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6화 - -그런 거라면 잘 찾아왔네.
하릴없는 한량처럼 시간만 죽이는 문글로즈는 카드 위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헤르메스를 찾을 방법이 없다는 거지? 놈이 보낸 하수인은 이 별을 멸망시키러 날아오고 있는데 말이야.
“맞아.”
팔짱을 낀 샤를이 대답하자 문글로즈가 말했다.
-자네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가장 근본적인 의문이야.
“뭐지?”
-자네의 심상 세계에선, 자네는 온전히 무존자의 힘을 행사할 수 있지.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지. 그렇지 않나?
“그런데?”
-자네가 이제부터 수련해야 할 것은 무존자의 힘을 끌어내는 거야. 현실의 자네는 반신일 뿐이지만 무존자는 심상 세계에서 온전히 신의 역할을 하고 있지. 자네와 무존자를 완전히 분리하거나, 혹은 그 반대로 무존자와 급속도로 가까워져야 한다네.
“그게 무슨 얘기지? 둘은 완전히 다른 얘기가 아닌가?”
-그 말대로, 상극의 얘기지만 그 극의에 도달하면 똑같아진다네. 예를 들어, 자네와 무존자가 더 가까워진다면 계속 동화가 진행되어서 현실에서도 무존자의 힘을 끌어낼 수 있지.
“근데 분리하면?”
-자네와 무존자를 분리해낸다면 자네는 무존자와 무엇보다 가까운 별개의 개체가 된다네. 하지만 일전에 같은 존재였던 바, 너무나도 가까워진 존재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도 무존자에게서 힘을 빌려서 사용할 수 있지.
결국, 둘은 같은 결과점을 향해 나아가지만, 이 과정이 극과 극이라는 것이었다.
-어느 것을 선택하더라도 자네에게 해가 되는 건 없다네.
“분리하겠어.”
-그래? 신이 되고 싶지 않은 것인가? 이대로 온전한 신이 된다면 억겁의 세월을 불멸자로 살아갈 수 있을 텐데 말이야.
“마냥 좋은 것 같지도 않단 말이지. 그 불멸자라는 것.”
샤를은 요새 아무 것도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고, 잠을 자지 않아도 졸음이 오지 않는 상태였다.
그러나 늘 전신에 힘이 충만한 상태다. 하지만 이게 정상적인 상태인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건 사람이 아니잖아.”
-흠. 뭐, 본인의 선택은 존중하겠다만, 이해는 가지 않는군. 영원한 삶을 포기하겠단 말이야. 뭐, 그게 인간이라는 거겠지.
문글로즈는 본인도 인간이었을 적이 있었음에도, 마치 처음부터 불멸자였던 것 같은 식으로 얘기하고 있었다.
-이제, 자네는 곧 석판을 해석하러 가겠지?
“그래.”
-한 가지 말해둘 것이 있다네.
“뭐지?”
-석판의 힘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물건이라네, 더 강력한 힘을 갖고 있기도 했고. 이 세계가 뒤집힐 수도 있는 위험한 물건이라는 것을 알아뒀으면 좋겠군.
“……이미 알고 있어.”
문글로즈는 낄낄거리면서 손을 흔들었다. 샤를은 아직도 그가 꿍꿍이가 있나 싶어서 잠깐 노려보았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헤르메스를 찾으려면 그 석판을 이용하게, 결국 숨어있는 그를 찾기 위해서는 헤르메스에 대한 정보가 필요한 게 아닌가?
“그렇지.”
-하지만 자네는 헤르메스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어. 수박 겉핥기식으로 피상적인 정보만 알고 있다는 거지.
“하지만 인간 세상에는 헤르메스에 대한 정보가 극히 적어. 그가 무엇을 관장하는지, 인간에서 신이 되었다, 그 정도뿐이지.”
소년 시절의 샤를 헥센이 헤르메스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신기할 정도로, 그 정보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이전의 샤를이 헤르메스와 접촉하게 된 경위도, 우연히 고서에 기록된 헤르메스 소환법에 따른 것이었다.
물론, 그 방법을 지금 시도해 보았으나 전혀 먹히지 않았다.
문글로즈가 손가락을 들었다.
-석판 속에서 헤르메스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게나. 원래 신이라는 족속들은 수천 년이 지나도 예전과는 거의 달라지지 않는, 보수적인 놈들이거든.
