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7화 - “어라?”
툭. 하고 가볍게 떨어져 내렸다. 분명 들어올 때는 수직이었는데 나올때는 중력이 아래로 적용되고 있다.
뒤이어 들어온 플로나도 사뿐하게 착지했다. 하지만 더글라스는 균형을 잃고 그대로 넘어졌다.
“으아아아아악!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냐고!”
“손이 더 필요해서?”
“자네 제자나 데리고 가란 말이다!”
“무명 교단에선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지경이야.”
메트로폴 패권의 공고한 구축을 위해서 제자들이 하는 일이 너무 많다. 사실 플로나도 메트로폴에 있어야하는데 본인이 부득불 따라오겠다고 해서 함께 온 것.
“거기다 이제는 탐정 일 한다며? 잘 됐네. 300년 전의 과거에서 탐정 일을 시작해보는 거지 튜토리얼의 느낌으로.”
“튜토리얼은 얼어죽을.”
더글라스는 경찰국에서 나왔다. 오컬트 탐정이라고 경찰국 내부에서 그에 대한 멸칭이 있었다.
그 별칭은 평판에서 상당한 마이너스 부분이었으나, 이제 탐정으로 독립한 이상 오컬트 탐정이었다는 명칭은 이전보다 더 좋을 거다.
-그럼 난 왜 필요한데 어?
옆에서 문글로즈가 영체화되어서 나타났다. 루미너스가 들고 있던 카드에서 튀어나온 거다.
샤를은 어깨를 들썩이고 말했다.
“저번에도 말했잖아. 댁이 도망가거나 수작부리면 어쩌려고.”
-아니, 하. 진짜, 아니.
문글로즈와 그를 수행하는 루미너스도 여기 모였다. 문글로즈가 항의하는 것에 비해 루미너스는 별 반응이 없다.
“아니 뭐?”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 진짜 내가 예언자이데 이런 식으로 대접받아야하는 것이야? 너무 서럽구만.
가볍게 문글로즈의 말을 무시한 샤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포도 농원인가.”
드넓은 대지에 거대한 포도 밭이 보였다. 샤를은 메트로폴 서쪽 교외에 있는 자신의 사유지에 포도를 키우고 있으므로 꽤나 보아온 풍경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파기. 그러니까 여기가 정확히 언제지?”
-1613년 2월 18일. 내 ‘검색’에 의하면 1613년 2월 20일에는 트리메스가 이곳으로 들어와.
영체화 중인 파기나레코르가 말했다. 옆에서 문글로즈가 그걸 보면서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이여. 자네 마도사에 깃든 영령말인데, 대단하군. 어떻게 그런 사소한 것까지 찾아낼 수 있지?
-그냥?
문글로즈는 파기나레코르의 정체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
강력한 영체가 봉인된 마도서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예언 능력으로도 파기나레코르의 본체를 꿰뚫어보지는 못한 모양.
샤를이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 지는 알고 있는 것 같지만.
한바탕 차원문의 안정화 및 고정 작업을 진행하면서 샤를이 말했다.
“일단 주변에 흩어져서 수색 좀 해보자. 이름난 학자, 작가, 소설가, 대학 교수, 등등. 전부 찾아놔. 미리 전달해준 건 다 읽었나?”
끄덕끄덕.
샤를은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사람들에게 하나같이 300년 전의 사람들에 대해 설명했다.
역사서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메트로폴에는 상당한 숫자의 계몽주의자들이 있었던 걸로 추정된다.
이중에 몇몇이 트리메스가 접촉할 대상이며, 그들은 진짜 계몽주의자가 되어서 현실이라는 미몽을 깨부수려고 미친 짓을 벌일테다.
-급진적인 계몽주의자부터 찾는 게 좋겠군.
문글로즈가 그렇게 말하고는 루민스와 함께 사라졌다.
더글라스도 머리를 긁적이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우리는 이 포도 농원부터 조사해볼까.”
“네.”
샤를은 플로나와 함께 움직였다. 그들은 이전부터 암흑기 말기에나 입었을 법한 복식을 하고 움직였다.
귀족의 복장은 움직이기 불편하지만 움직이기 편하려면 귀족의 복식이 좋다.
이상한 소리 같지만, 이 시대에 귀족만큼 사회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는 많지 않다.
