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9화 - 샤를은 그 의식을 몇 번이고 봐왔다. 이 의식이 거행해지는 일 사이에 자신이 끼어 있다는 게 이상한 느낌이었다.
곧이어 렘 노인이 의식을 거행하고, 비로소 일곱 조각으로 나뉜 석판이 이전과 같이 분배되었다.
제자들이 하나씩 나눠 가졌으며, 하나는 사이먼이, 다른 것들은 이계로 던져버린다.
사이먼은 앞으로 있을 미래에 헤르메스에게 지배당한 트리메스에게 석판 조각을 넘겨줘야 한다. 샤를의 말을 듣고 난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렘 노인은 그가 태어났던 곳에 자신의 관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천 년간 동면을 거행하기로 했다.
석판을 잃더라도 그가 가진 능력이라면 어려울 것은 없었다.
비로소 큰 줄기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나머지 자잘한 줄기의 운명은 샤를이 손대지 않더라도 그렇게 되도록 진행되게 되어 있다.
샤를은 마지막 석판 조각은 일부러 이계를 관통하도록 설정했다.
저 석판 조각은 수많은 이계를 관통하면서, 동시에 4명의 악신을 끌어당기게 될 것이었다.
비로소 차원을 넘어서 게임을 하고 있던 김연수에게 도달하게 될 테지.
이 기묘한 인과를 재구성하고 나서 석판 조각을 이용해 이 과거를 특정했다.
샤를은 눈을 떴다. 어느새 자신이 눈을 감고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변동된 미래에 도착했다.’
이전과 매우 흡사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같지는 않은 세계에 도착했다.
샤를은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면서 운명의 수정치를 읽었다.
샤를의 이야기에는 아무런 수정이 가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왔어?”
옆에 있던 파기나레코르가 날아왔다. 그녀는 어느새 마도서에서 빠져 나와 영체화를 푼 상태였다.
아른아른거리는 금발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날린다.
“선각자를 해치웠어.”
“잘했네!”
파기나레코르는 싱글벙글 웃었다. 그 천진난만한 미소 속에 감추고 있는 생각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선각자가 파괴되면서 내게 말하더군. 이 세계는 언젠가 또다시 깨어날 수밖에 없다고.”
“응. 그건 맞는 말이야. 지금 당장 선각자를 죽였다고 해도, 먼 미래에 자연스럽게 새로운 선각자가 등장하게 되겠지.”
“그럼 또다시 새로운 선각자와 관리자의 싸움이 시작되고?”
“맞아.”
파기나레코르는 그 싸움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 했다. 샤를은 그 이야기를 듣고는 말했다.
“두 흑막의 싸움에 피해를 받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샤를의 여정 전부를 살펴보면 결국 관리자와 선각자가 만들어낸 스노우볼에 함께 휩쓸린 사람들뿐이었다.
“원래 사람은 죽는 거야. 이번 싸움은 그래도 꽤 사상자가 적은 편인걸? 아무튼, 잘 해줬어. 이제 모든 일이 끝났어.”
“아예 여기서 그만두면 어떨까?”
“그게 무슨 소리야?”
파기나레코르의 질문에 샤를이 대답했다.
“이 꿈을 절대자에게서 분리해내는 거지.”
“……그게 가능해?”
세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관리자인 파기나레코르로서도 놀라운 말이라, 입을 벙긋벙긋하고 있었을 때, 나이 지긋한 노인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가능하다고 보네만.”
파기나레코르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렘 노인이 서 있었다. 그는 지긋한 눈으로 어느새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과거를 수정한 결과, 렘 노인은 살아있었고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샤를은 이 전에 과거를 변경하기 전, 렘 노인에게 협력을 받기로 했었다.
*
렘 노인의 집에서 차를 마시고 나서 샤를은 포탈을 열어 헤르메스를 쫓아가기 전에,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이 세상이 누군가의 꿈이라는 건 알고 계십니까?”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네. 샤를 군.”
이 진실은 옆에 있는 제자들이 아연실색할 정도였으나 렘 노인은 느긋한 표정으로 옆집에 마실 나간다는 듯 말했다.
