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3화 - -나는 헤르메스에게 패배하고 그의 부하가 되었던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는 것이지.
-……진짜로?
-자유 의지로 움직이는 데도, 헤르메스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면 그건 꼭두각시가 아닌고?
샤를은 떨떠름하게 가위검을 자신의 그림자로 집어넣었다.
-그럼 이게 무슨 소리인지……. 제대로 설명해.
-자네는 꽤 신중한 편이어서, 속여넘기는 것은 어려운 편이었지.
-……?
-일단 확실히 말해주지. 내 삶은 헤르메스에게 속박되어 있었다는 것. 그리고 난 죽음을 통해서 헤르메스의 속박을 벗어났다.
-왜?
-친구를 위해서 좀 무리를 했거든, 일단 대화할 시간이 없어. 지금 한시라도 빨리 이 공간을 벗어나고 곧바로 차원문을 닫아버리게나.
샤를은 그를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가위검에 깃든 영혼을 그대로 통째로 뜯어버릴 수도 있었다.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를 때는?
-나 자신을 믿으라고 했었지? 좋아. 그렇게 하지.
어차피 이 차원문은 닫을 생각이다. 이 안에는 샤를이 원하는 것이 없다.
여섯 번째 석판 조각은, 문글로즈의 영혼에 깃들어 있을 것이므로.
비밀 서재 근처에서 알짱거리는 하늘치 한 마리를 총으로 쏴버리고는 차원문을 빠져 나왔다.
비밀 서재 옆에 있는 도끼를 들어서 차원문을 고정해둔 거대한 콩나무를 베어버렸다. 그러자 차원문은 곧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이제 안 쓰네 그 괴상망칙한 사투리?
-굳이 육체가 가진 본성에 이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더는 해내야 할 역할도 없고.
-꼭두각시란 게 무슨 말이지?
샤를은 가위검을 들어서 옆 탁자에 올렸다. 그러자 탁자에서 기이하게 생긴 연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그곳에서 하얀 영령이 나타났다. 겉만 그럴 뿐 형체는 문글로즈의 모습이었다.
그 영체는 턱을 괴고 말했다.
-꽤 예전 일이었지. 흠. 몇천 년 전의 일이었더라……? 아무튼 그때 나는 ‘친구’와 함께 지내고 있었지. 그는 꽤 재밌는 가설을 내게 전달했거든.
-서두는 필요 없고 용건만.
-쯧. 뭐 좋아. 구질구질하게 내가 패배하게 된 사연을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헤르메스에게 패배할 때 나는 강력한 금제를 받았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앞으로 그에게 유용하도록 말이지.
-유용……?
-맞아. 자네의 의심처럼 나는 헤르메스에게 유용한 일을 하도록 모든 행동이 조작되고 있었다. 이게 운명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놈들의 위험한 점이란 말이지.
-그래서?
-그러고 나서 나는 생각했다. 모든 석판을 통합할 통합자의 존재는 내가 예전부터 구상하던 것이었다. 헤르메스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존재는 그 정도의 존재 정도라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거든.
문글로즈는 혀를 차며 말했다.
-문제는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놈에게 이롭게 적용되기 때문에 통합자의 존재조차도 헤르메스에게 이롭도록 조정될 거라는 점이었어.
샤를은 생각했다. 지금 문글로즈가 하는 말이 맞는다면 통합자라는, 석판을 모두 흡수할 존재에 대한 안배 자체는 예전부터 있던 셈이다.
그의 말이 진실이라면 그럼 결국 몇 가지는 샤를의 추측이 틀렸다.
오스굿의 영혼이 샤를에게 석판을 넘긴 것은 문글로즈의 영향을 받아서 넘긴 것이고 샤를에게 해를 가할 생각 자체는 없었던 거로 보인다.
이건 굉장히 신빙성 있는 추측이다. 어느 석판 조각을 손에 넣더라도 재생할 수 있는 과거의 기록에 자기 자신의 분신으로 된 환상을 숨겨서 대응할 정도였으면 모든 석판을 통합할 존재에 관한 것은 진실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그럼 물어볼 게 있다. 왜 자살하지 않았지? 꼭두각시가 되는 것보다는 다른 물건에 영혼을 깃들게 하는 것이 나을 텐데.
