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1화 - 호흡은 공기로 만든 역장을 통해 충당한다.
거대한 팔에 끌려가는 동안, 샤를은 지하 밑바닥 깊숙한 곳에서 그것의 형체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물고기나 바다 생물들이 엮여서 군집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마치 거대한 거인의 상반신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공포가 밀려오는 심해 깊은 곳의 그 거인은 샤를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가위검을 들어서 그대로 물고기들로 이뤄진 육신을 절단해버린 샤를은 끌려가는 것을 멈출 수 있었다.
-왜 아직도 모르는 거지?
놈은 순식간에 자신의 잘려나간 손가락을 복구해냈다.
-뭘 말하는 거냐?
-세상이 끝났다는 걸 말이다.
거대한 어인은 손을 들어서 펼쳤다.
-끝이 다가온다. 난 받아들였다. 그러니 다른 이들도 받아들여야만 한다.
펼쳐진 손 위에서 파멸해가는 세상의 모습이 단편적으로 비쳤다.
-지금 내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이 세상은 멸망한다. 근래에, 누군가가, 반드시 세상을 멸망시키고야 마는 것이다.
-거창하게 헛소리를 하는군.
샤를이 손을 뻗자 바닷속의 해류 흐름이 변형되기 시작했다.
-바다에서 나와 대적하려 하는가?
-넌 어차피 신도 아니고 반신조차 아니잖아? 싸우지 못할 이유는 없지.
신성의 씨앗을 개화했을 뿐, 그는 아직 완성된 존재조차 아니었다.
지금 하는 건 심해 생물들을 이용해 몸을 부풀린 것뿐이다.
-네놈이 제일 위험한 놈이었군……. 처음부터 무명 교단을 없앴어야 했어.
-후회는 나중에 지옥에 가서 열심히 하라고.
-후하하하! 지옥 같은 게 있을 것 같으냐?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거대한 주먹을 뻗어서 샤를을 향해 쏘아냈다.
샤를은 주변의 바닷물을 밀어내 뒤로 미는 방식으로 고속으로 이동했다.
이건 저번에 마르바길이라는 심해 괴수와 싸우던 로렌이 움직이던 방식을 모사한 것이었다.
그 방식대로 움직이니 재빠르게 움직여서 피해낼 수 있었다.
손에 잡힐 듯, 말 듯 샤를이 고속으로 이동하자 화가 난 부라토스가 외쳤다.
-쥐새끼같이 잘도 피해가는구나.
샤를은 도망치면서도 주변의 해류 흐름을 파악하고 있었다. 동시에 놈을 구성하고 있는 물고기들을 파악했다.
‘주변의 생물들이 강한 구속력에 의해 붙잡힌 것 같군.’
바다를 지배하는 수몰왕은 바다 생물들에 대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인어들을 빼면 말이지.
그런 의미에서 갑작스럽게 위에서 무언가 접근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도 도와줄게!
로렌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세레스에게 자신의 능력을 다루는 법을 배운 로렌은 확실히 도움이 되는 존재였다.
-물고기들의 결속을 끊을 수 있겠어?
-심해 생물들에게 미치는 내 권능은 저 녀석보다 약해. 놈이 약해지지 않는 이상 불가능해.
-그렇단 말이지.
샤를은 빠르게 움직이면서 거인의 형상을 한 부라토스의 머리 부분을 바라보았다.
제3의 눈에 의하면 거기에 부라토스가 묶여서 저 거대한 군체 거인을 통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핵심은 신성의 씨앗이군.’
부라토스의 몸통에 박혀 있는 거대한 신성의 씨앗은 마치 하얀색 진주처럼 빛나고 있었는데 그것이 심해 생물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쥐새끼가 하나 더 늘었군!
이제 사람의 형상을 유지할 생각도 없는 부라토스는 심해 생물들로 이루어진 촉수를 몸통에서 꺼내서 그대로 로렌을 후려쳤다.
로렌은 도망치지 않고 그대로 촉수에 얻어맞았으나, 떨어지지 않고 촉수에 붙어 있었다. 아니, 오히려 생물들로 이뤄진 촉수 안으로 파고들고 있다.
로렌은 물고기 속으로 파고 들어간 뒤, 자신의 사념을 주변으로 퍼뜨려 바다 생물에 대한 지배를 깨트리려 하고 있었다.
샤를은 초고속으로 해류를 회전시켜서 촉수를 절단해줄까 하다가 로렌의 의도를 파악해서 거대한 거인의 머리를 공격했다.
