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7화 - 잠깐 이상해진 머리를 붙잡았다. 그냥 과거의 기억을 엿보고 있었을 뿐인데……. 어째서인지 주변의 모든 공간이 뒤바뀌어 있었다.
그는 수천 년 전의 과거에 들어와서 고대의 역사에 간섭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만큼 긴박한 순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멍청하게 시간을 낭비할수록 그가 위험해진다.
샤를은 잘라냈던 수도(手刀)를 되돌려서 수평으로 만든 다음, 그대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끄아아아아아아!
헤르메스가 갈라낸 현실의 틈 사이가 엄청난 속도로 메워지고 있었다.
바깥으로 빠져 나왔던 검은색 연기는 샤를이 가하는 엄청난 염동력의 압박 때문에 우그러들기 시작했다.
-네놈, 네놈 대체 뭐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철학적인 질문이군, 나 자신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설명하기 어려운데.
-아직 난 끝나지 않았다. 다음에 보자 방해꾼.
검은색 어둠으로 일그러진 공간은 곧이어 샤를의 힘에 의해 완전히 닫혀버렸다.
“크흐. 자넨 대체 누구지? 여긴 왜 온 건가?”
사이먼은 그제야 고통에서 벗어났는지 켁켁 대던 것을 멈추고 조금 찡그린 표정으로 샤를을 바라보며 말했다.
샤를은 그가 말하는 고대 렘어에 맞춰서 고대 렘어로 얘기했다.
“나는 샤를 헥센입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 꿈이나 환상 같은 것이다.
“아무래도 얘기할 것이 많이 남아있는 것 같군요.”
*
“그러니까, 자네가 아주 머나먼 미래의 고대인이고, 석판 조각을 모두 모았더니 여기로 오게 되었다는 건가?”
“네. 그 말이죠.”
“상상하기 어려운 얘기군.”
사이먼은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내가 배신자가 된다고? 그리고 다른 은하계에 있는 별로 가서 신 행세를 하다가 헤르메스에게 제거당하고?”
“네.”
“방금 그 일격에 당했으면, 정말로 그랬을지도 모르겠군.”
사이먼은 자신의 목을 쓸어내렸다. 헤르메스가 그를 잠식하려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만약 샤를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헤르메스의 꼭두각시가 되어서 그가 하는 행동대로 움직이게 되었을 것이다.
“그 건은 정말 고맙다고 말할 수밖에 없군. 자네가 날 살려줬어.”
“헤르메스는 당신을 통해서 그 의식에 참여하려고 했을 겁니다. 그 일에 실패한 이상, 또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겠죠.”
샤를은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건 단순한 시간 여행이 아니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와는 감각이 다르다.
트리메스를 쫓아서 과거로 갈 때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세계라는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지금은 단순히 과거의 기록에 개입한 것이다.
‘일종의 폐쇄 공간이겠지.’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재생하는 폐쇄적인 공간에 샤를은 갇혀 버리게 되었다. 본인이 스스로 들어왔지만 어떻게 나가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럼 이럴 게 아니지, 스승님께 가세. 당장 이 석판을 노리는 자에 대한 것을 알려야 하네.”
사이먼은 샤를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 즉시 달리기 시작했다.
고대의 영성자인 사이먼은, 무슨 포탄처럼 달리기 시작했는데 샤를이 따라오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움직였다.
“엄청 빠르군.”
샤를은 염동력으로 몸을 띄워서 그를 따라갔다. 렘 시대의 지구는 기존의 지형과는 심히 다른 데다, 기온도 달랐고 품고 있는 생명력도 달랐다.
환경오염이라는 것이 없는 맑은 밤하늘에는 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사이먼을 따라 도착한 곳에는 렘 노인이 오스굿의 시중을 받으면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커헉! 스승님! 스승님!”
“무슨 일이냐 사이먼? 네가 이렇게 조급하게 굴다니.”
렘 노인은 신선 같은 수염을 쓸어내리면서 자신의 찻잔을 내려놓았다.
“크, 큰일 났습니다. 석판을 노리는 자가 있어요. 그리고 그자가 절 잠식해서 꼭두각시로 쓰려고 했는데 갑자기 저 정체불명의 미래인 친구가 튀어나와서 날 도와줬습니다.”
