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3.
[어, 어찌 영혼에 간섭을…! 그대! 설마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
“이 정도도 못 해서야 검은 현자라 불릴 수 있을까.”
그극-.
이진한이 붙잡은 심장의 핵을 중심으로 망령의 몸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마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그 형체가 구겨지며, 점차 존재 자체가 지워져 갔다.
[그으아아악-!]
“그러니 적당히 깝죽거려야지.”
망령은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지만, 모두 헛된 시도였다.
할 수 있었던 최후의 발악은, 남은 기력을 모두 그러모아 손에 쥔 검을 엘레오노라 쪽에 힘껏 내던지는 것뿐이었다.
“…읏!”
그녀는 설마 자신 쪽이 노려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기에 황급히 마나를 끌어올려 그 앞에 실드를 만들어냈으나, 제 몸을 지키기엔 역부족이었다.
쉬익-!
애써 만들어낸 실드가 종잇장처럼 찢어진다. 이윽고 그 검 끝이 엘레오노라의 가슴을 꿰뚫기 직전.
촤르르륵-!
망령들의 몸을 속박하고 있는 것과 같은 주박의 사슬이 허공에서 솟구쳐 검을 옭아맸다.
“아….”
간발의 차이였다.
자신의 코앞에서 멈춰선 검 끝에 엘레오노라는 짧은 숨을 내쉬었다.
“애먹게 하고 있어.”
인상을 찌푸린 이진한은 내민 손을 거두었다. 그러자 주박의 사슬이 사라졌고, 힘을 잃은 검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으아아아아….]
최후의 발악이 수포로 돌아간 망령은 거짓된 육신과 함께 심장의 핵으로 그 전부가 모조리 빨려 들어갔으니.
콰직.
“이제 얌전히 죽어라.”
이진한은 망설임 없이 심장의 핵을 움켜쥠으로 그것을 산산이 부숴버렸다.
파스스스─.
망령의 영혼이 소멸하자 주박의 사슬에 속박되어 있던 다른 녀석들에게도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꼭두각시 신세라곤 하나 그 기반이 되는 육신은 엄연한 인간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 몸의 원주인 되는 이는 이미 옛적에 숨이 끊어진바. 그렇기에 그대로 축 늘어지며 움직임을 멈췄다.
이진한은 그것들 역시 모두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말끔히 태워버렸다. 그러곤 도입부의 퀘스트가 완료되었다는 메시지를 기다렸지만, 한참을 있어도 장내는 고요하기만 할 뿐이었다.
“…?”
이진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습격자들을 모두 쳐 죽이고, 위험에 빠진 황녀와 그 기사를 구해냈다.
이 정도까지 했으면 보통 다음 에피소드로 넘어가야 하지 않는가.
자신이 놓친 무언가가 더 있나 싶어 엘레오노라를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 머릿속을 울리는 이질적인 목소리에 두 눈을 크게 떴다.
『동결된 시간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2부의 메인 스토리가 해금되었습니다]
◈ 구시대의 몰락
◈ 신시대의 영웅들
◈ 창궐하는 마계
[그랜드 스토리가 해금되었습니다.]
[영원의 결정 - 수집률: 0%]
대륙 각지에 흩어진 영원의 결정을 수집하라. 그리한다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을 터니.
▷▶ 첫 번째 조각 위치: ??? ◀◁
여러 개의 메시지가 한 번에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상태창을 비롯한 UI 일부가 회복되었고, 이진한은 그럼 그렇지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제일 끄트머리에 있는 메시지에 닿았을 때.
[시간의 풍파에 의한 손상이 시작됩니다.]
“…손상?”
의미를 알 수 없는 내용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거, 검은 현자님!”
엘레오노라의 다급한 외침에 이진한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직 쓰러지지 않은 적이 남아 있기라도 한 것일까. 황급히 두 손에 마나를 피워 올리고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그녀의 경악한 시선은 오롯이 자신에게로 향해 있던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황급히 고개를 내리자 손발이 끝에서부터 삭아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생기를 잃은 피부는 쩍쩍 갈라졌고, 피가 흘러나오는 일도 없이 바스러지며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
월드는 그리 친절한 세계관이 아니었다.
레벨이 높아질수록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했으며 이진한 역시 수십, 아니 수백 번을 넘게 사망한 기록이 있었다.
