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2.
이진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숙취 탓인지, 아니면 업데이트가 제대로 되지 않은 건지 시야가 뿌옇기 그지없었다.
자신의 상태를 알려주는 UI 역시 일그러져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했고, 전신은 물을 잔뜩 머금은 솜처럼 무거웠다.
“끄응.”
그렇다고 언제까지 누워있을 수는 없는 노릇, 천천히 몸을 일으켜 관에서 빠져나왔다. 그러자 그 앞에 주저앉아 있던 피투성이의 여성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내부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자신의 거처인 근원의 마탑 최정상, 천공의 회랑이었다.
다만, 불필요한 요소들이 많았다.
주박(珠箔)의 사슬에 속박된 상황에서도 농밀한 살기를 거두지 않는 녀석들이 어림잡아 수십이다. 여성을 한 번 흘깃 바라본 이진한은 이내 고개를 돌려 전신이 결박된 습격자에게 다가갔다.
“인간이 아닌데, 망령 계열인가?”
손을 뻗어 그 턱을 들어 올리자 인간의 형태를 했으면서도 그 동공 안에 아스라이 휘몰아치는 시뻘건 빛을 볼 수 있었다.
딱.
이진한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시퍼런 불꽃이 일어나 망령의 몸을 휘감으며 그 전신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 어어
순식간에 로브가 재로 변해 사라지고 메마른 육신이 모습을 드러낸다. 제 딴에는 얼마간 반항하는 것 같았지만, 이윽고 재조차 남기지 않은 채 깔끔히 소멸해버렸다.
“…아.”
엘레오노라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흑단처럼 검은 머리카락에 시퍼런 정광이 서린 한 쌍의 눈동자, 그리고 그 주변에서 흐르는 고고한 분위기는 옛적부터 내려오는 고대의 전승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이 사람이, 검은 현자…?’
검과 마법을 비롯한 온갖 것들에 능통하며 미래를 읽는 눈을 지니고 있다 하여 현자라 이름 붙여진 고대 영웅이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자그마치 천 년이다. 아무리 강한 존재라 할지라도 그 긴 세월을 피해갈 수는 없다.
하지만 검은 현자는 분명 온전한 모습으로 그녀의 앞에 서서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그때, 이진한의 입술이 달싹였다.
“이름.”
“…네?”
“이름이 뭐냐고.”
이진한은 슬며시 눈을 찌푸렸다.
엘레오노라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본래라면 상대의 본질을 꿰뚫어 보아야 할 현자의 눈이 제대로 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업데이트가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에피소드의 영향인지 물음표를 비롯해 생전 보지 못한 기호들로 도배가 되어 있었으니 답답할 노릇. 하지만 그 언짢음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 착각한 엘레오노라는 황급히 검은 현자에게 예를 표했다.
“에, 엘레오노라 폰 리베라. 제국의 3황녀입니다!”
“3황녀?”
생소한 호칭에 이진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머릿속을 뒤져보았지만, 제국에 엘레오노라라는 3황녀는 없었다.
황족이라곤 죄다 남자만 있어서 공주 캐릭터 한 명 없는 것이 게임이냐고 유저들의 원성이 자자하지 않았던가.
‘세계관 확장되면서 디테일한 요소가 달라졌나? 아니면 시간이 미래로 흘렀다던가?’
없을 법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대체로 많은 게임에서 사용하는 장치이니 어느 정도 그쪽에 무게가 실렸다.
“황녀를 습격하다니. 간도 큰 놈들이군.”
이진한은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엘레오노라가 정말로 황녀라면 제국의 핏줄을 습격한 간 큰 녀석들은 누구란 말인가.
더욱이, 어째서 자신의 거처에 들어와 추격전을 벌이고 있었던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이들은 제국의 암부에요. 마탑에 있는 텔레포트 게이트로 도망치려던 저를 쫓아온 거죠.”
“제국의 암부?”
제국의 암부라면 황실의 척살 부대가 아닌가.
‘반란이라도 도모한 건가.’
이진한은 가늘어진 눈으로 엘레오노라를 바라보았다.
UI라도 정상적으로 기능을 한다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하니 안개가 낀 것처럼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대화에 신중을 기했다.
마탑으로 도망쳐온 황녀, 그리고 그녀를 뒤쫓는 제국 암부의 척살 부대.
‘2부 에피소드의 도입부로는 적격이네.’
제법 흥미로운 전개가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이 상황은 근원의 마탑이란 요소로 이루어진 특수 퀘스트. 어쩌면 자신 ‘개인’에게 한정된 것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것이….”
“잠깐, 마탑에는 어떻게 들어온 거지?”
이진한은 곧 구구절절한 사정을 늘어놓으려던 엘레오노라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근원의 마탑엔 강력한 보호 마법이 걸려 있다. 분명 허락된 이들을 제외하곤 절대 출입을 할 수 없는 구조일 터였을 터.