‘아.’
무슨 설명을 이렇게 두서없게 하는지 샤를은 어이가 없었지만, 렘 노인은 ‘척하면 착하고’ 알아듣듯이 이해한 다음, 차분하게 고개를 돌려 샤를에게 물었다.
“자네는 누구지?”
샤를은 일전에 사이먼에게 말하던 대로 그대로 말했다.
“미래의…….”
렘 노인은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수염을 쓸면서 말했다.
“그럼 지금 석판이 두 개가 동시에 존재하는 셈이군.”
“정말 그렇네요?”
오스굿은 샤를의 내면에 있는 석판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미래의 오스구나아아텔이 되기 전의 오스굿은 그저 평범한 여자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 공간이 지금 폐쇄 공간이 되었다는 것이 된다.”
“네? 폐쇄 공간?”
오스굿이 당황해서 반문했다.
샤를이 생각한 것과 똑같은 결론을 내린 렘 노인이 말했다.
“석판이 기록장치인 것은 알고 있겠지?”
“네.”
“지금 우리는 기록물 일부가 된 것이다. 그동안 살아왔던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아카이브인 것이지.”
“그럼 여기가 기록 속이라고요?”
“그 기록은 계속해서 반복 재생하게 될 거다.”
오스굿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여태까지 그들이 살아온 그것과 기억, 경험들, 심지어 말하고 있는데도 그들이 모두 기록일 뿐이라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럼 우린 모두 가짜입니까? 스승님?”
사이먼이 묻자 렘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일단 미래에서 온 객에게 제대로 된 차도 대접하지 못했구나. 오스굿. 차를 내오렴.”
“네, 스승님.”
렘 노인은 현기가 느껴지는 눈동자로 샤를을 바라보았다. 과연, 고대의 현인답다. 본인의 이름이 시대 자체를 일컫는 이름이 될 정도로 위대한 위인.
“자네의 목적이 무엇인고?”
“헤르메스를 죽이고, 물리 세계와 비밀 세계를 영원히 나눠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실시간으로 무너지는 현실을 지탱할 수 있다.
이대로 계속 이어가다간 공허가 너무 커지고 절대자가 깨어나며 현실이 붕괴하게 될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니, 렘 노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런데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되었는가?”
“석판 일곱 개를 모은 뒤, 그것이 보여주는 환영을 보고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개입하게 되었군요.”
“석판을 가진 존재는, 자신이 스스로도 의도했건, 그렇지 않았건 간에 자신의 목적을 향해 운명이 저절로 인도하곤 하지.”
샤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트리메스를 처치할 때도 그렇고 절로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므로.
“그러니 자네가 해결할 일은 이 기록물 사이에서 찾을 수 있을 거라네. 현실에 있다는 헤르메스를 처치할 방법이, 이 시간대에 있는 것이야.”
“네.”
“자네의 이야기를 듣자 하니, 내 이 선택이 아주 많은 미래를 바꾸게 될 것 같군……. 나의 죽음인가.”
렘 노인은 내일 있을 의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듣고는 긴히 생각했다.
“이렇게 하지. 나도 자네를 돕겠네.”
“감사합니다.”
“대신, 이 기록물(아카이브)을 진짜 역사로 바꿔주게.”
“네?”
샤를이 되묻자 렘 노인이 끌끌하고 웃었다.
“아직 석판의 모든 힘을 제대로 각성한 것은 아니군. 그렇지?”
“네. 일곱 개를 모으고 나자마자 곧바로 이 공간에 들어오게 되었으니까요.”
“석판은 단순한 기록물 그 이상이라네. 기록된 내용을 ‘편집’할 수도 있지. 그러니 자네의 역사에서 ‘내’가 실패하고 죽었을 과거를, 대체해달라는 것이지.”
“그럼, 제게 있어서 현실이 뒤바뀌는 게 아닙니까?”
“정말 그 정도로 현실이 바뀔까?”
샤를은 나비효과 때문에 그렇게 물었으나, 문득 떠올렸다.