“좋아. 네 말대로 해보지.”
그의 충고를 받아들인 샤를은 곧 심상 세계로 들어갔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고 그 바닥에 거대한 크레이터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건 트리메스가 최후까지 발악하기 위해서 자신이 신이 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던 신성의 씨앗을 폭탄으로 만든 것이다.
‘신성의 씨앗이 터진 곳이군.’
하늘에서 떨어진 유성이 땅을 강타하듯 바닥이 갈라지고 흙먼지가 뒤덮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안정화되었고 지금은 크레이터만 남아 있었다.
샤를은 마지막 석판 조각을 들고 오벨리스크 아래로 향했다. 그 아래 중앙에 놓일 부위에, 계시의 석판 조각을 들어서 뻗었다.
석판 조각이 끼워지면서 거대한 울림이 느껴졌다. 끼워진 석판의 사이사이가 맞춰지고 곧이어 모든 석판 조각이 제자리를 되찾고 완벽한 계시의 석판으로 완성되었다.
샤를은 신대문자의 첫 문장부터 읽기 시작했다.
『계시의 석판.』
『이것은 절대자의 꿈 밖에서 만들어진 계시의 석판이다. 만들어진 이유는…….』
밑의 글을 읽고 샤를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절대자가 깨어나기 전에 모든 꿈의 기억과 기록을 담기 위해서이다.』
『석판은 꿈의 법칙을 조작하는 제어 장치다.』
『언젠가……세상을 파괴하고 다시 재창조하리라. 그리하여 새로운 우주가 태어나리라.』
“이게 무슨…….”
그 순간,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샤를은 석판이 합쳐지면서, 이전에 파괴되었던 기억이 다시 재생되는 것을 느꼈다.
기존의 영상보다 조금 더 앞선 시점이 샤를의 눈앞에 펼쳐졌다.
원탁 앞에 앉은 렘 노인이 그를 둘러싸고 앉은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끝났다.”
현명한 에이브라함, 거친 마쉬, 자애로운 오스굿, 유능한 사이먼, 똑똑한 크래프트, 의뭉스러운 문글로즈.
여섯 제자들은 그가 세상을 주유하면서 석판의 힘을 사용할 때, 그의 가르침을 받겠다며 온 제자들이었다.
그리고 렘 노인은 그들과 함께 세상을 유랑하면서 이 혼탁한 시대에 난무한 혼돈을 잠재우고 질서를 세웠다.
“이 석판의 문구를 전부 해석해냈다.”
“그게 정말입니까 스승님?”
에이브라함이 묻자 렘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꿈은 이 우주를 의미한다.”
“예?”
여태까지 그들은 몇 개의 문구를 해석하고 있다가, 꿈이라는 단어에서 막히고 말았다.
신대문자는 그 뜻이 너무 많아 해석이 여러 방향으로 갈렸지만, 이 방식의 해석이 맞다고 렘 노인이 결론을 내렸다.
“그럼……. 석판에 의하면 이 석판이 세상을 멸망시킬 장치라는 것이 아닙니까?”
크래프트가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지 못하고 묻자 렘 노인이 말했다.
“그렇단다. 이 석판은 우리 우주 밖에서 들어왔으며, ‘꿈’인 우리 우주를 멸망시킬 시초가 될 것이다.”
렘 노인은 그런 위험한 물건이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는 것에 한탄을 금치 못했다.
젊었을 적의 그 날, 집 뒤쪽에 떨어진 운석을 기이하다며 살펴보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하지만 그는 운석을 뒤지던 도중 석판을 찾아냈고 석판에 담긴 무한한 힘을 이용해 세상에 그의 뜻을 바로 세웠다.
석판의 힘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평정했고 질서와 규칙을 만들었으나, 이 석판이 정작 제일 위험한 혼돈일 줄은 노인도 이제야 알게 된 것이었다.
“그럼 스승님. 그거 없애버리시죠.”
마쉬가 말하자 사이먼이 대답했다.
“스승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석판이 없으면 거인족이나 용족, 인어 족같은 종족들이 또다시 발호해서 인간 세상을 침략하게 될 것입니다.”
“사이먼! 이 멍청한 녀석. 우리에겐 주문을 다루는 방법이 생기지 않았나? 영성자들을 더 많이 양성하면 된다. 덤벼들면 모조리 잡아서 죽이면 되니까.”
