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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화 (1/210)

◈ 001.

우웅-.

쓰레기며 옷가지가 널브러진 지저분한 방 안.

그 사이로 거슬리는 진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

이진한은 신음을 토해내며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였다.

전날 술을 거나하게 마신 탓에 조금 더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찰거머리 같은 방해꾼은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거칠게 손을 뻗어 머리맡을 더듬고는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형. 2부 업데이트 끝났는데 안 들어와요?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는 친한 동생의 것이었다.

머리는 여전히 지끈거렸다. 짓눌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쉴 찰나, 귓가에 맴도는 단어들에 두 눈을 번쩍 떴다.

“…2부 업데이트? 그게 오늘이었나?”

-네, 다들 이미 들어와 있어요. 서대륙 열리면 곧바로 들어갈 예정이라는데, 형은 언제 오냐고 연락해보라고 해서요.

“10분, 아니 5분만.”

-…음, 좀 애매하긴 한데 최대한 붙들고 있어 볼게요.

전화가 끊기자 그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숙취 때문에 머리는 아프고 속은 쓰려왔지만, 더는 맥없이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다.

“참나, 이걸 깜빡할 줄이야.”

중세 판타지풍의 VR MMORPG ‘월드’.

오늘은 그 2부 에피소드가 시작되는 대규모 업데이트 날이었다.

띠링-.

대충 세수만 끝낸 채 VR 헤드기어를 착용하자 눈앞으로 업데이트된 내용이 떠올랐다.

“마음 같아선 천천히 읽고 싶은데….”

2부의 업데이트가 끝나면 신맵인 서대륙이 오픈되는 바. 월드의 최상위 랭커 중 한 명인 이진한은 업데이트가 끝나자마자 서대륙 레이드의 약속이 잡혀 있었다.

기다리는 이가 수십인 상황에서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그는 다시 침대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았다.

“월드 링크.”

나지막한 목소리에 반응한 헤드기어가 진동하기 시작했고, 이진한의 의식은 곧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다.

***

“저흰 여기까진가 봅니다.”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머리를 돌리는 수하들의 모습에 미르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목적지가 코앞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조금만 더 달려간다면 머지않아 도착할 수 있을 정도로 지척에 이르렀지만, 그녀는 끝끝내 멀어져 가는 수하들을 붙잡지 못했다.

조금만, 머지않아.

그 짧은 시간을 벌기 위해 얼마나 많은 목숨이 희생되었는가.

더는 눈물을 흘리거나 비통한 슬픔을 내뱉지 않았다.

그저 스러진 그 목숨이 헛되지 않도록 말고삐를 더욱 강하게 움켜쥔 채, 입안에서 감도는 비릿한 피 내음을 씹어 삼키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엘레오노라 님.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그녀의 주인은 제 기사의 붉은 눈동자에 서린 비장함에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미르엘은 마음속으로 각오를 다졌다.

여정을 시작할 때 있었던 수십의 호위 기사도 이제는 혼자밖에 남지 않았다. 이 다음에 발목을 잡힌다면, 이제는 자신이 말머리를 돌려 수하들과 같은 전철을 밟아야 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기사로 서임 받는 순간 그녀를 위해 목숨을 다하겠노라 맹세했으니까. 그저 자신의 여린 주인을 홀로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눈에 밟힐 뿐이었다.

다행이라면 수하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는지 아주 잠시나마, 쫓아오는 적들의 기척이 멀어졌다는 것이었다.

“….”

엘레오노라는 제 기사의 결연한 표정을 보며 참담한 심정으로 고삐를 움켜쥐었다.

제국의 3황녀, 엘레오노라 폰 리베라.

부족한 것이 없고, 모자람이 없는 이름이었다.

황위 계승권의 순위는 다른 형제들보다 밀렸지만, 애초에 자신의 것이 아니라 생각했기에 복잡한 정치 싸움과는 거리가 먼,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황실 밑바닥에 숨겨진, 추악한 진실을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그랬었다.

“여기서부터 성역의 가장자리에요!”

엘레오노라는 가슴 한편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떨쳐내며 외쳤다.

제국 황실은 자신들의 비밀을 알아차린 이를 살려둔 바가 없었다.

설령 그것이 현 황제의 핏줄을 이은 황녀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고고하던 3황녀의 이름은 순식간에 역모를 도모한 반역자로 몰렸고, 이제껏 호의를 보내던 모든 이들이 창과 칼을 겨누며 그 목을 노려왔다.

제일 드높던 위치에서 도망자 신세까지.

순식간에 추락한 자신의 처지가 서글펐지만, 엘레오노라는 마음을 다잡았다.

‘조금만 더 가면…!’

초목이 울창한 숲이 눈앞으로 펼쳐진다. 자신들이 목적한 장소의 경계로 진입했다는 것을 알리는 증거였다.

얼마간의 질주 이후 탁 트인 공간에 도착했다.