운명 조작 주문을 통해서 본 이 세상의 운명의 실들은 매우 정교하게 이어져 있다.
그리고 어떤 관성을 지녀서, 큰 문제가 없다면 그 미래로 향하게끔 운명의 실이 자동으로 조정된다.
여기서 많은 부분이 수정된다 하더라도, 미래가 바뀌지 않게 할 수 있다.
선결 조건.
1.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칠 렘 노인이 미래까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2. 또한, 석판 조각을 7개로 나누는 의식도 제대로 집행해야 한다. 7개로 나눠지지 않으면 샤를이 이 세계로 오지 못하게 되니까.
3. 헤르메스가 살아있어야 한다. 헤르메스를 여기서 죽이면 샤를이 있는 미래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 정도의 선결 과제만 해결한다면 대부분의 미래는 샤를의 현실로 수렴하게 될 것이다.
샤를과 렘 노인의 대담을 듣던 사이먼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스승님께서는 우리가 진짜이기도 하고 가짜이기도 한 거라고 하셨군요.”
그들은 폐쇄 공간에 존재하지만, 미래인 샤를이 석판의 힘으로 이 과거를 진짜로 확정하는 순간 그들은 그대로 살아갈 수 있다.
그가 조금 안도하는 사이, 샤를이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치러야 할 그 대가도 알고 계십니까?”
렘 노인은 껄껄 웃으면서 약속했다.
“당연한 일이로고.”
“예? 무슨 말인가요?”
“별 거 아니니라.”
제자들이 묻자 렘 노인은 그것에 대해 대충 얼버무렸다.
만약 기록물을 수정해서 과거를 되돌린다 하여도 그가 없던 세계처럼, 아무 행동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예시로 들면 깊은 동면에 빠져든다거나,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은거하게 되겠지.
이걸로 렘 노인에게서 협력을 얻게 된다면 남는 장사다.
“좋네. 거래는 끝났으니 그럼 당장 헤르메스라는 자부터 추적하지.”
렘 노인과의 거래가 끝나자 그는 사이먼을 불러서 자신의 앞에 데려왔다.
“어쩌다 그런 사악한 놈과 엮이게 되었는고?”
“죄송합니다. 스승님. 불초 제자가 심려를 끼쳐 드렸습니다.”
“탓하는 건 아니란다. 자, 이리 앉아서 내게 등을 보여라.”
렘 노인은 사이먼과 어울렸던 헤르메스를 추적하기 위해 자신의 석판이 가지고 있는 힘을 끌어 올렸다.
렘 노인이 석판을 사용하는 것은 샤를보다 더 능숙했다.
본래라면 남지 않았어야 할 흔적이, 렘 노인이 사이먼의 등에 손을 가져다 대자마자 나타났다.
사이먼의 옆에 나타난 거대한 공간이 보였다.
“저기가 어디지?”
렘 노인이 눈을 깜박였다. 그로서도 처음 보는 공간인 듯했다.
샤를은 유심히 렘 노인이 열어 재낀 공간을 바라보았다. 동그란 차원문이다.
공간 내부로 어두운 바탕이 보이고 중앙에는 첨탑이 높이 솟아있는 거대한 성이 보였다.
이곳의 좌표를 기억한 샤를은 헤르메스가 있는 공간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자네, 저곳으로 들어갈 셈인가?”
“네. 들어가서 헤르메스와 얘기를 좀 나눠보고 싶군요.”
“조심하게. 들어가기 전에 석판의 힘을 모두 활성화하는 것도 잊지 말고.”
“그렇게 하죠.”
들어가기 전에 샤를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무존자를 바라보았다.
트리메스가 조언했던 대로, 그는 무존자와 자신을 다른 존재로 분리했다.
무존자는 샤를을 바라보면서 무표정하게 있었다. 저것이, 신이 된 자신이라는 것인가?
샤를의 생각은 길게 이어가지 못했다. 무존자가 손짓하여 샤를의 몸에 있는 특이한 문자를 하나로 모아 그의 가슴에 옮겼다.
그러자, 샤를은 곧 자신이 무존자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할 수 있는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렘 노인이 열어버린 차원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