신의 상처까지 치료해주셨어요. 저도 아직 믿긴 힘들지만, 아무래도 이번은 천운이 따랐던 것 같네요.”
“그런.”
미르엘은 두 눈을 크게 뜨곤 가슴께를 더듬었다.
살이 찢기고 뼈가 부서지는 섬뜩한 싸늘함,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닥쳐온 불로 지지는 듯한 작열통까지. 의식을 잃기 직전 자신의 몸을 꿰뚫은 검들의 감촉은 아직 기억 속에 선명했다.
지금 역시 갑옷과 내의가 찢겨 나가 걸레짝이 되긴 했지만, 이전에 입었던 상처들은 흔적도 없이 치유되어 있었다.
미르엘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분이 진짜로 검은 현자님이시라면.”
온갖 이치와 이해에 통달한 자.
그 이름에 걸맞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일색이었으니, 잠시간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미르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도 괜찮아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출혈 때문에 손발 끝에 힘이 잘 들어가지는 않지만, 다른 상처는 없는 듯합니다. 그보다….”
그녀의 시선이 검은 현자에게 닿아 있는 것을 본 엘레오노라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년 만에 깨어나셔서 혼란스러우신 모양이에요.”
“그렇군요.”
미르엘은 감히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까마득한 전승 속에서 기록된 이름이었다. 천년이라는 긴 세월을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이후의 느낌을 어찌 공감할 수 있을까.
그녀는 천천히 검은 현자에게 이끌리듯 걸어 나갔다.
그 인기척에 이진한이 슬쩍 고개를 돌리자, 미르엘은 주먹 쥔 오른손을 왼쪽 가슴 위에 대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검은 현자께 감사를 표합니다. 저는 엘레오노라 님의 호위 기사인 미르엘 브레스트라 합니다.”
“깨어났나.”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을 미르엘 브레스트라 소개한 기사는 옅은 백금 색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를 지녔다. 피 웅덩이에 누워있을 땐 몰랐지만, 제대로 구색을 갖추니 눈이 동그랗게 뜨일 정도의 외모였다.
‘제법 심혈을 기울인 디자인이네.’
겨우 활성화된 「현자의 눈」으로 미르엘의 정보를 꿰뚫어 본 이진한은 속으로 감탄을 흘렸다.
속성은 ‘빙결’, 특성은 ‘고결함’이었다.
브레스트의 성은 제국의 변경을 책임지는 북부 사령관의 가문. 그렇다면 그녀 역시 옛 영웅의 피를 이은 존재라는 이야기가 되었다.
“…외람된 질문이오나, 정말로 검은 현자님이 맞는지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미르엘은 머뭇거리며 물어왔다. 홍옥의 색과 닮은 그 눈동자에 스쳐 지나간 것은 제 주인과 같은 간절함이었다.
이진한은 잠시 제 팔목에 걸린 에루스탄의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선택지를 고르는 분기점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근원의 마탑 최정상에 잠들어 있던 존재가 검은 현자가 아니라는 것이 더 개연성 없는 이야기지 않은가.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보는 것이 더 빠르겠지.”
딱-.
그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곧 기하학적인 문양이 장내를 가득 채우며 시커먼 깃털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가운데 오스칼 제국을 뜻하는 문양의 국기와 초승달이 새겨지며, 한 줄의 문장이 떠올랐다.
『검은 현자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며.』
“…와.”
엘레오노라는 나지막하게 감탄을 내뱉었다.
마법사인 그녀는 눈앞에 벌어진 현상이 극히 정교하고 수준 높은 경지의 마법임을 알 수 있었다.
미르엘 역시 비슷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이진한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1부 메인 에피소드의 최종 보스인 고대 신을 쓰러뜨린 랭커들은 그 업적을 기리고자 각각의 칭호가 붙은 훈장을 부여받았다.
눈앞에 펼쳐진 이 이펙트는 그 훈장의 부가 기능으로 주위에 있는 이들의 능력치가 소소하게나마 증가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역시 검은 머리 현자보단 검은 현자가 낫지.’
