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8화 - “노예상?”
계몽주의자 노예상이라니 기가 막힌 조합에 말을 꺼낸 본인도 혀를 내둘렀다.
“무지한 자를 계몽시키려고 하지만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더군.”
생각해보면 더글라스나 샤를의 입장에서 노예제가 폐지된 것은 아직 100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1900년대의 사람들이야, 노예제라면 엄청 과거로 느껴지겠지만 지금 사람들에게는 현실이겠지.
디날레스 클로우라는 남자는 매우 친절한 데다가 노예들에게도 잘 대해주는 선량한 고용주였으나 팔아치우고는 그 이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어떤 종류의 냉혹함을 갖고 있었다.
더글라스는 그와 대화하면서 이상할 정도로 소름 돋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 눈을 봤어야 해. 텅 빈 것 같은 눈동자인데 몸짓은 살아있더군. 마치 눈과 몸이 따로 노는 듯한 모습.”
-아, 그런 인간들이 대부분 영성에 입문하면 미쳐서 이계의 신을 몸에 받아들이거나 광기에 몸을 맡기고 사용해서는 안 되는 주문을 쓰곤 하지.
문글로즈가 중얼거리면서 한 말에 샤를도 동의했다. 미치광이는 어느 시절에나 있고 이런 자들이 영성에 손을 대고 오컬트를 파기 시작하면 진짜가 되곤 한다.
“그놈이 계몽주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내 손모가지를 걸겠어.”
“……일단 기억해두지. 댁은?”
영체 상태로 떠 있는 문글로즈를 향해 돌아보자 문글로즈가 나서서 헛기침하며 옆에 있던 루미너스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에밀 기번이라는 렌즈 세공업자였어. 고전 철학의 대가(大家)이면서 동시에 수학자, 렌즈 세공업자이기도 하지.”
“이상할 정도로 겸직이 많은데.”
계몽철학은 시대의 상징이라고 할 만큼 여러 분야에서 여러 사람에 의해 발전되어 왔다.
이 시대의 학자들을 현대식 감성으로 분해해서 직업을 나누려고 하니 그렇게 되는 거겠지만.
“에밀 기번은 유명한 철학자야. 역사서에서 본 인물을 만나게 된 건 흥미롭더군.”
루미너스의 말은 딱 거기서 끝났다. 첨언도 없다. 표정의 변화도 없다.
-아무튼, 에밀 기번도 내면에 위태로움을 간직하고 있더군. 아직 아무 영성자하고도 만나지 않았단 게 천만다행이려나.
샤를은 낮에 만난 포도 농장의 주인이자 수도사인 프란체스카에 대해 말했다.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프란체스카도 마찬가지로 이상할 정도로 계몽 수치의 치솟음에 취약했어. 조금만 더 강하게 그의 계몽을 올렸더라면 백치가 되었거나 미치광이가 되었겠지.”
계몽주의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을 만족하는 사람이 셋. 이들은 기존의 역사에서는 평범하게 삶을 마감했지만, 지금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제일 계몽주의자가 될 것 같은 사람은…….”
-잠깐, 칭호에 문제가 있는 것 같군. 둘 다 계몽주의자라 헷갈린다. 옛 계몽주의자를 계몽주의자라고 표현하고 지금 시대의 학자들을 철학자, 정도로만 구분하지.
“그렇게 하던가.”
-자네의 물음에 대답하자면 나는 내가 찾은 철학자가 제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네.
“근거는?”
-감인데.
“그럼 내일까지 조금 더 수색해보고 나머지 철학자 중에서 후보가 있다면 고르자.”
-너무 단호하게 말하는군!
그렇게 술집에서 오랫동안 토론을 한 그들은 근처 여관에서 머물기로 했다.
*
-음. 이게 문제네. 쭈인의 말대로라면 후보가 너무 많아서 오히려 함정을 파기 어렵다는 거지?
-그래.
샤를은 영체 상태로 나타난 파기나레코르와 대화하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 플로나에 눈에 띄지 않을 것이므로 별 상관 없겠지만.
-그럼 필요한 사람 빼고 다 죽이자니깐!? 결국, 이상한 사람들을 다 죽이다 보면 해결될 거야.
