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3화 - 에세나의 뒤로는 무명 교단에서 모집한 여러 영성자들이 있었다.
숫자는 많지 않지만 풍기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매우 강해보인다.
그들은 문글로즈가 열어둔 포탈을 통해서 모조리 온 상태였다.
리카 웹스, 존 도우 등의 영성회원들은 물론이고 모리나 제롬 등의 제자들도 여럿 있었다.
거기다 협력자들 몇도 함께 왔다. 아미티지 교수와 두 제자인 프랜시스와 드레이크.
프레데릭 웹스는 물론이고 로렌도 있었다.
“이, 이렇게나 많이?”
“샤를님은 처음부터 결전을 염두에 두고 있었거든요. 우리 도시가 파괴되는 거보단 나을 거라면서.”
잔인한 얘기지만 현대의 메트로폴이 파괴되는 것보다 과거의 메트로폴이 부서지는 것이 낫다는 판단하에 전쟁터를 선택한 것이었다.
“왜 함께 오지 않고…….”
“준비가 이제야 다 됐거든요.”
그리고 샤를이 문글로즈를 완전히 믿지 않은 것도 있었다. 돌아갈 방법을 확보해두고 나서야 이제 출발한 것.
“우리는 이제부터 계몽주의자를 모두 말소할 겁니다.”
그 말에 더글라스는 든든해지는 것을 느꼈다.
*
분신인 샤를은 소년 트리메스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대로 죽일 순 없고, 어딘가 다른 곳에 내버려둔다면 납치당할 위험도 있으니 갈팡질팡하는 상태.
그때, 그들이 있는 곳에 거대한 형체가 나타났다. 맨 처음에는 계몽주의자인가 싶었으나, 샤를은 기겁을 했다.
“히드라잖아?”
머리가 수십 개 달린 그 생물은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면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샤를이 깜짝 놀라 소년 트리메스를 옆구리에 들고 도망치자 그 옆에 있던 건물이 그대로 깔려버린다.
“뭐야 저건.”
그때, 그 옆으로 백기사가 나타났다. 아마도 ‘본체’가 소환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백기사는 히드라와 격전을 벌였다.
일전에도 히드라는 백기사에게 패배한 적이 있었다. 별 문제는 없겠지 싶었는데, 그 히드라의 머리 중 하나가 샤를과 소년 트리메스를 발견한 것이 보였다.
“아, 썩을.”
히드라의 입에서 강산성의 브레스가 발사되었다.
샤를은 그 즉시 소년 트리메스를 들고 움직였다. 이미 잠들게 해둔 뒤라, 저항은 없었다.
샤를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주변을 살폈다. 여긴 일반인이 너무 많다.
수많은 사람들이 히드라를 보고 괴성을 지르면서 도망가고 있었다. 이 집단 패닉 속에서 샤를이 요리조리 도망친다면 일반인들의 피해는 늘어만 갈 거다.
“싸워야겠네.”
분신이라 단점이 있다. 유물을 못 쓴다. 이미 분신 자체가 유물이라.
소년 트리메스를 잠시 바닥에 내려놓고 전투를 벌였던 분신 샤를은 낭패를 맛보았다.
전투가 끝나고보니 소년 트리메스가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
팅! 챙!
샤를의 지팡이와 트리메스의 검이 서로 튕겨나갔다.
샤를은 지팡이를 살폈다. 무자비한 광탄 세례도 여기까지다. 내장된 광탄은 조금 남았으나 다 사용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처음부터 샤를의 목적은 지팡이와 검을 사용할 수 없도록 소모시키는 것이었다.
화천지옥검도 기존의 불길을 잃어버리고 이제는 평범해진 상태였다.
‘모든 걸 흡수할 수는 없지.’
흡수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샤를은 성물 두 개를 공멸 시켰다는 점에 만족했다.
어차피 새 무기를 꺼낼 것이고 트리메스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서로의 힘을 깎아내는 이 전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진행되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지루하고, 동시에 긴장감 있는 팽팽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히드라가 굉음을 내뿜었다. 그걸 보고 트리메스가 눈을 찌푸렸다.
“흐음. 죽었나?”
“그래 보이는데?”
