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1화 - 하늘치가 어디서 튀어나왔는지는 짐작이 간다. 샤를의 비밀 서재에는 문글로즈가 살고 있는 그 이상한 공간으로 가는 차원문이 아직도 열려 있었다.
“어서 잡아!”
집사 제이크가 소리치자 저택의 하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면서 날아다니는 물고기를 잡으려고 난리를 쳤다.
참다못한 플로나가 뛰다시피 날아서 주방에서 쓰는 국자로 하늘치의 머리를 내려친 이후에야 결국 정리가 되었다.
“휴. 다들 이 물고기 좀 처리하세요.”
“주방에 가져갈까?”
“이런 걸 먹어도 되나?”
“글쎄.”
샤를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먹어도 문제는 없을 거야.”
“아! 샤를님. 오셨군요.”
“그래.”
“대체 저런 게 어디서 나왔을까요?”
“…….”
미뤄뒀던 일을 끝마쳐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다음날 샤를은 비밀 서재로 향했다. 안쪽에는 차원문이 일렁이면서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의 빛을 비추고 있었다.
차원문은 거대한 나무뿌리 같은 것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샤를이 안으로 들어서자 여전히 구름이 가득한 공간이 나타났다.
문글로즈는 여전히 같은 곳에 있었다. 그가 씨익 웃으면서 물었다.
“요. 또 왔는 감?”
“그쪽에 살던 하늘치가 우리 집까지 들어왔는데요.”
“내가 여기 사는 매운탕거리를 다 통제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여. 어떻게 하라는 겨.”
“……아무튼 이 차원문은 곧 닫아야 할 것 같군요. 전 준비가 됐습니다.”
문글로즈의 차원문이 오래 열려 있으면 안 되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험을 치르겠다는 말이지?”
“예. 헌신의 시험을 치르죠. 석판의 힘을 소화하고 싶으니까.”
당장 필요한 것은 힘이었다.
“흐음. 각오는 된 듯 허구마잉.”
문글로즈가 손을 뻗어 샤를을 가리켰다. 눈을 감자마자 샤를은 새로운 가상 현실로 들어설 수 있었다.
오랜 원시림이 보인다. 그리고 저 끝에 거대한 장벽이 보였다.
“이게 헌신의 시험……?”
이 가상 현실은 샤를의 기억과 경험이 모여서 만들어진 곳이라고 했었으나, 이런 장소는 샤를도 전혀 본 적이 없었다.
“뭘 하라는 거지?”
아무도 없다. 주변을 둘러보니 태곳적을 간직한 원시림 같았다. 숲에는 통로라고 할만한 곳이 전혀 없었다.
“아무 것도 없군.”
이번 시험에도 유물이나 주문은 전부 봉인 당했다.
샤를은 일단 주변에서 기다란 나무 막대기를 줍고, 숲을 헤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옷과 신발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맨발로 이런 곳을 돌아다니라고 했으면 여기저기 상처를 입었을지도.
숲을 헤치고 거대한 장벽으로 가까이 가자 그곳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뭐가 이렇게 높지?”
크다는 개념은 보통 한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 ‘끝도 없어 보일 정도로 거대한’ 통나무를 엮어서 만든 목책은 위를 아무리 올려다보아도 끝에 도달할 수 없었다.
아득한 하늘 위에 거대한 구름으로 가려져 있다.
위를 쳐다보는 것을 그만두고 주변을 둘러보자 장벽 한쪽에 뚫린 입구와 웬 오두막 같은 것이 보였다.
오두막은 장벽의 입구 앞에서 마치 검문소라도 되는 것 마냥 서 있었다.
그곳으로 걸어가자 인기척이 느껴졌다. 무언가 딸각거리는 소리. 문을 똑똑 두들기자 안에서 우당탕,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로 왔구나!?”
문이 벌컥 열리고 안에 있던 사람이 나타났다. 그자는 실로 기괴했다.