-안 된다고. 얼마나 죽여야 만족하는 거냣 이 살인마.
-왜에
-살인은 해결법이 아니야. 계몽주의자는 얼마든지 있다고.
요컨대, 지금 필요한 일은 샤를이 원하는 대상을, 트리메스가 계몽주의자로 만들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게 되나?
-안 되면 되게 만들어야겠…….
그때 샤를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파기. 너 색적 능력으로 누구든지 찾아낼 수 있다고 했지.
-그런데?
-그럼 색적당하는 사람도 자신이 누군가에게 추적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까?
-트리메스라면 가능할걸.
온갖 비술과 주문의 대가인 프로메트 트리메스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였다.
실제로, 멀쩡한 인간을 지금 계몽주의자로 만들 거라고 예상하는 건 샤를이 아니라 문글로즈의 예측이었다.
-여태 트리메스가 움직여 왔던 것을 생각해 봐.
-응?
-어쩌면 트리메스가 원하는 게 계몽주의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거든.
-여기까지 와서? 그럼 굳이 이곳에 올 필요가 없잖아.
-굳이 이 시간대로 와야 할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거야. 문글로즈는 그것이 계몽주의자를 늘리려는 속셈이라고 판단하는 것이었고.
여태까지 샤를도 그것에 동의했으나 갑자기 생각이 들었다.
-계몽주의자는 덤……. 같은 거고 사실 트리메스가 원하는 게 따로 있다면 어떨까?
-그게 뭘까?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뭔가 더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문글로즈는 어차피 트리메스와의 싸움에서 패배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트리메스가 문글로즈보다 한 수 더 앞서고 있다는 것을 안다.
다음 날 아침부터 다른 계몽주의자들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다들 분주히 움직였다.
샤를은 플로나에게 또 다른 철학자들을 찾아보게 하고 그는 따로 움직여서 이 시대의 메트로폴 시가지로 들어섰다.
아직 오라클 경매장이 생기기도 전이었다.
하지만 메트로폴 내부에서도 아주 적은 수이지만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은 야생의 영성자들이 있을 테고, 300년 전에서 가장 유명했던 영성자가 한 명 메트로폴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에게 조력을 얻으러, 샤를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골동품 상점을 찾아냈다.
이런 일은 때로는 다른 사람이 더 잘 보는 법이다. 믿거나 말거나 한 번 걸어 볼 가치는 있었다.
세인트 생셔 거리에 있어서 현대에는 사라졌을 것이 뻔한 낡은 상점은 얼핏 볼품 없어보이지만 영성자들 사이에서는 전설적인 인물 하나가 살고 있었다.
상점 앞에 들어선 샤를은 문을 두드렸다.
“글리치 노만, 있습니까?”
“누군데 날 찾아?”
회색 머리카락이 풍성한 괴팍한 노인 하나가 문 앞에서 눈만 딱 열어서 샤를을 쳐다보았다.
이자가 후대에 유명한 유물제작자로 이름 알려진 글리치 노만이었다. 그가 제작한 물건들은 하나같이 유명해졌고 이름만으로 브랜드를 형성할 정도로 명성도 얻게 된다.
거기다 그는 당대에서 매우 현명한 이였고 그 생각을 따라올 자가 없다고 여기는 현자였다.
“조언을 구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당신을 그냥 들여보내기에는 너무 위험한 것 같군.”
샤를의 눈동자를 보자마자, 글리치 노만은 샤를이 어떤 존재인지 직감할 수 있었다.
눈구멍을 내놓고 바라보는 순간부터, 그는 두려움이 엄습해오는 것을 느꼈다.
쥐고 있는 손이 덜덜 떨릴 지경. 젊었을 적부터 대륙해를 넘나들면서 수많은 모험을 해온 그가 이런 느낌을 받다니.
“그렇게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그대의 지혜를 구하고 싶을 뿐인 여행자니까요.”
“들어오시게.”
적의가 있었다면 진작 죽었을 거라고 인식한 글리치 노만은 상대방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는 심란한 얼굴로 샤를에게 물었다.
“내게 무엇을 묻고 싶어 하는가? 당신처럼 무시무시한 존재가.”