“때론 이 세계를 고찰하다 보면 세계와 같은 위상에 공허처럼 무언가 뻥 뚫려 있는 걸 발견하고는 하지.”
“얘기가 빠르겠군요. 나는 그자에게서 꿈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얘기지?”
“관리자나 선각자처럼, 세계에 있어서는 안 될 부자연스러운 요소들을 제거하고 싶다는 것이죠. 완전히 새로운 꿈을 꾸게 해주는 겁니다.”
렘 노인이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샤를의 말을 경청했다.
*
“석판은 아무래도 이 ‘절대자의 꿈’이 아니라 그 바깥에서 온 것 같기 때문이라네. 관리자여.”
“……그래.”
샤를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이런 석판에 근원이 없는 이유. 렘 노인도, 심지어 파기나레코르도 이 석판의 연원을 모른다.
이런 엄청난 힘을 가진 것이 이 세계의 누군가가 만들었다는 건 생각하기 어렵다. 그럼 뻔하지. 이건 꿈 밖에서 만들어진 물건이다.
“석판의 힘을 사용해서 ‘의식’을 치르면 어떨까? 절대자에게 바치는 의식이지.”
“…….”
파기나레코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절대자는 우리 세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아. 우리를 인식하고 있지도 않지. 그냥 단지 꿈을 꾸고 있을 뿐이고.”
“그래서 해봤어?”
샤를의 질문에 파기나레코르가 당황한 듯 말했다.
“아, 아니?”
“해보자고.”
“후후. 처음에 샤를 군에게 이 제안을 받았을 때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으나, 곰곰이 생각해봤더니 될 것 같기도 하다네. 내가 의식 마법의 대가이거든.”
렘 노인은 그 능력을 따라잡을 자 없는 대단한 마도사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존재도 인식하지 못할 까마득히 높은 차원에 있는 존재에 대해 인식하고 있기도 했고.
그가 집행하는 의식에, 제물을 바치면서 이 꿈 대신, 다른 꿈을 꾸라고 절대자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파기나레코르가 그 말을 듣고 당황하면서 말했다.
“정말로 그러겠다고? 이제 끝난 상황인걸? 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세상은 멸망하지 않아.”
“하지만 언젠가는 또다시 선각자가 나타나겠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 절대자와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꿈이 깨어질 수도 있어.”
“감수해야지.”
“다른 꿈을 꾼다면, 이 꿈이 없어질 수도 있어.”
“시작은 절대자의 꿈이었겠지만, 이제는 피조물들의 현실이야. 그러니 우리는 자유로워질 권리가 있지.”
샤를은 희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수천 년 뒤의 또 다른 싸움? 그런 건 무한하면서 동시에 의미 없는 것이다.
“……좋아. 그렇게 원한다면 나도 말리지는 않을 게.”
“그동안 즐거웠다. 파기나레코르. 앞으로 어떻게 되던 널 잊지 않을 게.”
“……즐거웠어.”
이 세상이 꿈이 아니게 되면 파기나레코르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흔쾌히 그 일에 응하겠다고 했다.
“뭐, 죽으면 죽는 거지.”
그녀는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렘 노인이 손을 펴자 바닥에서 거대한 원탁이 솟아올랐다.
거인의 뼈로 만든 이 원탁은 이전에 석판을 쪼개던 의식을 집행하던 것이었다.
“자, 여기 석판을 올려두게.”
샤를은 심상 세계로 들어가, 무존자를 만났다.
무존자는 샤를과 만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 오벨리스크에서 분리된 석판이 날아와 저절로 샤를에게 날아왔다.
그도 석판을 이용하는 것에 동의한 것이었다. 샤를의 생각과 행동을 여태 공유해왔던 무존자로써는 이것이 정당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한번 얻었던 무존자의 신위가 사라지지도 않을 테고 말이다.
-행운을 빌지.
무존자는 싱긋 웃으면서 샤를을 내보냈다.
“무존자의 말은 처음으로 들은 것 같네.”
샤를은 온전한 석판을 꺼내서 렘 노인이 만든 원탁 위로 올렸다.
빛나는 원탁 위에는 수천 년 동안 분리되었다가 근래에 결합한 석판이 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의식을 거행…….”