이진한이 받은 훈장의 이름은 원래 검은 머리 현자였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변경을 요청했고 그 결과 검은 현자가 되었다.
“이 정도면 믿음이 가겠지?”
“네.”
이진한이 씩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미르엘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마르딘 영지까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가 문제네요. 원래는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려고 했는데 저리되었으니…….”
엘레오노라는 아쉽다는 듯 제단 위를 바라보았다.
이전까지 형형색색의 빛무리를 내뿜던 그것은 제국 암부의 공격에 손상된 지 오래였다. 다른 곳이라면 어떻게든 손볼 수 있었을 터지만, 한가운데의 핵이 부서진 탓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거? 고치면 되지.”
이진한은 벽을 툭 치는 것으로 부서진 핵을 빼냈다. 그러곤 인벤토리에서 새로운 핵을 꺼내 그 빈자리를 채우자 텔레포트 게이트는 다시 다채로운 빛을 내며 정상적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엘레오노라는 입이 벌어졌다.
얼핏 보면 손쉽게 핵을 교체한 듯싶었지만, 텔레포트 게이트는 그 용도답게 고도의 설계와 정밀한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구조였다.
마도 공학을 전공으로 하는 어지간한 마법사라 할지라도 섣불리 텔레포트 게이트의 구조에 간섭하는 것을 어려워할 진데, 저리 간단히 수리를 끝낸다는 것은 이미 그러한 것들을 통달한 수준이라는 이야기였다.
‘도대체 얼마나 깊은 경지일까.’
엘레오노라는 그것이 무척 궁금했으나,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마력이 충전되려면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까.”
텔레포트 게이트의 수리를 끝낸 이진한은 고개를 돌려 마탑의 밑을 바라보았다.
현자의 눈으로 적지 않은 기척이 포착되었다.
그렇기에 시스템에 접속하자 아니나 다를까 일단의 무리가 마탑의 입구를 전부 점거하며 천천히 이쪽을 향해 올라오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검은 현자님?”
이진한의 시선이 밑으로 향한 것을 본 엘레오노라가 살짝 경직된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후속 부대가 마탑에 침입한 모양이네.”
“그러면……!”
“괜찮아. 어차피 이곳까지 오르진 못할 테니.”
굳이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었다.
「관리자 모드 접속」
마탑엔 마탑이란 이름답게 여러 함정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진한이 그것들을 발동시키자 마탑 내에 침입한 불청객들이 쓸려나가기 시작했다.
내친김에 이제까지 허용되던 통행증을 전부 삭제해버리는 것으로 외부의 침입을 봉쇄했다.
거기에 더해 경계 레벨을 최고로 올렸으니 어쭙잖은 실력으로 섣불리 발을 내디뎠다간 흔적도 없이 쓸려나갈 터였다.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오?”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에 이진한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이미 월드 내의 최고 레벨을 달성했기에 이때까지 경험치가 동결되어 있었다.
“만렙이 확장된 건가.”
경험치 항목을 확인하니 실제로 아주 미약하나마 그 수치가 조금 올라 있었다.
‘전부 다 합해서 겨우 0.01%인가.’
레벨 차이가 크게 났기에 아까 쓰러뜨렸던 이들로는 기별도 가지 않았던 것일 터. 마탑에 침입한 전부를 쓰러뜨리자 그제야 겨우 유의미한 수치가 되어 표시된 것 같았다.
“…침입자가 전부 사라졌어요.”
뒤늦게 마법으로 마탑에 침입한 이들의 기운을 살피고 있던 엘레오노라가 두 눈을 크게 뜬 채 놀람을 토했다.
“마탑의 주인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당연하지.”
웅웅-.
때마침 텔레포트 게이트가 마력의 충전을 끝냈음을 알려왔다.
관리자 모드의 접속을 해제한 이진한은 가볍게 손을 털며 그 앞에 섰다.
이제부터 해야 할 것은 명확했다.