샤를의 백기사는 아직도 소환되어서 움직이고 있으니 히드라가 죽은 것은 맞는 것 같다.
“이제 너도 죽을 시간이야.”
트리메스는 말 없이 주문을 사용했다. 주문이 사용되기도 전에 샤를은 그 주문을 간파하고 손을 내밀었다.
트리메스가 사용하려던 이탈 주문에 간섭이 들어오자 순식간에 주문이 취소되었다.
“이런.”
“어딜도망가.”
트리메스가 당황한 사이, 샤를은 트리메스의 옆구리에 인과율의 창을 박아넣었다.
옆구리 한쪽이 뻥 뚫리면서 마치 현실에서 사라진 것처럼 뚫려버린다.
“광명자의 복수다.”
“이거 미친 놈이군. 네가 죽였잖나.”
뒤로 훌쩍 물러난 트리메스는 순식간에 주문을 걸어서 나머지 부위로 상처가 넘치는 것을 방지했다.
“이젠 도망 못칠 걸?”
“글쎄.”
트리메스는 여러 가지 변수를 파악하고 있다가 멈칫했다.
그건 전투 중이었던 샤를도 마찬가지였다. 분신에게 딸려보냈던 소년 트리메스가 여기 있었던 것이었다.
“이제 싸움은 그만둬요.”
“트리메스…….”
“이럴 필요는 없잖아요? 그냥 도망가게 내버려둬요.”
“꼬마야. 너 진짜 네가 무슨 소리 하는 줄 아는 거냐? 널 희생양으로 쓰고 자신은 도망쳐서 잘 살겠다잖아.”
샤를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지금 소년 트리메스와 트리메스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
또 트리메스의 빈틈을 노리기에는…….
트리메스는 샤를이 더 생각하기도 전에 자신의 새 가면을 꺼내더니 그대로 소년 트리메스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후후. 후후후. 후후후후후.”
옆구리의 상처를 감싸고 있던 트리메스가 웃었다.
비로소 트리메스는 목적을 달성했다. 샤를이 추측한 대로 트리메스는 아직 망설이고 있었다. 그건 자기 연민이 일말은 있었으나 대부분은 그녀가 만든 신성의 정수의 불안정함에 기인한 것.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소년 헤르메스에게 뒤덮혀진 것은 트리메스의 온전한 기억과 능력, 그리고 화신의 지위다.
실로 인격적으로 상대방을 덧씌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신체 강탈이었으나, 차이점이 있었다.
일전에 보슈 백작 부인에게 사용했던 신체 강탈은 공허에 있던 기존 트리메스의 신체를 없애버린 뒤 사용한 것.
그것으로 완전히 몸을 강탈한 것이었으나 이번에는 기존의 신체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사용했다는 게 다르다.
본래는 그래서는 안 될 터였다. 두 개체가 공존하면 너무도 많은 ‘트리메스’들이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움직일테니까.
그래서 인피 가면도 되살아날 때를 대비해서 예비로 준비해뒀던 것.
하지만 지금처럼 한쪽은 약하고 한쪽이 강한 개체일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트리메스는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상황을 반전 시킨다.
그때, 가면에서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인피 가면이 소년 트리메스에게 흡수당하는 것과 동시에 빛이 반사된다.
그리고 보슈 백작 부인의 신체를 강탈했던 트리메스의 얼굴에서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딱 인피 가면을 덧씌웠던 피부 테두리에 선명한 금이 생기면서 빛이 흘러나온다.
샤를은 비로소 웃었다.
“체크메이트네.”
“너, 너,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트리메스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 뒷걸음질 했다.
“그 가면에 약간 장난질을 했거든.”
카오스식 전개 주문 도중, 샤를은 마지막 남은 인피 가면 하나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즉시 그 가면에 장난을 쳤다. 본래 가면이 가지고 있던 정보는 상대에게 정보를 덧씌우는 것이었다.
이 인피 가면의 능력을 파악한 샤를은 그걸 역으로 되돌리는 것을 생각했다.
“그 인피 가면은 상대에게 정보를 덧씌우는 가면이 아니라, 반대로 상대의 정보를 빼내어 원주인에게 덧씌우는 가면이 되었거든.”