-헤르메스가 그렇게 바보는 아니지. 내가 죽더라도 그 저주는 계속 적용된다.
-?
그럼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주변에 헤르메스가 인정한 대적자가 있으면 그 저주를 걱정할 필요가 없지.
-신비는 더 위대한 신비에 굴복한다는 말이군.
비밀 세계의 영성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법칙이었다. 어떤 주술이나 점술이 더 큰 신비스러운 것에 깨지게 되는 건 샤를도 자주 경험한 일이다.
석판을 다섯 개까지 소화한 샤를은 지금 시점에서는 이 메트로폴의 누구보다 강했겠지.
-하지만 그걸로는 내게 죽는 게 설명이 안 돼.
-자연스러운 죽음을 위장하려면 어쩔 수 없었지. 봐라, 그 검에 찔려 죽자 곧바로 검에 흡수되니 흔적조차 찾기 어려울 테지.
-완전히 믿긴 어려운데.
신뢰란 얇은 끈 같은 거다. 끊어진 뒤에는 아무리 열심히 봉합한다고 해도 언제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불완전한 것이 된다.
-나도 뭐, 날 온전히 믿으라고는 안 해. 다만 적의 적은 아군일 수 있지 않냐는 질문이지.
-이용의 대상이란 말이군.
샤를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냐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고민은 나중에 미뤄두기로 했다.
-시험이 끝났으니 내게 석판을 이전해라.
-조심하는 게 좋아……. 여섯 번째 석판을 손에 넣고 난 이후에는 지금까지 보다 더 큰 위협이 닥쳐오게 될 거다. 어떤 식으로든…….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애초에 샤를 본인이 신비하고 괴기한 것들을 끌어들이는 블랙홀 그 자체나 마찬가지였다.
본인이 스스로 주도해서 그걸 찾아가는 타입이기도 했으니.
어쨌든 샤를은 검에 깃든 문글로즈의 영혼에서 석판을 추출해냈다.
눈을 감고 심상 세계로 들어서자 새로운 지형이 생겨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뭔가 달라진 게 느껴졌다.
대기.
전신으로 파고드는 압박감. 본래는 없었지만 새로 생겨난 대기압에 주먹을 쥐었다 폈다.
‘살아있는 생물도 넣을 수 있겠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곧 무시했다.
지금은 신대문자를 해석하는 게 더 중요했다. 문글로즈가 보관 중이던 거대한 석판이 중앙에 끼워지면서 석판이 온전해졌다.
금이 가 있던 부분은 누군가 시간이라도 되돌린 것처럼 처음의 온전한 형태로 착 달라붙어 있었다.
이제 이 석판에 적힌 문자를 읽을 수 있게 된 샤를은 첫 번째 문단부터 막히는 것을 느꼈다.
‘……해석이 여러 개야.’
석판을 흡수하자마자 곧바로 읽을 수 있게 될 줄 알았건만……. 신대문자는 기본적으로 상형문자라 뜻이 너무 많았다.
“안 되겠군. 신대문자의 전문가가 필요해.”
문글로즈라면 가능할 터. 이 공간으로 데려올까 싶었는데, 그를 믿기에는 너무 많이 위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곧 그만두었다.
‘어차피 그는 석판의 내용을 전부 알고 있겠지. 석판이 붕괴되는 동안 그곳에 있었으니까.’
생각해보면, 문글로즈는 아직도 샤를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너무 많았다. 의뭉스러운 모습.
눈을 뜨자마자 샤를은 문글로즈에게 말했다.
-내 검에서 나가주셔야겠어.
-그건 나도 원하는 것이지만 말이야. 흐음. 다른 데로 옮겨갈 곳이 없는 데.
샤를은 비밀 서재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 있군.”
-응?
-트럼프 카드다.
점술용으로 가끔 사용했던 트럼프 카드 덱을 열어서 안에 조커 카드 한 장을 뽑아냈다.
-……너무하는구먼. 이런 곳에 옮기겠다고?
-당신을 믿기가 어려워서 말이야. 내가 댁을 찢어 죽이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게 어떨까.
-난폭함, 그 자체로군.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라고 생각해.
