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8화 - 틈 사이로 빠져나오니, 주변의 황량한 풍경이 보였다.
마음을 얼어붙게 할 정도로 황량한 땅에선 불길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모래바람 사이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색 가루들이 날아다녔고 하늘은 지독할 정도로 핏빛에 가까웠다.
생물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이 공간에서, 샤를은 저 멀리 끝에 있는 첨탑을 보았다.
협곡 너머에 있는 그 성은 동화에서 나오는 사악한 마왕이 사는 성 같았다.
뭐, 어떤 의미에선 그 사악한 마왕이 맞긴 하다.
터벅터벅 걷는다고 하고 싶었으나 어느새 샤를은 그 성 앞에 도착해있었다.
성안으로 발을 내딛자 성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성문을 열었다.
동시에 바닥에 카페트가 깔리면서 저절로 움직이는 촛대는 자리를 잡고 불을 피웠다.
따라 들어가자 곧 알현실에 있는 왕이 보였다. 역시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광명자는 전신이 빛나고 있었다고 하면, 헤르메스는 전신이 기이한 문자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실루엣 자체는 사람처럼 보였으나 바탕에 기이하게 일렁이는 무채색의 무늬들이 전부 다 기이한 문자의 모음처럼 생겼다.
-왔는가? 이방인이여.
“이렇게보니 반갑네.”
일반인이라면 저 형태를 직시하기만 하더라도 치솟는 계몽을 감당하지 못해서 미쳐버리고 말 것이었다.
그를 똑바로 직시하고 있는 샤를은 일견 평범한 인간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으렷다.
헤르메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어째서인지 그대와 내가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군. 내 권능을 왜 그대가 가지고 있는가?
“지배의 권능? 네게서 ‘구매’했지.”
-흐음. 오염된 권능이다만, 나와 거래를 했단 말인가? 내 기억에 없는 것을 보면 너는 이 시간대에서 온 것이 아니라 먼 미래에서 왔구나.
“그렇기도하고, 아니기도 하지.”
샤를이 석판의 힘으로 이 시간대를 ‘확정’하지 않는 이상 여긴 그냥 기록 속일 뿐이었다.
-네놈의 의향을 모르겠군.
“그 선각자인가 뭔가가 누군지 궁금해서.”
-재미있는 이방인이로구나.
헤르메스가 몸을 일으켰다.
-선각자와 관리자에 대한 정보는, 그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은 일일 터. 그런데 어찌 알고 있느냐?
“…….”
-이런, 물어본 내가 어리석었군. 그 정보를 알고 있기 때문에, 내 앞에 선 것이로구나.
“……하아.”
-?
“왜케 거만해?”
-뭐…라, 고?
헤르메스는 여태까지 자신의 앞에서 이렇게 무도하게 말하는 존재는 처음 보았으므로, 이렇게까지 분노한 적도 처음이었다.
너무 화가나면 오히려 차분해지는 것처럼, 헤르메스는 얌전히 샤를의 말을 듣고 있었다.
“너 때문에 내가 고생한 걸 하나하나 읊어보자면 끝도 없다.”
온갖 귀찮은 일에 휘말렸고, 트리메스가 저지른 일의 뒤처리를 도맡아 해야했으며, 최종적으로 트리메스를 처리한 이후에도 닥쳐오는 재앙의 별인지 뭔지가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미래의 네가 저지를 일이 내게 너무 스트레스라고. 알아 들어?”
-…….
“난 그냥 평범한 게이머였을 뿐인데 이 세계에 끌려 들어와서 뺑이만 쳤어.”
-……내가?
“그래. 너 때문이야. 네가 하는, 세상을 멸망시키겠다는 그 뭐시기한 이론 때문에!”
-미래에, 내가 그런다고?
정황으로 보아, 아직 헤르메스는 자신이 미래에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하지만 샤를은 이제 헤르메스가 무슨 말을 하건 상관없이 그동안 있었던 울분을 내뱉었다.
“돈이 많아? 어!? 돈이 많아봤자 아무 쓸데도 없어. 곧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세상이 멸망하고 절대자가 꿈에서 깨어나니 세상은 망해버리겠지. 그럼 돈이 아무리 많아봤자 뭐해?”
-…….
“또 있어. 비밀 세계의 일을 한다고 내 생업이고 뭐고 없어졌어. 온갖 사이코패스들이 넘쳐나는 메트로폴에 활개를 치니 취미생활도 못한 다고. 뭐 할 것 있나 싶으면 갑분 –광신도 등장- 케헤헤헤 메트로폴을 지옥으로 만들어주마! 이런다고.”