마쉬가 사이먼을 질책하자 사이먼이 발끈하며 대답했다.
“사형 같은 호전적인 인간은 다른 인간의 희생에는 둔감하겠죠. 하지만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그 전쟁에서 희생될지는 생각해보셨습니까?”
“그까짓 놈들, 우리가 없었다면 수천은 더 죽었을 거다. 전쟁에서 병사가 희생되는 건 필연적인 일이야.”
“그만해라. 스승님의 앞이다.”
에이브라함이 둘을 말리자 씩씩거리던 둘은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오스굿이 렘 노인에게 말했다.
“스승님,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스승님의 의중에 따르겠습니다.”
렘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의 견해를 얘기했다.
“이 석판은 너무 위험하다……. 실로 석판 자체만으로도 세상을 멸망시킬지도 모르는 것이다. 내가 이 신대문자를 해석하기 전이라면 모르겠으나, 신대문자를 해석한 이후에 혹여나 사특한 자에게 이 석판이 흘러가게 된다면,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다.”
“아예 가루로 만들어서 조각내버리시죠. 그럼 박살나지 않겠습니까?”
마쉬가 신이 나서 스승에게 말했다. 렘 노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석판은 그 무엇으로도 파괴할 수 없다. 조각나더라도 그 모습을 온전히 갖추고 있을 거다. 그러니, 일곱 조각으로 나누어, 온 세상에 흩뜨리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그 누구도 찾을 수 없도록 말이다.”
“스승님!”
사이먼이 다그쳤으나, 대제자인 에이브라함이 손을 들어 올렸다.
“모든 것은 스승님께서 결정하셨다. 반발이 있을 수도 있으나, 우리는 모두 스승님의 말을 따르기로 맹세하지 않았나?”
“그건, 맞습니다. 대사형.”
“그렇다면 스승님의 말씀을 따르자. 일곱 개로 나뉜 석판 조각을 각자 어디다 보관할지 생각해보도록.”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들 해산했다. 사이먼은 원망스럽다는 표정으로 렘 노인을 쳐다보았으나 고집스러운 눈매를 보아하니 말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리하여 사이먼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사가(私家)로 돌아와 아쉬움을 내비치고 있을 무렵. 그의 뒤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헤르메스인가?”
-그래, 나다.
사이먼은 조금 이전의 시간대에 태어나 인간에서 신이 된 헤르메스와 사적으로 교류하고 있었다.
옆쪽에 공간이 트이면서 검은색 연기처럼 생긴 헤르메스가 나타났다. 그는 눈과 손이 있긴 했지만, 실체를 가지고 있진 않았다.
사이먼은 헤르메스에게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헤르메스가 말했다.
-그럼 스승을 배신하면 될 것이 아닌가?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날 구해주고 키워주신 스승님을 배신하라고?”
-나약하군. 자기 뜻을 관철하려면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베어야 한다.
“난 못해.”
-이해를 못 하는군. 이건 권유가 아니라 명령이다.
“뭐라고? 난 네게 명령 같은 건 듣지 않는…….”
그때였다. 열린 틈사이에서 헤르메스의 검은색 안개가 흘러 들어가 사이먼의 얼굴로 향했다.
-석판을 탈취하려고 했지만, 너무 늦은 것 같군.
“크아아아아아악!”
사이먼은 온몸을 비틀면서 헤르메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샤를은 그 모습을 영상으로 지켜보았다. 그럼 사이먼이 처음부터 배신하려던 것이 아니라 헤르메스의 강압 때문에 배신하게 되었다는 건가.
그러다가 여기서 만약 사이먼이 헤르메스에게 당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다는 생각에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는 아주 손쉽게, 열려 있는 공간의 틈에서 나온 검은색 연기를 잘라냈다.
“어라?”
“응?”
“켁. 켁. 켁.”
처음은 수도(手刀)로 헤르메스의 영향력을 잘라내자 당황한 샤를이었고, 두 번째는 갑작스럽게 난입한 상대를 보고 놀란 헤르메스였으며 세 번째는 헤르메스에게 당할뻔하다가 겨우 그 영향력에서 벗어난 사이먼이었다.
“뭐야?”
“뭐냐!? 네놈은!?”
“켁. 켁!”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