고위 보스의 레이드 도중엔 지금처럼 팔다리가 날아가는 경우도 허다했지만, 그 정도면 싸게 쳤다고 받아들일 만큼 예삿일에 속했다.
어차피 모두 게임 속의 이야기가 아닌가.
더군다나 힐링 마법이나 포션을 사용한다면 금세 원형을 회복했으니,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건 조금 위험한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이때까지와 조금 다른 위기감이 그의 등줄기를 엄습했다.
업데이트되면서 무언가 환경적인 요인에 변수가 생겨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모두 지닌 원초적인 본능의 생존 욕구가 맹렬히 경고해오며 전신의 감각을 곤두서게 했다.
“대체….”
이진한은 당혹스러운 기분이었다.
수천 시간이 넘도록 월드를 플레이했지만, 지금과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몸이 삭아가는 와중에 더는 넋을 놓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그렇기에 이진한은 신성력과 마법을 이용해 다급히 몸을 치료했다.
하지만 풍화의 진행은 멎기는커녕 더욱 가속되고 있었다.
털썩.
왼쪽 다리가 무릎 근처까지 사라지며 그의 몸이 쓰러져 내렸다. 제 기사를 품에 안고 있던 엘레오노라가 다급한 표정으로 다가왔지만, 지금 그녀에게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동결된 시간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시간의 풍파에 의한 손상이 시작됩니다.]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한 원인은 저 두 메시지로부터였다.
동결된 시간, 시간의 풍파.
이진한은 두 키워드에 정신을 집중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그 원인부터 파악해야 했다.
하지만 단서가 극히 한정적인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메시지를 뒤적거리며 점점 다급해지는 숨을 내뱉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띠링-!
그때,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은 경쾌한 알림 소리가 이진한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영원의 결정 → 수집률: 0%]
[첫 번째 조각의 위치가 탐지되었습니다.]
◎ 에루스탄의 팔찌(레어)
소유주: 엘레오노라 폰 리베라
영원의 결정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나, 지금 이 타이밍에 언급되었다는 건 지금 상황과 분명 관련이 있다는 뜻이리라.
이진한이 엘레오노라를 향해 물었다.
“엘레오노라.”
“네? 아니, 현자님 그보다 몸이….”
“에루스탄의 팔찌를 가지고 있지?”
“….”
그 말에 엘레오노라의 몸이 굳었다.
마치 그것이 큰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경악한 표정을 짓기까지 했다.
“…현자님은 그런 것까지 알 수 있나요?”
“있는 거지?”
“네, 있어요. 그런데, 그건 왜…. 설마 그걸로 현자님의 상태를 호전시킬 수 있는 건가요?”
“아마도.”
확신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사용할 수 있는 수는 그것밖에 없으니, 이진한은 망설임 없이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엘레오노라는 잠시 손을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내 결심한 듯 품을 뒤적거리더니 목걸이에 걸린 팔찌를 꺼내 들었다.
툭.
검지의 끝을 살짝 찢은 그녀는 그 위에 피 한 방울을 흘렸다. 그러자 팔찌 주위로 붉은색의 수식이 나타나며 그 표면을 감싸고 있던 기이한 기운이 사라졌다.
‘혈계술식인가.’
온갖 마법을 꿰뚫어 보는 현자의 눈이 아직도 발동하지 않아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팔찌를 지키는 봉인 마법임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다만, 엘레오노나는 그 직후 머뭇거렸다.
무릎까지 사라져 버린 다리와 마찬가지로 팔 역시 팔꿈치까지 없어져 버렸기에, 어디에 착용시켜야 할지 몰랐기에 당황하던 그녀는 이내 팔뚝 안으로 그것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메시지와 함께 신체의 풍파가 멈췄다.
[영원의 결정이 지닌 힘에 의해 시간의 풍파가 일시적으로 유예됩니다.]
일시적으로 유예가 되었다는 부분에서 이진한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곧바로 회복 마법을 사용해 사라진 신체 부위를 되돌린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손끝을 주억거리자 선명히 되돌아온 감각이 느껴졌다.
─띡.
【75:00:00】
찌푸린 얼굴로 제 몸을 살필 찰나, 시야 한구석에 카운트가 표시되었다.
초 단위로 줄어드는 그것이 가리키는 유예는 약 사흘이 넘는 시간. 이진한은 어렵지 않게 그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흘 안에 다음 조각을 구하지 못하면 방금처럼 된다는 건가.’