소년 트리메스의 정보가 역으로 흘러나온다. 그대로 트리메스에게 덧씌워지기 시작했다.
“능력, 기억, 지위 모든 것들을 순진 무구한 소년 시절로 되돌리는 거지. 어때?”
“네놈, 이걸 위해서 연기를…….”
소년 트리메스를 애지중지하면서 탈취했다가, 다시 내버려두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소년 트리메스가 제발로 걸어오는 게 아니라 트리메스가 데려올 줄 알았으나, 뭐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하지 않나.
“내가 이겼다. 트리메스.”
“샤를 헥센! 내가 죽으면 나머지 석판 조각은 얻지 못하게 될 거다!”
“상관없는데?”
“뭐?”
샤를의 말에 트리메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뭐라고 했지?”
“상관없다고. 석판 조각? 까짓것 있으면 있는 거고 없으면 없는 거지 뭘 더 바래?”
“후회하게 될 거다. 헤르메스는 나처럼 약하지 않아. 더 잔혹하고 더 기괴한 능력을 사용하겠지. 반신 주제에 신에게 대적할 셈인가?”
“그걸 네가 왜 걱정해?”
“난 널 도울 수 있으니까. 나도 헤르메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것은 같은데, 굳이 우리가 싸울 필요가 있냐는 거지. 차라리 지배의 권능을 내게 사용하고 날 수족처럼 부려라.”
“응 싫어. 또 뭐하다가 능력의 허점 발견하거나 해서 도망치거나 뒤통수치거나 그렇겠지.”
경박한 말이었지만 속내에 깃든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트리메스가 체념했다.
“겨우 여기서 끝나려고 왔는 가…….”
트리메스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헤르메스의 손에 개조된 채, 그의 의도대로 움직이던 삶.
겨우 헤르메스의 계획 속에서 빈틈을 발견해서 신성의 씨앗을 탈취해서 도망칠 수 있을까 재어봤으나, 그것도 실패로 돌아갔다.
“그럼, 나만 죽을 수는 없지.”
트리메스는 품에서 신성의 정수를 꺼냈다. 4개를 전부 분석해보지 못해서 불안정해진 신성의 정수는 구슬처럼 생겼다.
그 안에 휘몰아치는 회오리같은 것들이 깃들어 있었다. 이 정수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깃들어 있다.
온전히 신이 되기로 하지 않고 이걸 다른 용도로 쓰는 순간 이 에너지를 폭발시켜서 여길 날려버릴 수 있다.
위력은 도시 하나는 물론이고 나라 하나를 날려버릴 정도의 위력일 터.
트리메스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정수를 활성화했다.
“응, 그것도 예상했어.”
샤를은 트리메스의 손에서 신성의 정수를 낚아챈 뒤, 자신의 심상 세계에 집어넣었다.
“뭐?”
“터져도 별 문제 없거든.”
심상 세계는 무존자의 힘으로 보호받고 있는 곳. 그러니 거기서 터져봤자 별 의미가 없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역으로 흘러간 정보가 트리메스에게 덧씌워지기 시작했으나, 샤를은 그것이 끝나기 전에 트리메스의 이마에 인과율의 창을 박아넣었다.
이미 인피 가면의 역류가 시작된 시점부터 트리메스는 자신의 힘을 제어할 수 없었으므로 언제든 인과율의 창을 찔러넣을 수 있는 상태였다.
뭘 하나 지켜보려 남겨뒀더니 끝까지 악행만을 저지르고 갔다.
“더 캐낼 것은 없네.”
있어도 말하지 않았을 테니. 더 볼 건 없다.
“끝났나.”
정말로 끝난 것인가? 샤를은 쓰러진 소년 트리메스의 얼굴에 얹어진 인피 가면을 회수했다.
그간 샤를을 여러모로 괴롭혀오던 트리메스가 죽었다. 아니지, 메트로폴 전체에 온갖 모략을 뿌려대던 모사꾼이 죽었다.
그 최후는 실로 숭고함이란 없었다. 그냥 악인이 더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는 분풀이에 불과해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샤를은 이것이 끝인가?
그 의문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다른 사람들이 다가올 때까지 그곳에서 우두커니 트리메스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