그와 동시에 아무것도 없던 허허벌판의 평지 위로 하늘 높이 우뚝 솟은 검은 탑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성역(聖域), 또는 금지(禁地)라 불리는 땅.

천년도 더 전 고대라 명명된 시대에 악신(惡神)을 토벌한 영웅 중 한 명인 검은 현자가 세웠다고 알려진 근원의 마탑이었다.

“이랴-!”

목적지가 가시거리에 들어오자 엘레오노라의 마음이 급해졌다.

악신의 토벌 이후 모습을 감춘 검은 현자가 근원의 마탑 어딘가에서 잠들어 있다는 전설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벌써 천년도 더 지난 이야기. 구태여 이곳까지 도망쳐 온 것은 그런 불확실한 구시대의 설화 때문이 아니었다.

“텔레포트 게이트는 최상층에 있어요. 곧바로 그쪽을 향할 테니 뒤따라오세요.”

“알겠습니다.”

엘레오노라는 황족의 핏줄을 이은 의무로 성역의 관리를 맡았다. 그렇기에 이전에도 몇 번 근원의 마탑을 드나들었고, 그 구조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목적은 탑의 최상층에 있는 텔레포트 게이트. 그것을 이용해 멀리 달아날 생각이었다.

우우웅-.

마탑 입구에 이른 그들은 곧 말에서 내려섰다. 엘레오노라가 앞으로 나서며 새하얀 손가락으로 자물쇠를 쓰다듬자 문을 잠그고 있던 봉인이 해제되며 문이 열렸다.

그녀는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그 안에 들어갔다. 미르엘 역시 긴장감 어린 표정으로 등 뒤를 경계하며 그 뒤를 따랐고, 이내 마탑의 문이 닫히며 다시금 자물쇠가 걸렸다.

“저들도 열쇠를 가지고 왔을 테니 금세 쫓아올 거예요.”

“서둘러야겠군요.”

제국 암부 정도 되는 조직이 그 정도로 허술할 리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거의 달리듯 앞으로 나아가며 마탑의 계단을 올랐다.

“….”

미르엘은 등 뒤만을 의식했다.

검은 현자가 잠들어 있는 근원의 마탑에 들어온 것이 처음으로 생소하기 짝이 없는 환경이었지만, 그것에 넋을 잃고 있을 여유는 없다.

당장이라도 제국의 암부가 그 뒤를 쫓아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기에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웠다.

마탑의 정상은 열세 번째 층이었다.

미르엘은 기사인지라 그 정도로 지치진 않았지만, 마법사인 엘레오노라에게 있어서 그 많은 계단을 오른다는 것은 꽤 중노동에 속하는 일이었다.

“…후.”

“조금만 쉬었다 가시겠습니까.”

미르엘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제 주인을 바라보았다.

올라오면서 마법으로 신체를 강화했다고 하지만, 이때까지 누적된 피로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 적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조금 쉴 것을 권유했으나, 엘레오노라는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서두르죠.”

굳게 닫혀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붉은색의 카펫이 입구에서부터 안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그 끝에는 계단식으로 층이 나뉘어 있는 것이 마치 제단과도 같은 형태였다.

엘레오노라는 안쪽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제단의 중앙에는 커다란 관이 놓여 있었다. 기록에는 그 안에 검은 현자가 잠들어 있었다고 하지만, 이때까지 여러 사람이 여러 방법을 갈구해봤음에도 그것은 열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신경을 거둔 채 제단 벽에 걸려 있던 거울을 바라보았다.

우웅-.

그 위로 조심스럽게 마나를 흘려 넣자, 거울 형태의 텔레포트 게이트가 호응하듯 옅게 진동했다.

“…됐다.”

엘레오노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텔레포트 게이트는 예전처럼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이제 마나의 충전만 끝난다면 이곳을 빠져나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런다고 하더라도 일시적인 방편이지만.’

동대륙에선 제국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추격을 피하기 위해선 대륙 끄트머리에 있는 마경(魔境)을 넘어 서대륙으로 넘어가야 했다.

그 또한 긴 여정이 될 터. 복잡해진 머리에 엘레오노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타다다닥-!

“…읏, 엘레오노라 님!”

밑층에서부터 느껴지는 불온한 인기척에 미르엘이 다급히 제 주인을 불렀다.

“1분! 아니, 30초라도 충분하니까!”

엘레오노라의 얼굴에 다급함이 깃들었다.

텔레포트 게이트를 눈앞에 두자 마음이 잠깐 놓였지만, 아직 완전히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

혹시라도 이곳에서 붙잡혀 버린다면 자신을 위해 기꺼이 몸을 던진 수십 명,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의 희생이 허사가 되어버린다. 그렇기에 그녀는 더욱 필사적으로 텔레포트 게이트에 집중했다.

“쯧.”

미르엘은 제 대검을 움켜쥔 채 입구를 노려보았다.

결사의 각오로 맞선다고 할지라도 10초나 버틸 수 있을까. 아니, 의문을 가져선 안 됐다. 설령 사지가 찢겨 나간다고 할지라도, 그보다 더한 수치를 당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주인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야 했다.