【74:31:57】
시간의 풍파에 대한 유예는 시시각각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시간제한이라는 명확한 조건이 달려 있으니 앞으로의 스토리는 이걸 어떻게 해소하느냐로 진행될 터.
스피드런은 자신 있는 장르이기에 제법 흥이 돋았다.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친구 목록을 비롯해 길드나 연합 쪽에 메시지를 보내는 기능들이 전부 비활성화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독립 퀘스트라 메시지가 불가능한 건가?’
정 급하면 로그아웃 후 밖에서 연락하면 그만이다. 그러니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으며 머리를 긁었다.
“가자.”
“네.”
이진한의 말에 두 여성이 다가와 그 옆에 섰다.
“…저.”
막, 텔레포트 마법을 발동시킬 찰나 이진한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저희가 무어라 불러드려야 할까요?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까지 검은 현자님이라고 부르기엔 그러니…….”
“그렇네.”
그녀의 물음에 자신의 닉네임을 답하려던 이진한이 순간 멈칫했다.
“어, 그….”
월드의 랭커들은 그 명성답게 정신 나간 닉네임들이 많았다.
대부분이 운영 위반 정책과 정지 사유를 피하고자 수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것들이 대부분.
이진한은 그들과 비교하자면 비교적 정상적인 축에 속했지만, 그들과 비교해서이지 그도 멀쩡한 편은 아니었다.
평소에는 닉네임을 물은 NPC도 없었고 제 입으로 말하고 다닐 필요도 없었기에 일순간 말문이 막힌 것이었다.
“베르너, 내 이름은 베르너다.”
“베르너님이시군요.”
급하게 지어낸 이름치곤 나쁘지 않았다.
그러자 엘레오노라는 그 이름을 잊지 않겠다는 듯 몇 번이고 중얼거려왔다.
“……”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진한은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이들을 잡아다가 제국에 넘긴다면 꽤 짭짤한 보상을 주지 않을까?
‘시나리오 루트에도 있을 것 같은데.’
구원 파트에 배신 루트는 반전 서사가 아닌가.
제법 흥미가 생겼지만, 그래도 일단 영원의 결정 조각을 찾는 데에 집중해야 했기에 그 생각은 머릿속 한구석에 넣어두었다.
우웅-.
곧 텔레포트 게이트의 빛이 절정에 이르렀다.
온갖 기하학적인 술식이 허공에 떠올랐고, 이내 청명한 기운이 퍼져 나와 그들의 몸을 휘감았다.
“…윽.”
그 빛무리에 잠시 눈을 감았던 이진한은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작심하고 업데이트했네. 이런 부분까지 묘사하다니.’
물론 이전에도 상태 이상 중 실명이나 빛 번짐 같은 이펙트가 나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이펙트에 불과한바.
지금과 같이 사실적으로 눈살이 찌푸릴 정도로 선명하진 않았기에 이런 디테일한 요소까지 신경 쓴 개발자들을 향해 짜증 서린 감탄이 나왔다.
빛이 가라앉자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옅은 핏빛을 머금은 색이었다.
마경(魔境)의 하늘은 천년이 지나도 변화가 없는지 변함없는 칙칙함을 내뿜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도시의 전경은 기억하고 있던 것과 사뭇 달랐으니.
“…?”
텔레포트 게이트는 보통 제일 높은 고지대에 설치된 것이 보통이었다. 그 덕분에 도시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고, 반파된 마경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도시는 마치 폭격이라도 맞은 듯 이 근방에 멀쩡한 건물이 없었다. 그 자체로 짓이겨진 곳도 있었고, 거대한 무언가가 밀고 지나간 듯 이리저리 쓸린 흔적도 있었다.
“동작 그만-!”
그렇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텔레포트 게이트의 입구를 빠져나오자, 그들은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자신들을 포위한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환영 인사치고는 격하네.”
중무장한 병사들이 그들을 향해 날카로운 창끝을 겨눴다.
금방이라도 이쪽을 찔러올 듯한 그 흉흉한 기세에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