아직도 농노가 있고 장원이 있고 기사 계급도 몰락 중이지만 있긴 하다.
샤를은 총사대의 복장을 하고 플로나는 귀부인의 차림새를 했다.
뭔가 달타냥 같은 것이 된 느낌이라 간만에 흥이 돋긴했다.
옆구리에는 기병용 권총을 차고 한쪽 허리에는 레이피어를 착용했다. 깃이 달린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있으니 정말로 총사대가 된 것 같다.
플로나는 밝은 색 계열의 프릴 달린 연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구두를 신어서 조금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게 했다.
“이렇게 입고 있으니까 정말로 귀부인이 된 것 같은 데요?”
“그러게.”
“후후. 그럼 잘 부탁해요 총사님.”
샤를은 플로나의 손을 잡고 잠깐 걷다가 곧 포도 농원 중앙의 저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라?”
“어라라?”
샤를이나 플로나나 당황했다. 이 저택은 그들이 300년 뒤에 살고 있는 그 저택이었다.
아직 샤를의 어머니 샤를로테가 구매하지 않은 시점이다.
“300년 전은 이랬구나?”
“별로 달라질 게 없네?”
옛 저택에 들어서자 흑인 하인 하나가 샤를과 플로나를 보고 마중 나왔다.
“주인님을 찾으십니까?”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은 데, 이곳의 주인이 누구지?”
“이곳은 주인님은 프란체스코 수도사님입니다. 주인님께 중한 손님이 왔다고 말씀드릴텐데, 누가 왔다고 전해드릴까요?”
“레이디 헥센테르프가 왔다고 전해주게.”
“예.”
이곳에서의 신분은 헥센 가문의 전신인 헥센테르프 공작가였다. 플로나는 그 공작가의 따님이 될테고.
헥센테르프의 사연이 조금 기구한데 이제 몇 년 뒤에는 혁명과 반란 등등의 기구한 역사가 헥센테르프를 습격한다.
그 뒤, 반역죄로 몰린 헥센테르프 공작가는 해체되고 그냥 헥센으로 변하게 된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공고한 권력을 가진 가문이었다. 이들을 사칭할 예정이다.
‘어차피 헥센테르프 공작가는 지금쯤 수도 인시그니아에 있을 테니.’
샤를의 저택이 메트로폴에 있었던 것이지 헥센 가문의 저택도 사실 메트로폴에 있진 않았다.
기별을 받고 나온 프란체스카 수도사는 농장에서 헐레벌떡 뛰어왔다.
정수리를 다 깎는, 흔히 말하는 수도사 컷을 하지 않고 일반인들처럼 머리카락을 기른 이 특이한 수도사는 그간 포도밭에서 일하고 있었는지 전신이 흙투성이였다.
“고, 공작가에서 나오셨습니까? 별 볼일 없는 제 저택에는 무슨 일이신지.”
미리 준비되어 있는 대사대로 플로나가 말을 꺼냈다.
“프란체스카 수도사의 현기어린 지식에 대해 궁금해서요. 『인간오성론』을 읽었거든요.”
“아! 제 책을 읽으셨습니까? 정말 영광이군요. 저택 안에 들어가계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악수를 나누고 싶지만 제가 보시다시피. 더러운 꼴이라서요.”
그렇게 말하면서 프란체스카 수도사는 하인을 시켜서 플로나와 샤를을 정중하게 접대하도록 명령한 후에 얼른 씻으러 사라졌다.
“음. 샤를님. 이제 말해야하는 건 너무 어려운데요?”
“겉핡기 식으로라도 익혀뒀잖아? 충분히 할 수 있어.”
인간오성론은 경험론적 철학서였다. 샤를의 지구 역사에서는 이름도 유명한 존 로크가 썼던 책이지만 이 세계에서는 이 수도사가 썼던 것으로 변해있었다. 그것도 100년이나 일찍.
인간은 아무 것도 각인 되지 않은 백지상태(타뷸라 라사)에서 태어나 경험을 통해 지식을 획득한다는, 뭐 그런 내용의 철학서였다.
“아이고. 반갑습니다. 실례의 말씀이지만 여성이, 그것도 이렇게 제 저택에 와서 학문적 토론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정말 감동적이군요.”
프란체스카는 그러면서 그가 썼던 여러 가지 책에 대해 묻는 플로나에 대해서 꼬박꼬박 대답해주면서 열정 어린 성토를 했다.
