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2화 - “오셨군요.”
장엄한 분위기의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햇볕이 내리쬔다. 칠색으로 빛나는 빛은 문외한이라도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할 것이다.
예외가 몇 있다. 감성이 메말라서 별로 감흥이 없는 사람이거나 너무 많이 와서 이제 익숙해진 사람.
‘메트로폴 대성당’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땅 위에 있었다. 몇 번 화재가 일어나기는 했지만 많은 것들이 온전하게 보존되었다.
“오랜만이군요.”
“그렇지요. 안으로 들어오시죠.”
메트로폴 대성당에는 평일 오전에도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샤를은 소냐 에센리트의 안내를 받아서 인적이 드문 예배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얀색 제복, 사파이어 같은 푸른 눈동자와 주황색 머리카락. 예전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성녀는 게임 분기에 따라서 등장하는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등장할 경우, 성향은 세 가지로 나뉜다.
공격적인 이단 심문관이거나.
충실하게 신의 명령을 이행하는 사제거나.
갑자기 선택받은 평범한 신도거나.
소냐 에센리트는 명백히 세 번째 범주에 들어가 있었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광명자에게 선택되었고 그의 사도가 되어 쳐들어오는 암흑성도회의 영성자와 싸웠다.
그래서 떠받들어지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면서, 스스로 이렇게 차를 내왔다.
재스민이 들어간 차에서 깊은 향이 난다. 자리에 앉자마자 샤를과 자신의 앞에 찻잔을 하나씩 둔다.
“오늘 오신 목적은 역시 어부형제단과의 결전 때문이겠죠.”
“맞습니다.”
“그건 저희도 주시하고 있답니다. 요즘 어인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메트로폴의 음지에서 많이 발견되었거든요. 자, 여길 봐주세요. 우리 이단심문관들이 그간 수집해온 정보입니다.”
소냐가 보여준 지도에는 메트로폴의 전역이 그려져 있었다.
“남쪽 부두. 도시를 관통해서 올라가는 윈즈 강을 타고 대규모 공장이 조성된 콤포트 단지에 첫 번째로 침투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서서히 메트로폴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있죠. 아시다시피 윈즈 강은 메트로폴 전역으로 이동할 수 있는 요충지니까요.”
“강 대부분이 놈들의 영역이라는 거군요.”
“요트를 운영하는 선장들은 어부형제단과 연관이 있거나 실제 어인으로 변해버린 인간이 벌써 반 수는 넘은 것 같아요.”
“심각한 문제군.”
비밀 세계의 인물들이 알음알음 민간의 영역으로 퍼져나가긴 했지만 메트로폴의 척추라고 할 수 있는 윈즈 강 전체에 영향력을 끼치다니.
‘이대로 가면 엔딩 77이 나오겠네.’
엔딩 77은 어부형제단이 메트로폴을 장악하고 그 영향력을 사용한 수몰왕이 바다에서부터 시작해 육지를 모조리 해수로 뒤덮어버리는 것.
“어부형제단의 교주는 지금쯤 신성의 씨앗을 완전히 각성한 상태라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제 예상도 그렇습니다.”
샤를도 똑같이 생각했다. 샤를이 이러저런 사건에 휘말리는 동안 어부형제단의 교주는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았다.
그는 심해에서의 수련을 끝마치고 신성의 씨앗을 완전히 각성했을 확률이 높다.
“그럼 어부형제단을 없애려면…….”
“그전에요.”
소냐가 샤를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분께서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
여태까지 별말이 없던 광명자가 샤를에게 갑자기 말을 건다.
“그분께서는 당신에게 그동안 못다한 얘기를 들려드리고 싶어 하십니다. 초대에 응하겠습니까?”
“어부형제단과의 결전이 얼마 안 남은 지금 말입니까?”
“예. 사실 언제든 그분이 원하신다면 당신은 그분과 만날 수 있었죠.”
그렇긴 하다. 그와의 대담은 샤를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고.
“좋습니다.”
샤를의 말에 소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예배당 앞에 있는 광명자의 상징을 떼어냈다.
그의 심볼은 빛나는 태양. 각진 수십 개의 도형 중앙에 그려진 동그란 원이다.
“받으십시오. 그럼 그분과 대화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샤를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 상징을 잡았다. 그 순간 눈앞이 환해지면서 환상이 아른거린다.