고속으로 날아오는 청새치의 뾰족한 주둥이가 샤를을 향해 날아왔으나 해류의 흐름을 바꾸자 놈이 빗나갔다.
‘나와라. 크라켄.’
샤를의 손에서 풀려나온 나비들은 별 저항 없이 물속에서도 움직였다. 이것들은 실체가 없으므로 그렇다.
나비들이 뭉쳐서 크라켄의 형태를 형성하자마자 곧바로 크라켄이 거대한 거인을 향해 달라붙는다.
-음? 뭐냐, 바다 생물은 나를 거부할 수 없을 텐데……?
소환된 크라켄이 거인에게 달라붙어서 빨판을 이용해 심해 생물들을 뜯어내자 부라토스가 당황해하면서 몸을 휘휘 저었다.
샤를은 모노클이 조종하는 가위검의 손잡이를 꽉 잡았다.
가위검의 인도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대로 즉시 거인의 머리를 향해 파고든다.
생물들을 그대로 관통하면서 깊은 곳에 박혀 있던 부라토스에게 도착했다.
-이 자식이……!
-죽어!
부라토스의 가슴에 튀어나온 신성의 씨앗을 향해 샤를이 검을 내찔렀다.
부라토스는 빠르게 몸을 비틀면서 손에 들고 있던 도끼와 장검으로 샤를의 가위검에 맞부딪혔다.
샤를은 강한 염동력을 발휘했다. 물론, 부라토스에게는 소용이 없겠지만, 사용한 것은 샤를의 검이었다.
가위검이 엄청난 속도로 궤도를 바꾸더니 도끼와 장검 너머로 파고들어 기어고 부라토스의 가슴팍에 검을 꽂아 넣었다.
신성의 씨앗이 있는 위치에서는 조금 벗어난 상태였다.
-어딜!
부라토스가 손을 내뻗자 강한 해류가 밀려와 샤를이 그대로 튕겨 나갔다.
부라토스의 가슴팍에 박힌 검이 보인다. 그는 맨손으로 검을 집어서 그대로 뽑아내서 꽉 쥐었다. 가위검이 그대로 반토막으로 부러져버렸다.
-이제 더는 못 도망가겠지.
하지만 샤를이 보고 있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거대한 심해 생물의 몸통으로 파고든 로렌이 심해 생물에게 사념을 전달, 완전히 와해하는 데 성공했다.
-읏? 뭐냐. 어떻게……?
염동력으로 튕겨 나가는 걸 제어하자 샤를은 이미 수백 미터나 물러난 상태였다.
저 멀리서 로렌과 부라토스의 권능 대결이 보인다. 서로 바다 생물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 틈에, 샤를은 허공 위에 손을 뻗어서 강력한 주문을 행사하려다가, 생각이 바뀌었다.
‘뭐야?’
머리 위에서 거대한 함선 조각이 떨어져 내라고 있었다.
대규모 함포 사격 때문에 조각난 100년 전의 구형 함선.
샤를이 그 신비의 근원을 제거해버려서인지 그대로 침몰한다.
잔해들이 마구 떨어지자 샤를은 해류를 틀어서 그대로 부라토스의 머리 위로 꽂아버리기로 했다.
-로렌! 빠져 나와!
샤를이 로렌에게 정신파를 보냈으나, 대답이 없다. 권능 대결을 벌이느라 강한 심력이 소모되어 대답할 겨를도 없어 보인다.
거대한 인빅타 호의 잔해들이 쏟아지는 도중 끝도 없이 전투를 벌이다가 함께 파묻혀 버릴 위기.
로렌을 그냥 내버려 둘 순 없어서 샤를은 잔해 사이를 가르면서 접근했다.
이미 둘의 싸움은 보이지도 않고 거대한 잔해들뿐. 깔려 죽은 심해 생물들이 보인다.
일부 살아남은 생물들은 통제에서 풀려났는지 순식간에 이리저리 살아남기 위해 도망쳤다.
샤를은 도망치는 심해 생물들을 피해 움직이면서 로렌의 위치를 파악했다.
다행히 로렌을 찾은 샤를은 그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 옆에는 부라토스가 잔해에 깔려 압사한 상태였다.
보통이라면 도망쳤겠지만, 로렌과 권능 대결을 펼치고 있어서 피하지 못하고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부라토스의 신체에서 신성의 씨앗을 뜯어냈다. 온전히 개화한 신성의 씨앗.