“저는 황실 직계인 황녀의 책무로 그간 마탑의 관리를 도맡아 하고 있었어요.”
“관리를 도맡았다고? 언제부터?”
“성인식 이후였으니 벌써 3년은 더 되었네요.”
“3년이라.”
최소 3년은 더 지났다는 이야기였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그 애매한 시간의 흐름에 이진한은 침음을 흘리며 팔짱을 끼었다.
“…당신은, 검은 현자님이신가요?”
잠시간 눈치를 보던 엘레오노라는 두 손을 모은 채 간절한 얼굴로 물었다.
무언가 사연이 많아 보이는 그 모습에 이진한은 피식 웃었다.
눈에 뻔히 보이는 전개였다.
제국 암부에 쫓기고 있었으니 필시 역모나 그런 종류의 명목일 터다. 상태창을 비롯한 UI를 사용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 장치는 제법이었지만, 역시 그 이후에는 호불호를 줄이기 위해서인지 왕도적인 전개로 진행하려는 것 같았다.
“그보다, 저기서 죽어가는 녀석은?”
대답 대신, 이진한은 미르엘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진한은 월드의 탑랭커이자 온갖 컨텐츠를 마스터한 고인물. 그 때문에 엘레오노라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요소를 포착했다.
속박된 망령을 제외하고 저 중간쯤에 시뻘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인영이 하나 있었다. 기운이 미약한 것을 보니 곧바로 손을 쓰지 않는다면 금세 숨이 끊어질 터.
“…미르엘!”
엘레오노라는 잊고 있었다는 듯 창백한 얼굴로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그쪽으로 달려갔다.
엘레오노라의 부상 역시 가벼운 것은 아니나, 미르엘이라 불리는 기사는 등에서 가슴으로 몇 자루나 되는 검에 꿰뚫리는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웅웅-.
엘레오노라는 조심스레 힐링 마법을 사용했다.
몸에 꽂힌 검들을 섣불리 뺄 순 없었다.
겨우 피가 멈춘 상황에서 그것들을 건드렸다간, 걷잡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바닥에 고인 양만 해도 치사량에 가까운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미르엘의 상태가 더 나빠지지 않게 원기를 회복시켜주는 것이었다.
“윽.”
힐링을 퍼붓던 엘레오노라는 이내 신음을 토해내며 이를 악물었다.
조금 전까지 텔레포트 게이트를 활성화하기 위해 마나의 대부분을 소비했다. 그렇기에 심장을 쥐어 짜내듯 힘을 끌어올렸지만, 그 미약한 기운으로는 상처의 치유가 불가능했다.
“비켜봐.”
이진한은 엘레오노라를 옆으로 물리며 손을 뻗었다. 그러곤 망설임 따윈 없는 기색으로 검들의 손잡이를 붙잡더니, 이내 사정없이 그것들을 뽑아들었다.
“…!”
멎었던 피가 다시 분수처럼 사방에 뿜어지는 광경에 엘레오노라가 창백한 얼굴로 기함하며 그를 막으려 했으나, 그 직후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눈을 크게 떴다.
파아앗-!
이진한의 손 위에서 떠오른 새하얀 빛이 천천히 내려가 미르엘의 몸을 감싸기 시작한다. 그러자 흘러나오던 피가 멎었고, 상처는 순식간에 아물어갔다.
더없이 성스러운 신성(神聖)의 기운이었다.
‘온갖 것들에 능통하기에 현자라는 호칭이 붙었지만, 설마 신성력까지…!’
엘레오노라는 의심을 지웠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 앞에 서 있는 남자는 고대 전승에서 나오는 검은 현자 본인이 분명해보였다.
“으으….”
“미르엘!”
미르엘이 신음을 흘리자, 엘레오노라는 피가 묻는 것을 개의치 않으며 그녀를 품에 안아들었다.
“그러면….”
일단 급한 불은 껐기에 이진한은 손을 털며 고개를 돌렸다.
주박의 사슬에 속박된 이들이 아직 수십이나 남아 있다.
결박된 상황에서도 전신이 삐걱거릴 정도로 몸부림치며 어떻게든 빠져나오려 애썼지만, 그들의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쉬이이익-!
그때, 문밖에서부터 날카로운 파공성이 허공을 가르며 그들에게 쇄도해왔다.
“앗!”
엘레오노라는 그 기운이 텔레포트 게이트의 활성화를 방해한 것과 같은 것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렇기에 황급히 몸을 돌렸으나, 그것보다 먼저 이진한이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파캉-!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희뿌연 빛무리가 허공으로 흩어진다. 같잖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든 이진한은 가늘어진 눈으로 문가를 바라보았다.
“네가 이놈들의 우두머리인가?”
그그극-.
그 앞에 선 이는 주박의 사슬에 속박된 괴한들과 같은 모습의 존재였다.