*
환한 태양의 심볼은 샤를에게 어떤, 아주 머나먼 과거를 비추었다.
삑. 삐빅. 삐비빅.
기계에서 나는 단조로우면서도 중독성 있는 비트가 들린다.
샤를은 그 공간을 살펴보았다. 주변에 광명자가 있는가 살펴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니, 왜인지 익숙한 현대가 보였다.
한 남자가 게임기 앞에 있었다.
‘비디오 게임?’
브라운관 TV. 그 앞에는 콘솔 기기를 연결했다. 샤를이 넘어온 현대의 시점에서 한참 옛날인 것처럼 보인다.
삐빅. 삐빅. 삑.
남자는 말 없이 레트로 게임의 패드 버튼을 눌렀다.
주변에서 파리가 날아다닌다. 옆에는 짜장면 그릇을 잔뜩 쌓아뒀다.
여기저기 널린 과자들. 분명 익숙한 이름의 과자도 있었으나, 옛날 과자도 상당히 많았다.
이런 것들의 봉지는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고 치울 생각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세면대에는 설거지하지 않은 더러운 접시들에 땟국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고 창문 옆에는 담배꽁초 수십 개가 서로 몸을 기대어 재떨이에 안쓰럽게 낑겨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그 뚱뚱한 남자는 한쪽 다리에 테이프로 땜질 된 안경을 쓰고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더럽게 재미없네.”
팩을 하나 빼서 그대로 아무렇게나 던진다. 그가 기댄 침대 위는 게임 팩들이 쌓여 있었다.
쿵! 쿵! 쿵!
“어이 정씨!”
“아이, 씨발.”
욕설을 내뱉은 그 남자가 일어나서 현관문을 턱하고 열었다.
“뭐요.”
“아니, 이번달 집세 내야지.”
거칠게 문을 닫은 남자는 아무렇게나 모은 꾸깃꾸깃한 현금다발 뭉치를 꺼내서 그에게 건넸다.
“여깄슈.”
“……좀 치우고 좀 살아.”
“신경쓰지 마쇼.”
'쿵' 하고 문이 닫힌다. 주인아저씨는 나가면서 정씨의 욕을 한 다발 했다.
“어우, 저런 미친놈을 봤나.”
주인아저씨의 부인이 옆에서 묻는다.
“저 사람 아직도 저 게임인가 뭔가 한 대요?”
“그러게 말이야. 결혼도 안 하고 밖에도 안 나가고 집에서 게임만 한 대. 쯧쯧.”
밖에서 그를 흉보는 소리가 들리지만 정 씨는 이를 악물고 무시할 뿐이었다. 그리고 침대 근처로 와서 조용히 말한다.
“제기랄 돈 꼬박꼬박 주고 있는데 웬 참견이야.”
현실을 잊기 위해서 어떻게든 홀로 살아보려고 했는데, 홀로 살기 위해서는 이 게임들밖에 없다. 그게 그의 낙이자 삶이었다.
그는 선반 옆에 있는 레트로 게임 팩들을 이리저리 뒤적거렸다.
그러다가 처음 보는 팩을 발견했다.
전혀 치장 하나 없는 검은색 팩에는 하얀색 띠가 붙어 있었다.
‘더 메트로폴’
한글로 조악하게 써진 글씨의 게임. 대체 언제 거기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그 남자는 그 게임을 손에 잡고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신세계였다.
“후후. 그래. 이거지. 이거야.”
메트로라는 이름의 유적지를 건설하는 게임. 다른 게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자유도와 AI를 느낀 그 남자는 전율이 이는 것 같았다.
그 남자는 온종일 붙잡고 있는 것이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계속해서 그 게임을 붙잡고 있었다.
게임 폐인이었던 그는 순식간에 메트로를 하는 법을 익혀냈고 지하에 메트로를 계속해서 건설했다.
남자는 메트로를 건설하면서 영성자가 되는 방법을 익혔고 메트로를 전세계에 잇는 작업을 같이 행했다.
게임 속 여자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메트로를 만들고 완전히 그 세계에 몰입해 있었다.