조커 카드에 가위검을 갖다대고 사자소생의 서를 꺼냈다. 사자 소생의 서 1권에는 영혼을 다루는 비술이 적혀 있었으므로, 작고 얇은 트럼프 카드에 영혼을 이전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주문이 너무 잘 드는데?’
그냥 책에 있는 구문을 눈으로 읽었을 뿐인데 어떻게 발동하는지 이해하고 주문도 없이 사용했다.
석판을 소화하고 난 이후, 샤를의 기량은 최고조에 도달한 것 같았다. 이렇게 강력한 대마도사가 된 적은 게임 속에서도 드문 일이었다.
운명의 셉터의 부작용으로 실시간으로 최대치가 깎이고 있던 영성도 미미할 정도로 줄어들었다.
영성의 크기 자체가 엄청나게 커진 느낌이었다. 예전에는 소모가 너무 심해서 꺼렸던 운명의 셉터로 시간 치환을 하는 것도 손쉽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샤를은 카드를 꺼내 들었다.
-아, 댁에게 물어볼 게 있는데.
-또 뭐?
심기가 불편한 듯한 모습의 영체가 트럼프 카드에서 빠져 나왔다.
-헤르메스의 화신체인 트리메스 교수를 사로잡거나 처치하고 싶은데.
-흐음. 그건 나도 생각하던 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뚱한 인상을 하고 있던 문글로즈의 영체는 태도를 바꿔 적극적으로 나섰다.
샤를은 그가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협조하는 거라고 인식했다. 여기서 무능한 모습을 보이면 샤를에게 있어서 문글로즈의 가치가 그만큼 하락할 것이기에.
그리고, 문글로즈도 복수할 마음이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열망이 있었기에.
-통합자, 자네가 지금 엄청나게 강하다고 하더라도, 헤르메스의 화신체에게 싸움을 거는 건 손색이 있다네. 그는 수천 년을 살아온 존재야. 그만큼 많은 능력을 갖고 있지.
그건 이미 봐서 알고 있었다. 트리메스 교수를 볼 때마다 매번 다른 능력을 사용한다.
사람에게 친근감을 주는 매료 능력, 기록을 지우는 능력, 총알에 벌집이 되어도 살아나는 불사성. 주문서를 사용하는 능력.
공간을 굴절시켜서 뭐든 막아내는 결계, 심지어 자신의 하수인이었던 보슈 백작의 인피를 교체하는 것만으로도 공허에서 탈출했다.
마치 상대방의 자아 위로 자신을 뒤집어쓰는 것처럼 사용해 부활하는 모습…….
실로 이런 강적이 없으리라.
-자네도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겠지만, 상대는 자네보다 더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해.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건, 또 자네가 모르는 주문, 유물, 조력자가 등장할 수도 있지. 끔찍할 정도야.
샤를의 이전에 그와 싸워봤던 존재로서, 문글로즈만큼이나 적에 대해 잘 아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모든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싸워야 해.
-모든 능력이 없는 상태라…….
-그런 공간이 가끔 있지. 어떤 주문도 유물도 사용할 수 없는 곳.
생각해보니, 샤를은 문글로즈가 만들어낸 가상 현실도 그와 비슷한 공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놈을 가상 현실로 끌어들여서 처치한다?
가상 현실에서의 죽음이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가 있나? 이 부분은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고 판단했다. 굳이 그 방법이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방법은 많으니까.
샤를은 문글로즈와의 대화를 끝마치고 트럼프 카드를 비밀 서재에 두고 나섰다.
시간을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았다. 샤를은 그 가상 현실에서 엄청난 시간을 보냈건만 이곳은 그대로였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밖으로 나가자 저택의 정원을 거닐던 플로나가 보였다.
“돌아왔군.”
저 멀리서 걷던 플로나는 시선을 느꼈는지 샤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방긋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샤를은 거침없이 정원을 향해 걷다가, 플로나를 보자마자 바로 껴안았다.
“어, 어어?”
플로나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저, 저기, 샤를님 지금은 아직 낮인데.”
“조금만 이러고 있을래?”
“……네에에.”
아닌 것처럼 행동하지만 강철 같은 샤를의 멘탈도 그 기나긴 세월 동안 갈기갈기 찢어져 버렸다.
이렇게 타인의 감촉을 껴안고 있자 텅 비어있던 마음속의 무언가가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