그는 작게 신음을 토해내며 제 손목에 차인 팔찌를 매만졌다. 그러곤 옆에서 멀뚱히 서 있는 엘레오노라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팔찌는 고맙게 받지.”
“…네? 아니, 잠깐만, 그런….”
예상치 못했던 말인 듯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모습을 본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농담이다. 난 그렇게까지 날강도가 아니야.”
“…어찌 되었든 그 팔찌가 필요하신 거군요.”
엘레오노라의 눈에 희망이 깃들었다.
‘특별한 건가?’
팔찌 자체의 스탯은 평범했다.
무언가 잠재력이 숨어 있는 것도 아니고, 외관이 그리 예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까 보았던 혈계술식이나 그녀의 반응으로 보아 무언가의 상징성을 지녔거나, 다른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 제법 값어치가 나가는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
엘레오노라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이내 결심을 내렸는지 크게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에루스탄의 팔찌를 대가로 검은 현자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상당한 각오가 깃든 말이었지만, 이진한은 팔지를 툭 치며 고개를 기울였다.
“고작 이거 하나로 퉁 치겠다?”
엘레오노라를 돕게 되면 제국을 적으로 돌릴 가능성이 클 것이다. 팔찌가 중요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호구처럼 굴 생각은 없었다.
“….”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엘레오노라의 두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린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는지 두 주먹을 꽉 쥐며 말을 이었다.
“하, 하지만 영웅이시잖….”
“그건 맞지. 그런데, 그게 왜?”
“제국 황실과 관련된 이야기에요! 그들은 뿌리부터 썩어 있어요! 검은 현자님이시라면…!”
“그렇다면 너희를 지켜주는 것보다 잡아다가 제국에 넘기는 게 더 수지타산이 좋을 것 같은데.”
“읏!”
엘레오노라는 기겁하는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정말로 그렇게 하겠다는 소리가 아니라 좀 더 합당한 조건을 제시하라는 이야기였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받아들인 듯했다.
“그러니까 조금 더 그럴듯한 조건을 말하라고.”
어차피 에피소드의 흐름대로라면 이들과 동행하는 것은 결정된 사안. 그러니 뜯을 수 있는 만큼은 뜯어내고 싶었다.
“…지금 지닌 건 조금의 재화밖에 없어요. 하지만 저희가 목적지로 하는 곳에 제 조력자가 계세요. 그곳에 도착한다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보상을 약속드릴게요.”
엘레오노라는 제 옷자락의 끝을 붙잡으며 말해왔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대가의 상한선인 듯 눈앞으로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메인 퀘스트」 ─ ∑붉은 가넷의 수호자
◈ 오스칼 제국 황실에 쫓기는 엘레오노라 황녀 일행을 리베라 제국 마르딘 영지까지 호위하라.
보상: 에루스탄의 팔찌
‘흠.’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보통 귀족과 관련된 퀘스트는 보수가 짭짤했다.
더욱이 지금은 메인 퀘스트에다 귀족의 최상위 계급인 황족과 엮이지 않았는가. 추가적인 보상은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았지만, 제법 기대할 만한 것으로 보였다.
“수락하지.”
[퀘스트가 수락되었습니다.]
곧 퀘스트의 자세한 정보가 표시되었다.
엘레오노라의 목적지인 마르딘 영지는 이곳 동대륙이 아닌 서대륙 쪽에 있었다.
서대륙은 2부 업데이트와 동시에 오픈된 신 맵. 그러니 에피소드의 진행으로 자연스럽게 엮으려 하는 것일 터였다.
‘다들 슬슬 도입부는 끝났으려나.’
서대륙이 오픈되면 같은 랭커들끼리 레이드를 가기로 약속해놓았지만,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돼서야 당분간 개인행동을 해야 할 듯싶었다.
“엘레오노라. 내가 잠들어 있고 나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일련의 상황으로 보아 1부 에피소드 때와 시간 선이 직접 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것 같았다.
시간의 풍파에 의한 손상도 그렇고 업데이트를 기점으로 시대가 바뀌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터.
“아, 검은 현자님이 은거하신 직후 천년이 조금 더 넘게 지났어요. 혹시 다른 동료분들도 남아계시는가요? 저는 개인적으로 영원의 대마도사님을 존경하고 있어서….”
“…뭐?”
얼마가 지났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