“오랫동안 날 골치 아프게 만든 위험한 존재가 있습니다. 1900년대에 있던 사람……. 흠. 화신이긴 하지만 사람은 맞군요. 사람인데 300년 전으로 돌아왔습니다.”
“내가 신들의 싸움을 보고 있는 건가?”
“비슷하긴 하죠.”
샤를은 반신이고 상대방은 헤르메스의 화신이다. 샤를은 그동안의 일을 글리치 노만에게 설명했다.
“그럼 여기서 문제. 그는 왜 300년 전으로 돌아왔을까요?”
“트리메스라는 존재가 헤르메스라는 신의 화신이라고 했나?”
“네.”
“트리메스는 어떤 사람이지?”
“……그야.”
“개인적인 삶을 물어보는 거라네. 가족, 나이, 친구 같은 것 말이야.”
샤를은 그 말을 듣자마자 그의 눈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생각해보니, 샤를은 트리메스라는 존재에 대해서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화신이 되기 전에는 분명히 인간이었을 거라는 것만 알뿐.
“정확히 모릅니다.”
“나도 잘 모르겠다만.”
글리치 노만이 입을 열었다.
“뭔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온 것일지도 모르지.”
“……그럴지도.”
샤를은 그 평범한 대답에서 현기를 느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샤를은 언제나 트리메스가 대승적으로 움직일 거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개인적인 일을 처리하러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파기.
“왜? 쭈인.”
-지금부터 개인행동이야. 너는 이제부터…….
*
트리메스가 과거에 도착하자마자 느낀 것은 자신을 감지하는 어떤 파동이었다.
“권능이군.”
그녀는 하얀 장갑을 낀 손을 뻗어서 자신의 주변에 역장을 둘러 권능을 무효화시켰다.
“이곳에 있는 걸 들킨 것 같네.”
역시 그녀의 대적자가 맞다. 도망친 곳을 찾아서 쫓아올 줄이야. 시간대를 정확히 읽고 따라서 온 것 같다.
트리메스의 장점은 여럿 있다. 상대방을 빠르고 쉽게 매혹하거나, 혼돈이나 사악한 것에 영향받지 않는다는 것, 언제나 악운에 강하다는 것.
그리고 제일 좋은 장점은 상대방을 모방한다는 것이었다.
샤를이 사용했었던 (카오스식 전개라는 이름은 모르겠지만) 운명을 뒤트는 그 주문은 트리메스에게 인상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 주문으로 현대 메트로폴에서 구축했던 기반이 뜯겨 나가기 일쑤였다.
그녀가 사용하려고 했던 것, 사용했던 것 몇몇들이 죄다 막히는 것을 느끼자 그녀는 과거로 돌아와서 다시 새로운 장기 말을 만들 생각이었건만,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트리메스는 자신의 손에 들린 해골의 정강이뼈를 바라보았다. 이건 ‘박물관’에서 수집한 계몽주의자의 정강이뼈였다.
이것을 사용해서 곧바로 새 계몽주의자를 만들려던 트리메스는 생각을 고쳐서 개인적인 일부터 먼저 처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흐음. 여기 어딘가 있을 텐데.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트리메스는 미스트위버 대학으로 향했다. 오랜 전통의 미스트위버 대학은 이 시점까지만 해도 명문대는 아니고 지방에 있는 그저 그런 대학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트리메스가 대학으로 들어서자 다들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복장도 특이했고 거기다 여자였으니, 300년 전에는 여자는 대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트리메스는 그곳으로 가서 젊은 시절의 앳된 소년을 만났다. 이 소년은 나이가 되지 않았으나 너무 똑똑해서 벌써 월반을 해 대학에 왔다. 흔히 말하는 천재다.
아직도 소년의 태를 벗어나지 못한 그 남자는 도서관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트리메스가 그의 앞에 서 있자, 앞의 소년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누구세요?”
소년이 처음으로 느낀 것은, 이상할 정도의 친숙함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에, 그는 상대방의 얼굴이 자신과 매우 흡사하다고 느꼈다.
“어, 어라?”
그렇다. 그는 젊은 시절의 프로메트 트리메스였다.
“다, 당신은 누구죠?”
“미래의……너라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