-잠깐, 나도 끼어야겠다네.
문글로즈가 불쑥 튀어나왔다. 늘 함께 다니던 루미너스는 어디에다 뒀는지 몰라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카드는 퍽 웃기는 것이었다.
-나도 이 의식에 참여하고 싶어. 절대자에게 이 꿈 바깥으로 나가게 해달라고 빌 거라네.
“제물이 없잖아?”
-나 자신이 제물이지.
렘 노인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샤를을 바라보았다. 샤를은 그와 눈을 마주치고 난 다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의식을 거행하지. 이 축문이 통하면 좋을 텐데 말일세.”
렘 노인은 처음 듣는 축문을 읊었다. 샤를은 석판에 손을 뻗으면서 절대자를 불렀다.
눈을 감고 거행하는 의식에 정신을 맡기자, 곧 눈앞이 흐릿해지면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주변의 공간에 공허가 몰려오면서 의식을 거행하는 자들의 생각을 끌어가는 것 같았다.
*
“응?”
샤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슨 천사들이 나팔 불고 있는 빛의 정원이나 아득한 차원계에 있는 거대한 보석으로 이뤄진 천상궁……같은 걸 생각해봤으나 여긴 그런 곳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곳이었다.
“병원이잖아?”
이 시대의 병원이 아니라, 전자기기와 첨단 설비들이 나열된 미래의 병원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어둡지?”
창밖을 바라보니 그냥 어두컴컴했다. 병원 내부를 걸어 다녔다. 아무래도 밤이라서 그런 듯했다.
계속 걷다가, 샤를은 불이 켜진 병실을 발견했다.
들어가기 전에 이름표를 확인했다. 한글로 적혀져 있는 이름 세 글자.
“……?”
김연수?
샤를은 당황하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병실 문을 열자, 그리고 그곳에 누워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김연수가 그곳에 누워있었다. 첨단 장비들이 그에게 부착되어 있었고 바이털 사인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고요한 병실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뭐, 뭐야?”
어떻게 된 것이지? 샤를은 재빨리 병실을 뒤졌다.
여기서 알 수 있는 흔적은, 김연수가 지금 깊은 코마 상태에 빠져 있었고, 그의 가족들이 그를 돌보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병실 옆에 있는 공책을 펼치자마자, 첫 번째 페이지가 보였다.
『게임 속 사이비 교주가 되었다.』
그 책의 첫 페이지에는 마도서와, 왕관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뒤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설정집이 나왔다. 이건 메트로폴의 설정이었다.
그리고 샤를과 또 다른 사람들의 설정집이다.
그러니까…….
정신이 혼란해진 샤를은 뒷걸음질했다. 이게 대체 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는 절대자를 만나러 왔을 뿐인데, 어째서 빙의되기 전의 자신의 신체를 발견했던 것인가?
-너무 그렇게 당황해할 것 없어. 생각보다는 빨리 왔네. 네가 마지막이야. 렘 노인도 소원을 빌었고, 문글로즈도 소원을 빌었어.
누군가 말을 걸자, 샤를은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넌 지금 날 보고 있지.
말을 건 사람은 눈앞에서 누워서 곤히 잠들어 있는 김연수였다.
“넌, 뭐야? 난 대체 누구지? 여긴 어디야?”
-음. 어디서부터 말해줄까. 그래. 처음 시작부터 말해주는 게 좋겠군.
김연수가 말했다.
-일단, 넌 내가 아니야. 내 예전 기억을 가진 내 이야기의 주인공 샤를 헥센이지.
“……뭐라고?”
-원래 빙의물 주인공은 현대 지식을 좀 갖고 있어야 하잖아? 그래서 내 옛날 버전을 약간 첨가했어. 게임 폐인이던 시절을 말이야.
“그게 무슨……. 그럼 네가 절대자란 말이냐?”
-그들이 날 그렇게 부르는 편이지.
흔들리는 샤를의 눈동자가 대답을 갈구했다.
“……왜?”
-왜냐고? 하하하.
모든 것이 함축된 질문에 여전히 곤히 잠든 김연수는 샤를에게 말했다.
-예술가는 늘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하는 편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