콰앙-!

곧 입구의 문이 떨어져 나가듯 거칠게 열렸다.

그와 동시에 십수 명의 인원이 쏜살같이 안쪽으로 몸을 날리며 바람처럼 쇄도해왔다.

“하압-!”

대검 위로 차디찬 서리가 내려앉는다. 빙결의 기사라는 이명을 지닌, 그녀의 능력이 사방을 얼리며 괴한들의 발을 묶었다.

타다다닥-!

하지만 그들은 미르엘을 농락하듯 벽을 타고 천장을 뛰어넘으며 그 너머에 있는 엘레오노라를 노렸다.

“어딜!”

미르엘은 힘껏 땅을 박찼다. 그녀는 대검을 크게 휘둘러 천장을 달리던 이의 머리를 짓이기고, 벽면을 타고 달리던 이를 벽과 함께 꿰뚫어버렸다.

“엘레오노라 님!”

하지만 그녀 혼자선 전부 감당하기 힘든 숫자였다. 종래엔 검을 놓아버리고 두 팔을 휘둘러 빙결의 권능으로 사방을 얼어붙게 했지만, 결국 둘을 놓치고 말았다.

“치잇-!”

짧게 혀를 찬 미르엘은 몸을 돌려 땅을 박찼다. 허나, 그보다 그녀의 등을 노리고 쇄도하는 예기가 더 빨랐다.

푹-!

두 자루의 검이 갑옷을 꿰뚫으며 사정없이 그녀의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시뻘건 선혈이 튀어 오름과 동시에 화끈한 통증이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으나, 미르엘은 시야가 희미해지는 와중에도 힘껏 손을 뻗었다.

퍽-!

땅에서 솟아오른 얼음 기둥이 제단으로 몸을 날린 둘 중 한 명의 몸을 꿰뚫었다. 하지만 미르엘의 한계는 거기까지였다.

털썩.

“….”

자신의 마지막 남은 기사마저 허무하게 쓰러지는 것을 본 엘레오노라가 제 모든 마나를 퍼부어 텔레포트 게이트 활성화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그 끄트머리의 직전.

아주 찰나의 차이로 습격자의 검이 그녀에게 먼저 도달했다.

“큭…!”

엘레오노라는 힘껏 몸을 비틀었다.

마법사치고 재빠른 몸놀림 덕분에 치명상은 피했지만, 왼쪽 어깨의 살점이 뭉텅이로 베여 나가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그녀는 바닥을 구르는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오른팔을 내밀어 남은 마나를 끌어 모았고, 텔레포트 게이트를 향해 힘껏 뻗었다.

이제 시동어만 읊으면 텔레포트가 활성화될 터.

엘레오노라는 흘깃 미르엘이 쓰러진 곳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중심으로 피 웅덩이가 점점 번져나가며 부서진 갑옷만이 그 주변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미르엘….’

평생을 옆에서 지켜주었던, 자매와도 같았던 존재.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멈출 수 없었다.

자신의 목숨은, 자신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으니.

“[텔레포…!]”

쐐애애애애액-!

그 순간, 빛살처럼 허공을 가르며 날아든 한 줄이 기운이 텔레포트 게이트를 가격했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마법이 발동될 것처럼 반짝거리던 빛은 가라앉았고, 그녀가 애써 주입했던 마나도 허공에 흩어져버렸다.

“…아.”

엘레오노라의 얼굴에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최후의 수단이었다.

유일하게 제국을 빠져나갈 방법이, 그 끝에서 허무하게 막혀버리고 말았다.

습격자들은 주저앉은 그녀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들 중 하나가 검을 들어 올리자, 엘레오노라는 곧 찾아올 죽음의 공포에 눈물을 흘리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하지만 얼마가 지나도 각오했던 고통은 없었다.

설마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죽음을 맞이한 것인가 의문이 들었지만, 슬며시 두 눈을 뜨자 보이는 광경에 서서히 입이 벌어졌다.

드드드드-.

허공에서 솟구쳐 나온 보랏빛 사슬이 괴한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

아니, 팔 뿐이 아니었다. 움직임을 원천 봉쇄하려는 것인지 전신을 옭아매고 있는 상태였다.

“…이건.”

엘레오노라는 떨리는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자신의 앞에 있는 괴한뿐만 아니라 이 공간에 침입한 이들 전부가 그 사슬에 묶여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신세가 된 상태였으니, 도무지 알 수 없는 현상에 그저 멍하니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그 순간,

끼익, 끼이익-.

그녀의 등 뒤로 천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굳게 닫혀 있었을 터인 검은 현자의 관이 소음을 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쿵.

관의 뚜껑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곧 그 안에서 몸을 일으킨 남자는 몇 번 헛기침을 내뱉더니 이내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로딩이 왜 이렇게 긴 거야. 기다리다가 숨질 뻔했네.”

물론, 엘레오노라로서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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