-……나는 광신도는 키우지 않는 다만.
“아, 아무튼 너 때문이야. 사악한 4대신이 메트로폴을 접수하려고 한다고? 아무튼 너 때문임. 뭐? 세상이 망해? 너 때문이야.”
이 부당한 호소에 헤르메스는 어이가 없어진 나머지 말했다.
-아니, 내가 왜? 선각자에게 제안을 받았다만, 난 아직 선각자와 계약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미래의 일을 지금 가지고 나한테 그러는 건가?
“아무튼 앞으로 그럴 예정이니까 죽어!”
-진짜로 미친놈이로다.
샤를은 예전에 떠올렸던 생각을 다시금 되새겼다. 아기 히틀러는 죄가 없다고? 틀렸다.
아기─헤르메스는 죄가 있어요!
샤를은 무존자의 모든 권능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무존자는 샤를과 별개의 개체로 분리되었다만, 그는 샤를의 생각과 의지를 계승하고 있었다.
그러니 샤를에게 자신의 힘이 이어지는 모든 통로를 개방해뒀다.
전신에 넘쳐흐르는 에너지를 해방시켰다. 반신의 신체가 아니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에너지는 샤를이 든 인과율의 창 끝에서 폭발했다.
쏘아진 거대한 섬광 사이로 헤르메스가 드디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신체는 지금까지 보여왔던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듯 그의 발밑이 폭발하며 진정한 신체가 드러났다.
무채색의 거대한 몸뚱이와 그 주변을 두르는 문자들이 이리저리 흩날리는 게 보인다.
-나약한 존재여. 미래의 업보를 되갚으려고 왔느냐? 날 쓰러트리고 얘기해보거라.
“안 그래도 그렇게 할 참이었어.”
거대한 거인의 몸뚱이에서 수십개로 갈라진 갈래 광선이 쏘아졌다. 너무 빨라서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그건 그를 감싸고 있던 문자의 구성처럼 보였다.
그 광선은 샤를이 생각하기만해도 휘어서 옆으로 빗나갔다.
염동력이 궤에 오르자, 무존자의 능력은 이미 염동력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가 있었다.
무존자는 샤를이 여태까지 쌓아온 모든 능력들을 극대화했다.
염동력, 나비를 통한 환상과 소환술, 겨울 주문과 창 주문을 통해서 열기를 관리하는 능력을 개화했다.
그 끝에 생겨난 것은 그야말로 거대한 현실 조작 능력이었다.
샤를은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는 능력이었으나, 이 현실 조작 주문이 낯설지 않다고 느꼈다. 그의 능력이 진화한 끝에 도달한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느꼈기에.
헤르메스가 거대한 주먹을 허공에서 내려치자 대지가 갈라지며 천지가 진동했다.
부서진 성이 침몰하는 도중에도 샤를은 차분하게 인과율의 창을 그에게 찔러댔다.
-그 창…….
창에 패인 자국이 재생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은 헤르메스는 샤를을 보면서 어쩐지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내가 미래에 만들어낼 물건인 것 같군.
“이것도 네가 만들었냐?”
-그 연원조차 몰랐단 말인가? 운명을 다루는 신 치고는 꽤나 능력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구나.
그래, 이런 흉악한 물건을 만들어낼 것은 헤르메스 정도 밖에 없다.
샤를은 창을 들어서 재차 헤르메스를 겨누었다. 그는 자신의 파괴된 신체를 보면서 웃으면서 샤를을 가리켰다.
-네 창이 무엇으로 만든 것인지 아느냐? 이 세상의 모든 죄악을 담은 것이다. 나는 신이 되면서 업보라는 것에 주목을 했지.
헤르메스는 손을 들어올리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기엔 온갖 굴레와 업보가 깃들어 있다. 탄압받는자, 탄압하는자, 살해당하는자의 고통같은 죄와 고통이 깃들어 있지.
“아, 그래서?”
샤를은 헤르메스의 주먹을 타고 치솟았다. 그리고 창날로 팔을 그대로 베어버렸다.
베어진 팔은 엄청난 글자를 내뿜으면서 그 몸에서 잘려 나갔다.
-감히 내 팔을…….