메트로를 완공한 어느 날, 그는 눈을 뜨니 이미 게임 속에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더 메트로폴의 세계 속에 들어온 그는 지긋지긋한 현실보다, 차라리 이런 세계가 낫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신이 되는 길을 시작했다. 메트로를 만드는 여정 속에서 신성의 씨앗을 얻어낸 그는 스스로를 광명자라 칭하고 신도들을 받았다.
교세가 커지기 시작하고 그는 여러 대적자를 만나게 된다…….
“어떤가?”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아보니 그곳에 광명자가 있었다. 전신에 빛이 나서 도저히 바라보기 어려웠지만 제3의 눈으로는 똑바로 광명자를 바라볼 수 있었다.
“저게 바로 내 과거지.”
“게임 폐인이었던 과거요?”
“너도 그렇지 않았을까?”
“…….”
할 말이 없다. 샤를도 완전히 현실을 잊고 게임에 몰두했으니까. 차이점이 있다면 그는 가상 현실을 플레이했고 광명자는 레트로 게임을 플레이했다.
시간상 광명자가 이 세계에 먼저 오게 된 것일지도.
“난 어쩌다 보니 이 세계에 먼저 오게 되었지.”
“근데 전부 다 보여주진 않았더군요.”
광명자가 이 세계로 오고 난 뒤. 신이 되고 난 뒤. 그리고 샤를이 이 세계에 왔을 때,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등등.
아직도 많은 것들이 베일에 싸여 있었다.
“지금 할 생각이거든.”
“왜 지금 제게 이런 걸 보여주는 거죠?”
“이제야 자넨 자격을 얻었거든. 나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내 얘기를 들을 수 있지. 내 후계자가 될 수도 있고.”
그럼 그동안은 샤를이 너무 약했기 때문에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후계자?”
“이 세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단지 게임만이 아니라는 건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만.”
“이런 생각이 든 적은 없나? 로그아웃 버튼이 있을 거라는 생각.”
“……?”
샤를의 의문에 광명자가 말했다.
“자네에게는 상태창이 있지. 세이브와 로드를 할 수 있는 ‘운명의 셉터’도 들고 있지. 그럼 이 세상 어딘가에 ‘도감’이 있을 수도 있고 ‘환경설정’이 있을 수도 있지. 그럼 게임을 끝내는 버튼인 ‘로그아웃’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죠?”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나 보군. 이 세계가 현실 같은 환상일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무슨 개소리야? 현실 같은 환상? 그럴 리가 없다. 샤를이 겪었던 모든 것들은 현실이었다.
“내가 보고 있는 모든 건 전부 현실입니다. 내가 허상 하나 간파하지 못할 거로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뭐, 이 이야기는 됐어. 자네도 곧 생각해볼 시간이 될 때가 되었을 테니까. 이제 내가 다음으로 보여줄 것은 신이 되고 난 이후에 왜 이렇게 되었는지야.”
광명자가 샤를에게 자신의 심볼을 또다시 건넸다. 심볼을 받자 또다시 환상이 재생된다.
눈앞에는 광명자가 보인다. 그는 치명적인 공격을 옆구리에 맞아 구멍이 뻥 뚫린 상태였다.
“대체 왜……?”
가면을 쓴 남자가 그의 옆에서 끝도 없는 어둠으로 이뤄진 칠흑의 창을 들고 있었다.
그 가면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특이한 심볼이 그려져 있었다. 광명자는 그를 피해 달아나고 있었다.
환상이 움직이는 것을 본 샤를이 그 장면을 보면서 옆에 있는 광명자에게 물었다.
“저게 뭐죠?”
“내가 이렇게 된 이유지. 그리고 이 세계의 숨겨진 비밀이기도 하고. 자네 말이야. 시간 전쟁에 대해는 얼마나 알고 있지?”
“알만큼은 압니다.”
고대의 지식을 통해 여러 신이 싸웠고 그중 승자와 패자가 나뉘었다는 것 정도.
“시간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는?”
“책에 서술되어 있지는 않더군요. 하지만 뭐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틀렸어. 나도 맨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지. 그것을 간과하다가 나타난 것이 바로 저 검은 가면을 쓴 남자다. 세상에는 이계의 신들조차 모르는 더 높은 차원에 두 개의 세력이 있었어.”
광명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모든 건 관리자(管理者)와 선각자(先覺者). 두 존재 때문에 조정되고 있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