거기다 놈의 목걸이를 뜯었다. 목걸이에는 능력을 무효화시키던 진주와 삼천성의 메달이 같이 매달려 있었다.
‘트리메스는…….’
없다. 샤를의 예상대로, 메트로폴 밖으로 트리메스가 따라올리는 없어 보였다. 이런 바다 깊은 곳에도 트리메스가 있다? 그거야말로 진짜 미친 게 아닐까.
그때, 갑작스러운 흔들림과 함께 바닥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뭐야?’
샤를은 가라앉은 바닥 사이에 철문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문 앞으로 다가가자, 아래로 내려가는 통로가 보였다. 샤를은 일단 로렌을 위로 올려보냈다.
이 녀석은 태어난 곳이 물 속이었으니까. 떠오르면 동료들이 건져줄 것이다.
대신 샤를은 그 입구를 향해 다가갔다.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공기가 통하는 것을 느꼈다. 역장을 칠 필요가 없어서 멈췄다.
“여긴 대체 뭐야?”
여기가 바닷속 깊은 곳일 텐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거대하고 하얀 공간이 나타났다.
마치 실험실처럼 순백의 하얀색으로 도배된 벽면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
바닥에는 기이하게 생긴 둥근 것들이 박혀 있었다.
제3의 눈을 열어서 둥근 것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 안에 기억들이 갇혀 있었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기억들. 손을 가져다 대니 갑자기 현실에 금이 갔다.
그리고 한쪽 공간이 열렸다. 그 안엔 거대한 공허가 깃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공허 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그건 거대하고 네모난 간판 같이 생겼다.
간판을 뱉어낸 공허는 다시 아물면서 스르륵 잠겼다.
“…….”
샤를은 그것을 보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한글로, 로그아웃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그 간판에 손을 가져다 대자, 샤를의 상태창에 로그아웃 기능이 생겨났다.
“이건 대체…….”
상태창을 열자, 맨 마지막 줄에 로그아웃 버튼이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문득 샤를의 머릿속에 얼마 전 광명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상태창이 있다면 이 세상 어딘가에 ‘도감’이 있을 수도 있고 ‘환경설정’이 있을 수도 있지. 그럼 게임을 끝내는 버튼인 ‘로그아웃’은?]
샤를은 그 버튼을 누르지 않고 조심스럽게 바라보기만 했다.
‘너무 수상하잖아.’
사악한 신을 믿는 4대 교단의 마지막을 작살낸 뒤, 갑작스럽게 나타난 장소.
그리고 불쾌감이 느껴질 정도로 이지적이고 기이한 공간. 그곳에 도착하니 갑자기 로그아웃 버튼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상할 정도로 진행되는 우연의 연속에 샤를은 불길함을 느꼈다.
‘이걸 누르면 어떻게 되는 거지?’
현실로 되돌아……가는 건가?
그때, 주변에 있던 하얗고 둥근 것 하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요동치는 그것이 알처럼 깨지면서 그 안에 있던 무언가가 나타났다.
그 존재는 전신에 거대한 광채를 내뿜고 있어서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운 존재였다.
“광명자…….”
샤를의 말에 광명자가 말했다.
-어때?
“뭘 말하는 거지?”
-현실로 돌아가는 거다.
“…….”
샤를은 대답하지 않고 고심하다가 물었다.
“이 공간은 뭐지?”
-공허와 현실의 사이……라고 해둘까? 여기서 조금만 더 넘어가면 공허야.
광명자가 손을 내뻗어서 벽면에 손을 댔다. 하얗게 빛나던 기이한 벽 너머로, 아무것도 없는 그 끔찍한 공간이 튀어나왔다.
“당신은 대체 내게 뭘 원하는 거지?”
-난 네가 현실로 돌아가길 원하는 거다.
“그러니까 대체 왜?”
광명자는 잠시 침묵하더니 샤를에게 말했다.
-나는 현실을 지탱하고 있다.
“지탱한다고?”
-그래. 마치 거대한 신전을 받치는 기둥이나, 하늘을 떠받쳤다던 아틀라스처럼, 나는 이 공간을 만들었고 여긴 현실이 붕괴하지 않도록 막고 있는 거다.
“그럼……. 당신이 관리자인가?”
샤를의 통찰에 광명자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뭐, 비슷해. 내가 관리자는 아니지만, 그 존재가 하던 역할은 떠맡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