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 “흐아암.”
해먹에서 일어난 더글라스는 곧 지저분한 세면대로 갔다. 면도칼을 들어서 자신의 수염을 손질했다.
서걱서걱.
수북한 수염을 정리하고 나니 그럭저럭 봐줄 만한 얼굴이 되었다.
“후.”
맨 처음에는 계약이고 뭐고 도망칠까도 생각했다. 어인이고 뭐고 그랑 무슨 관계란 말인가?
세레스의 후불제 계약은 그런 것 같지 않아 보여도 어느 정도 구속력을 발휘하고 있었고, 어인들이 나돌아다니는 것을 내버려 두기에는 그의 정의감이 그를 가로막았다.
“더글라스 깼나?”
세면장에서 나오자마자 천장에 매달려 있던 로렌이 고개를 불쑥 내려서 더글라스를 바라보았다.
“그래. 넌 좀 잤냐?”
“로렌은 안 자도 돼.”
“늘 얘기하는 거지만 좀 잠을 자둬야 사람 같다고 한단다. 외모만 말끔해지면 사람이 아니야.”
로렌은 예전의 그 괴물 같던 모습에서 벗어나 사람을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천장에 매달리지도 말고.”
“알았어.”
로렌이 한 바퀴 돌면서 땅에 착지했다.
“어인 놈들의 시체는?”
“추운 곳에다 가져다 뒀어.”
“냉동 창고라고 몇 번을 말하니.”
더글라스는 장비들을 챙겼다. 금속 커팅용 절단기. 보통 공장에서 사용하는 것들이지만, 지금 쓸 것은 어인들의 시체다.
“내 팔자야.”
세레스는 더글라스에게 어인들을 제거하는 임무를 내렸다. 그리고 어인들을 ‘처리’하는 것도 가르쳤다.
강력한 절단기를 들고 냉동 창고에 들어선 더글라스는 어제 로렌이 잡아온 어인들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을 파악했다.
이전의 형상이 사람이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수산물들이 매달려 있었다.
“그래, 저건 사람이 아니야. 괴물이지.”
더글라스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이고는 커팅기로 며칠 전에 잡아왔던, 이제는 꽁꽁 얼어버린 어인 시체를 썰었다.
보기 좋게 네모난 조각으로 써는 일은, 이런 일에 별로 면역이 없는 더글라스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며칠이나 이 짓거리를 해도 영 적응이 안 된다.
로렌이 다가와서 네모낳게 썰린 어인을 들어다 옮겼다. 어인 큐브는 차곡차곡 냉동창고 옆에 적재되었다.
적당히 할당량을 끝마쳤다고 생각한 더글라스는 옷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반월형 심볼이 그려져 있는 바다왕의 상징이었다.
“로렌. 마법진 그려.”
“응.”
로렌은 손바닥에 상처를 내서 피를 조금 짜냈다. 짜낸 피로 어머니에게 배운 마법진을 그린 로렌은 뒤로 물러났다.
더글라스가 다가와서 어인 큐브를 마법진 위에 올려뒀다. 그리고 그가 세레스에게 받은 마도서를 꺼냈다.
“전능하신 물의 주인. 진정한 바다의 지배자…….”
주문을 읊자 어인 큐브가 스르륵 소멸하기 시작했다. 최종적으로 마도서의 주문을 전부 다 읊었을 때, 어인 큐브는 흔적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 있었다.
“역시 번거롭군.”
더글라스는 땀을 닦았다. 여전히 이 ‘주문’을 외우는 것에는 적응이 안 된다.
그는 이 어인의 시체를 그냥 땅에다 묻었을 때, 그 땅이 지독하게 썩어들어가는 것을 봤다.
바닷속에 뿌려지면 그대로 그 힘은 흩어지고 바다를 통해 수몰왕의 권능으로 회수된다고 하니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사용해서 어인들을 처리해야만 했다.
“어머니께서 만족하시는 것 같은데.”
“로렌. 너희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런 일을 벌이게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
“뭐가?”
로렌이 생글생글 웃자 더글라스는 입을 닫았다. 이 녀석은 평소에는 맹하고 어리숙해보여도 눈동자에 짙은 살기 같은 것이 있었다.
인간이 아니라 야수의 살기를 덧 씌운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엄마는 나쁘지 않아. 나쁜 건 아빠야.”
“……후. 됐다. 생각해보니 넌 반은 인간이고 반은 인어랬지. 흠. 그래, 문화적 차이라고 생각하자.”