샤를은 옆에서 제3자의 입장이 되어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쭈인, 어때? 죽일까?
-죽이긴 뭘 죽여. 이자에게 ‘등불’주문을 사용해서 계몽 수치를 올려보자.
샤를은 프란체스카에게 조금씩 조금씩 등불 주문을 사용한 자신의 눈동자를 마주치게 했고 그럴때마다 그의 계몽수치가 오르기 시작했다.
-쭈, 쭈인! 이 인간 계몽 수치가 미친 듯이 오르는데?
-알아. 그래서 이런 식으로 아주 조금씩 사용했던 거고.
샤를의 예상대로 프란체스카의 계몽 수치는 급진적으로 미친 듯이 올랐다.
보통 이런 사람이 계몽주의자로 각성하기 쉬운 사람이다.
샤를은 트리메스가 옛 계몽주의자의 신체 같은 것을 프란체스카 같은 계몽주의자들에게 ‘이식’해서 신체를 개조할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니까말입니다인간의부지런하고무한한상상력이그려내는방대한 지식의축척과마음이이성과지식의재료를얻게되는것이바로환경과경험에의해서결정되게된다는것입니다!”
샤를은 이제 등불 주문을 사용하는 것을 멈췄다. 프란체스카는 숫제 미치광이처럼 열변을 토해내고 있었고 이제 플로나가 대답을 못하는 데도 자기 혼자서 질문하고 자기 혼자서 대답하고 있었다.
눈동자는 충혈되고 희열에 가득한 입에서는 침이 마구 튀었다.
그 광기어린 모습에 샤를은 침을 삼켰다.
‘보통 이 정도까지 미쳐버리나?’
조금씩 조금씩 나눠서 써서 망정이지 그냥 대놓고 등불 주문을 썼다간 순식간에 미쳐버려서 이형의 존재가 되어버린 프란체스카에게 습격당할 뻔했다.
“자, 진정하시게 프란체스카 수도사.”
“아, 어라. 제가 너무 흥분했던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하하.”
프란체스카 수도사는 가볍게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샤를은 그에게 최면을 걸기 어렵다고 느꼈고 그의 정신을 정화하기 위해 양초 하나를 선물했다.
“이 양초를 머리맡에 피우고 자면 자네의 혼미했던 머릿속도 정리가 될 거라네.”
“아. 감사합니다. 실로 아름다운 양초로군요.”
샤를이 건넨 것은 계몽중화제를 양초 형태로 만들어둔 물건이었다. 프란체스카의 정신을 일단 되돌려놓기 위해서다.
그와의 대담을 끝마치고 나오자마자 플로나가 샤를에게 물었다.
“샤를님. 그냥 죽이면 안 되는 건가요? 어차피 우리의 현실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문글로즈가 그랬잖아요?”
“프란체스카를 죽이면? 또다른 계몽주의자를 찾겠지. 우리는 최대한 후보를 많이 만들어두고 그들의 내부에서 파멸할 함정을 만들어두는 게 좋아.”
“아. 그렇군요.”
일단 후보자로 프란체스카 하나를 찾았다. 다른 사람들도 급진적인 계몽주의자들 하나를 찾았을 거다.
그들은 저녁이 되자 근처의 술집에 모였다.(술집에 그냥 들어가긴 무해서 플로나는 망토로 자신의 모습을 가린 상태였다.)
더글라스는 초주검이 된 상태로 흐물거리면서 술집에 들어왔고 루미너스는 예전처럼 별 반응 없이 무뚝뚝하게 문글로즈의 카드를 들고 들어왔다.
“다들 계몽주의자들은 찾았나?”
“으으. 말도 말게나. 무슨 도시 하나에 그렇게 계몽주의자들이 많아? 썩을.”
더글라스가 욕을 하면서 자신이 가져온 정보에 대해 떠들었다. 그리곤 자신의 어깨에 붙어 있는 나비 한 마리를 가리켰다.
“자네가 붙여준 이 나비가 잠깐 번뜩할 때마다 그 계몽주의자란 놈들이 눈이 뒤집혀서 자신의 이론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는데 진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
“그래서 소득은?”
“있지 물론.”
더글라스가 침을 삼키면서 말을 이었다.
“내가 만난 건……한 노예 상인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