말이 많네. 샤를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짓쳐 올라, 헤르메스의 어깨를 타고 올랐다. 거대한 헤르메스의 다른 쪽 손이 그대로 뻗어져 샤를을 향해 짓쳐 들어왔다.
잽싸게 뛰어오른 샤를은 그대로 인과율의 창을 들고 고대의 원시인처럼, 투창 자세를 취했다.
헤르메스의 이마를 향해 던진 인과율의 창이 그대로 이마에 푹 박혀들었다.
-끄아아아아아악.
정보가 타올랐다. 인과율의 창에 닿은 부위는 마치 소멸되는 것처럼 모든 부위가 말소된다.
그 말소는 계속해서 번져나가며서 헤르메스의 전신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거, 잘 아는 사람이.”
헤르메스의 전투력은 예상 이하였다. 뒤에서 협잡질이나 하는 놈이 얼마나 강할까 싶다만.
그 거대한 신성과 위엄도 수많은 전투로 숙련된 샤를에게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것이었다.
미래의 헤르메스라면 또 모를까, 과거에 신이 된지 얼마 되지 않은 헤르메스는 이렇게도 나약한 것이었다.
그때, 헤르메스의 척추뼈 쪽에서 검은색 물체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거인의 신체에서 탈출했다.
샤를은 탈출한 헤르메스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그것을 붙잡았다.
저 멀리 있었으나 그에게 공간은 이제 별로 의미 없는 장벽이었다.
-이 자식! 복수해주마!
“잡혀서 어떻게 하게? 넌 어째 트리메스보다 약하냐.”
-그게 누군데?
“있어, 네가 조종하던 꼭두각시. 마음껏 이리저리 농락하니까 나중에 그 꼭두각시도 반기를 든다니까 글쎄.”
꼭두각시 술사는 꼭두각시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면 그럴 듯하다. 원래 클리셰에선 인형이 없어지면 인형사는 아무것도 못하는 것이지.
“자, 이제 정보를 좀 불어주셔야겠어. 선각자는 어디에 있고 뭐, 그런 것들 말이야.”
샤를이 그를 고문하기도 전에, 헤르메스가 입을 열었다.
-선각자는 저기 있다. 알현실에 있는 왕관의 보석 알에 깃들어있지.
“아하. 빠르게 대답하니 빠르게 해결해주지.”
샤를은 헤르메스를 그대로 구겨버린 뒤에 양손을 덮듯이 싸맸다. 자신의 권능을 이용해서 헤르메스를 압축하기 시작했다.
잠시 뒤, 그곳에는 무채색의 구슬이 한 개 놓여있었다.
구슬 안에서는 봉인된 헤르메스가 괴성을 지르고 있었으나, 밖으로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지혜가 뛰어난 헤르메스를 감금하기 위해선 힘을 보여야할 필요가 있다. 압도적인 권능의 힘 앞에서는 지혜와 계책은 아무 의미가 없으므로.
샤를은 곧이어 알현실 중앙에 있는 왕관을 손에 들었다.
-결국 이렇게 됐군.
안에서 누군가의 정신파가 느껴졌다. 이자가 선각자일 터였다.
“파기나레코르가 너한테 안부 전해달라는데. 이름이 뭐냐?”
-트렌스코드. 그게 내 이름이다. 관리자가 내게 안부를? 뜻밖이군.
“유언은?”
-내가 죽는 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건 없다. 깨어나고 싶어하는 절대자는 언젠가 깨어나게 되어 있다. 내가 죽더라도, 그건 바뀌지 않아.
“그건 내가 관리자랑 쇼부를 좀 쳐보고 해결할게.”
-후후. 파기나레코르가 계약자 하나는 잘 고른 모양이군. 그럼.
샤를이 살짝 손에 힘을 주자 선각자의 왕관이 그대로 부숴져 산산이 흩어졌다.
비로소 샤를은 멸망의 근원을 처리한 것이었다.
헤르메스도 봉인했다. 그리고 선각자도 처치했다. 이제 남은 건…….
“파기랑 얘기를 끝내봐야겠군.”
그 전에 현실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공간 바깥으로 나가자, 렘 노인과 그 제자들이 샤를을 기다리고 있었다. 렘 노인이 현기어린 눈동자로 샤를을 바라보았다.
“어서오시게. 문제는 해결했는가?”
“그렇죠.”
“그럼 석판을 분리하는 의식에서 자네가 우리의 입회인이 되어줬으면 한다네.”
샤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을 해결하고 나면 이제 파기나레코르와의 대담만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