그렇게 생각하는 게 정신건강에 편하다. 왜, 신대륙에선 원주민 부족의 아이를 강하게 키운다면서 어디론가 사냥을 보내곤 하지 않은가? 그런 맥락에서 생각하면 편하다.
이런 식으로 어인에게 부여된 권능을 계속 흡수시켜서 세레스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 바로 세레스가 더글라스에게 내린 임무였다.
언제까지라고는 얘기하지 않았으니, 그 끝은 더글라스가 결정할 수 있다.
보면 굉장히 더글라스에게 유리한 계약 같기도 한데, 이런 호의를 보여주는 이유는 잘 모르겠단 말이지.
“아무튼, 로렌. 정보좀 읊어봐라.”
“아. 정보? 잠깐만. 엄마한테 물어볼게.”
로렌은 눈을 감고 강한 정신 감응을 펼쳤다.
바다왕의 자식인 세레스나, 로렌은 소르 이븐에 강한 영향력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선택받은 자만 들어올 수 있는 소르 이븐을 마음대로 들락날락하거나 정신파를 보내 대화할 수 있었다.
“엄마가 이 어인들의 머릿속에서 정보를 캐냈어.”
“뭐라 하디?”
“남쪽 바다에 이 어인들의 근거지가 있대.”
“바다……?”
*
“흐음. 남쪽 바다라고?”
샤를은 정보를 얻고나자 난처함을 느꼈다. 바다 어디란 말인가?
그가 신문하던 어인은 다급하게 자신이 알고 있던 정보를 풀어냈었다. 그중에는 그들의 근거지에 대한 정보도 있었다.
[남쪽바다. 이, 인빅타 호.]
그말을 남기고 어인의 명줄이 끊어졌다. 그다지 강한 고문을 가하진 않았지만 넙치 어인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인빅타 호라. 그 배 이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샤를은 그 즉시 미스트위버 대학의 도서관으로 갔다.
대학 도서관은 무명 교단과 협력 관계인 비밀장서고 소속 영성자들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도움을 받아서 순조롭게 정보를 캐낼 수 있었다.
“여깄군.”
인빅타 호에 대한 기록을 들어서 살폈다.
약 100년 전, 처음으로 남극을 탐험하겠다고 떠난 목조선이었다. 증기기관은 탑재되어 있지 않다.
특이하게도, 원래는 무역선으로 사용되었다고 했다.
그 뒤에 남대륙에서 횡행하는 해적들에게 나포되어서 그대로 해적선이 되었다.
최신 증기기관을 설치한 해군 함정에 의해 격퇴된 해적들은 이 배를 타고 그대로 도망쳤다고 했다. 그 도망친 방향이….
“남극?”
이 배는 그대로 남극까지 도망쳤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인빅타 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대부분 남극의 거대한 파도에 의해 휩쓸려 파괴되었을 거라고 했다.
샤를은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단순한 배가 아니겠지.’
바다 위는, 육지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신비가 아직 더 남아있는 곳이었다. 물리 세계와 신비 세계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곳이라고 할까.
뱃사람들이 특히 미신에 시달리거나 대양의 괴수에 대한 전설로 두려워하는 이유는 진짜로 본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짜로 있기도 했고.
‘어부형제단에 의해 개조된 배일지도 모르지. 인빅타호는 아마도 남극에 도착하기 전에 침몰했을 테니.’
어부형제단의 출몰 지형은 대체적으로 메트로폴 남쪽 군도 전부였으므로 그 배가 그들의 근거지라고 봐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게임하다보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어부형제단과 마주할 수 있는 데, 강어귀에 근거지를 만드는 경우도 있었고 이렇게 오래된 해적선을 타고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음. 근데 어떻게 하지?”
남쪽 바다 어딘가를 배회하는 어부형제단의 배를 찾기에는 여러모로 문제가 많다.
여기서 선택지가 있다.
윈즈강 근처의 나머지 어인들을 족치며 그곳의 위치를 알아낸다.
또는 인맥을 사용해서 남쪽 바다를 살피는 것이 2번째. 래보 거리에는 크로포드 시장은 물론이고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루미너스도 있다.
세 번째는 그 로렌이라는 자를 찾는 거다. 하는 일을 들어보니 어인들과 적대시하고 있었기 때문.
“어느 순서로 갈까.”
고심하던 샤를은 결정을 내렸다.