다만,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소매 밑으로 길게 늘어진 잿빛 검이 바닥을 긁으며 기분 나쁜 소음을 자아냈다.
“검이라면 나도 조금 쓰는데.”
스릉-.
언제 뽑아 들었는지 모를 검이 이진한의 손에 들렸다.
그는 씩 웃으며 검 끝을 괴한에게 겨눴고, 이내 그 위로 시퍼런 불꽃이 서리며 어두컴컴했던 장내를 밝혔다.
파앗-.
벽에 서린 그림자가 일렁거렸을 때, 서로를 마주 보던 둘의 신형이 동시에 사라졌다.
“…아.”
푸른 불꽃과 잿빛 어둠이 부딪칠 때마다 서로의 색을 품은 파편들이 허공에 아스라이 흩어진다.
조금씩 맥박이 안정되어가는 미르엘을 품에 안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던 엘레오노라가 무심코 감탄을 흘릴 정도의 화려함이었다.
“…?”
맞댄 검을 거칠게 뿌리치는 것으로 잠시간 거리를 벌린 이진한은 인상을 쓰며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무언가 이상했다.
업데이트되면서 물리엔진이 바뀌기라도 한 것인가. 평소 플레이했을 때보다 몸이 무거웠고, 마나의 흐름도 생각처럼 원활하게 이어지지 않았다.
‘도입부라 능력치를 제한해 놓은 건가?’
일그러진 UI는 그대로였다. 시스템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도입부의 에피소드를 진행하기 위해 고의로 플레이어의 능력을 제한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긴, 내가 어지간히 강했어야지.”
이진한은 씩 웃으며 검을 치켜세웠다.
탑랭커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의 스펙을 지닌 자신이다. 이런저런 제한이라도 해두지 않는다면 에피소드를 진행하기 어렵다고 판단이 내려지더라도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그그극-.
망령은 마치 경련이라도 온 듯 목을 뒤틀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텅 빈 안구 안으로 시뻘건 빛이 번뜩였고, 이내 턱을 덜덜 떨며 입을 열었다.
[놀랍구나, 근원의 마탑에 내려오는 전승이 사실이었을 줄이야. 고대 영웅 중 한 명인 검은 현자를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노라.]
이진한은 슬쩍 허공을 바라보았다.
보통이었다면 그 위로 여러 개의 선택지가 떠오르는 분기점이었을 터지만, 지금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스스로 선택하라는 말인가?’
업데이트되면서 여러 가지 요소가 바뀐 듯했다. 아직 그런 것들이 익숙지 않았기에 살짝 머리를 긁던 그는 이내 기습적으로 땅을 박찼다.
쿵-!
푸른 불꽃에 휩싸인 검이 위에서 아래로 힘껏 휘둘러진다. 망령은 용케 그것을 막아냈지만, 그 충격으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거친 신음을 토해냈다.
[과연, 검에 서린 깊이가 다르다. 그 위명에 걸맞은 힘….]
“힘든 척하지 마. 거적때기나 뒤집어쓴 주제에.”
[….]
망령은 두 눈을 살짝 크게 뜨더니, 이내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그 말대로다. 이 몸은 내 인형에 불과하지. 설령 네 손에 쓰러진다고 하여도 내게 오는 타격은 전무하다.]
빈 동공 안에서 휘몰아치는 시뻘건 불빛은 마치 그를 비웃듯 요사스럽게 일렁거렸다.
“…잡몹 주제에.”
이진한은 서늘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한 것은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사실적으로 턱을 덜덜거리며 조소를 지어 보일 수 없지 않은가.
그그그극-.
그는 맞댄 검에 더 강한 힘을 가했다.
바닥 위로 불길한 소리가 들리며 균열이 퍼져나갔고, 검을 들고 있던 망령의 팔은 그 무거움을 이기지 못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뭐, 아무리 그래도 피륙이 베이는 고통은 나로서도 그리 유쾌하지 않다. 더욱이 검은 현자를 상대로 정면 싸움을 이어나갈 정도로 어리석지도 않지. 황녀를 처치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추격 놀음은 여기까지 해야겠군.]
동공에 일렁거리던 붉은 빛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이대로 간다면 영과 육신의 연결이 끊어져 놓치고 말게 될 터지만, 이번엔 이진한 쪽에서 비웃음을 흘리며 손을 뻗었을 따름이었다.
“누구 앞에서 도망가려고.”
검을 놓은 그의 손이 망령의 가슴을 꿰뚫었다. 살점을 파헤치고 뼈와 내장을 건드리는 낯선 느낌은 불쾌했지만, 이내 그 중심에서 원하던 것을 찾을 수 있었다.
[…!]
심장의 핵을 잡힌 망령이 두 눈을 부릅떴다.
사라져 가던 붉은 빛이 다시금 격렬하게 일렁거렸고, 이내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