*
돈이 있어서 좋은 점은, 메트로폴 전체에 아주 넓은 영역 전체에 인적인 네트워크를 깔 수 있다는 점이었다.
샤를은 이 방식을 통해서 메트로폴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길 원했다. 그래서 유산을 물려받자마자 따로 계획하던 일이 있었다.
유마의 협조를 받은 에세나는 무명 교단의 세력을 확장하면서 동시에 신도들을 끌어들이는 일을 했다.
설령 무명 교단에 입교하지 않더라도 빈민가나 부랑자, 혹은 힘든 일을 하는 부두 노동자들은 주마다 달달이 금액을 지급하면 충실한 첩자로 변하곤 했다.
그들을 통해 대량의 정보를 습득한 에세나는 그 정보를 정리해서 샤를에게 넘겨준다. 그럼 샤를은 그걸 보고 내용을 취합하는 것이었다.
“흠. 이 선술집인가.”
그런 자들에게 얻는 정보는 별로 특별할 것은 없었다. 그들이 은밀하게 움직이는 영성자라고 추정되는 로렌을 발견하지는 못할테고.
윈즈강의 중턱에는 근처의 선주들이 모이는 모임이 있다. 용이 불을 뿜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용숨결 선술집에는 그런 선주들이 모인다.
윈즈강의 운송 사업을 담당하는 선주들부터, 남쪽 항구에서부터 올라오는 선주들까지 다양하게 보인다.
강 옆에 건설된 이 선술집은 오래된 목조 건물이었으나 부지가 좋아서 장사가 잘 되는 것 같다.
이번에는 정장 대신 평범한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갔다. 당연히 얼굴도 바꿨다.
이런 후줄근한 선술집에 정장을 입고 가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어서옵쇼.”
“맥주 한 잔.”
왁자지껄 떠드는 뱃사람들이 보인다. 샤를은 그들을 바라보면서 상당수가 이미 어인으로 변이가 끝난 상태라는 것을 확인했다.
선술집 주인은 코가 높고 피부가 하얀 중년인이었다. 길쭉한 콧수염을 길렀다.
“처음보는 손님인데?”
“처음 왔거든.”
샤를의 말에 주인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내 이름은 알렌 소픈이라고 하는데.”
“헨리 포드릭.”
가명을 댄 샤를은 오크잔에 담긴 맥주를 받자마자 호탕하게 목으로 넘겼다. 맥주가 여기저기 튀었으나 별로 개의치 않는다.
“이야. 잘 마시는 군.”
“꺼억.”
더럽게 트름까지 마친 샤를은 이 정도면 충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일단 샤를은 어인과 어인이 아닌 사람을 구분했다. 선술집 주인은 어인으로 보이지 않아 보인다.
‘자, 이제 어떻게 이 어인들을 요리할까.’
이 어인들을 제압할 여러 방법에 대해서 떠올리던 샤를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바닥에 미묘한 진동이 퍼진다. 물이 흘러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뭐지?”
샤를 뿐만 아니라 이 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손님들은 바닥으로 물이 들어오는 것을 봤다.
“무, 물이 바닥으로 들어오는데?”
“여! 알렌! 물 샌다!”
“아하하하하!”
술에 잔뜩 취한 취객들이 깔깔대는 사이 선술집 주인 알렌이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물이 대체 어디서 들어오는 거야?”
그때였다. 물이 차오른 바닥에서 어인들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뭐, 뭐야?”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하나같이 기괴한 어인들이 솟아나고, 같이 술을 마시던 상대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어인이 되는 것을 본 취객들이 뒷걸음질 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느낀 한 남자가 선술집의 정문을 열려고 했으나, 소용 없었다.
“무, 문이 잠겼다!”
그런 그 남자에게 가물치 어인이 달려들어서 그의 목을 잡고 들어올렸다.
“자,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와 하나가 되는 거다.”
“으, 으어억.”
덩치 큰 남자 하나가 허공에 매달려서 바둥거리는 모습.
그 순간, 샤를이 나설까 했는 데 갑자기 누군가 나타났다.
키는 작은 소년처럼 보였다. 소년은 정문을 그대로 박살내면서 등장했다. 발로 정문을 걷어차면서 동시에 가물치 어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대로 배를 찢고 관통하는 손.
샤를은 그 소년이 굉장히 낯이 익은 것처럼 보였다.
“!?”
“로, 로렌이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샤를은 그 소년이 세레스와 함께 사라졌던, 헥센 저택의 ‘괴물’이라고 불리는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