자신의 모든 몸이 환하게 빛나는 것 같은 사람이었다. 너무 빛이 나서 이목구비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당신은…….”“나 대신 여기서 파수꾼 노릇을 할 사람이!!”
“예?”
빛나는 자는 환호하면서 샤를과 악수를 하고는 당장 안에 들러서 뭔가 집어갈 만한 도구들을 챙겼다.
“이게 뭡니까? 당신은 누구고요?”
“잘됐네. 자네는 이제부터 다음 파수꾼이 올 때까지 이곳을 지키고 있어야 해.”
“예?”
“그게 드아르크모르녜(헌신의 시험)이라네.”
“…….”
샤를은 그 빛나는 자의 ‘이상한’ 단어를 듣고 그게 헌신의 시험을 의미하는 것을 깨달았다.
“잘 있게. 나는 이제 헌신을 끝냈으니 은퇴할 때가 되었지.”
“자, 잠시만요. 당신은 누굽니까?”
“휘말려버린 불운한 자라고 해둘까. 나중에 만날 수 있다면 다시 보게. 새로운 파수꾼이여.”
빛나는 자는 목책의 문을 마구 두들겼다. 그러자 안쪽에서 거대한 빛이 일어나더니 그 경계선 너머로 사라졌다.
‘나 말고도 헌신의 시험을 치르는 자가 있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샤를은 털썩 주저앉았다. 빛나는 자가 일렀으니, 이제 샤를은 파수꾼이 된 셈이었다.
“뭘 해야할지 모르겠어.”
일단은 다음 파수꾼을 기다리기로 했다. 오두막 안쪽에는 이런저런 가전 도구들과, 먹을 것들이 놓여 있었다.
그날 하루는 오두막에 있는 침대에 누워서 잠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사흘이 지나자, 샤를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이봐요! 문글로즈! 이곳에서 내보내주시죠! 시험은 다음에 치를 테니까.”
묵묵부답. 샤를은 하루가 더 지난 뒤에야 자신이 이 미친 공간에 갇혔음을 느꼈다.
주변을 아무리 탐색해봐도, 끝없는 숲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세상을 반으로 쪼개 한쪽은 거대한 벽, 다른 쪽은 숲으로 만들어둔 것 같다.
“사냥이라도 해야겠군…….”
창고에 곡식 자루가 있었으나 그 안에 든 것은 빛나는 돌덩이들뿐이었다. 아마도 이전 파수꾼이 먹던 것일지도.
샤를은 원시적인 무기부터 만들었다. 활을 만들어서 사냥하고, 그날 하루를 버텼다.
“여긴 기존의 세계와는 시간의 흐름이 다른 것 같아.”
그렇게 한 달이 더 지나고 나니 알 수 있었다. 이 시간은 현실과는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
거기다, 체력의 소모는 거의 느껴지지 않고 잠을 자지 않아도 잔 것과 같은 상태다.
파수꾼의 일상을 살게 된 이후로 누군가 장벽 너머로 올 거로 생각했으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에 붙잡혀 버린 것인가.”
긴 세월 동안 강제적으로 붙잡힌 시간의 감옥. 그것이 헌신의 정체라고 샤를은 추측했다.
“여기서 얼마나 더 있어야 하지?”
화가 나서 장벽 너머로 건너가려고도 해보았지만 전부 실패했다. 위로 올라가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으며, 빛으로 이뤄진 그 경계는 넘을 수조차 없었다.
마모되어가는 정신을 붙잡고, 샤를은 생산적인 일을 하려고 어떻게든 노력했다.
밭을 일구고 사냥을 하고 새 옷을 지어 입으며 발동되지 않는 주문을 읊조렸다.
그러나 긴 시간은 마치 꿈인 것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그동안 활을 다루는 기술, 무언가를 만드는 기술은 늘어났다.
숙련된 사수가 되었으며, 사냥한 사냥감들을 도축하고 가공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혼자라는 생각은 사람의 정신을 좀먹는다. 마치 벌레처럼.
이런 주어진 일에 익숙해지지 않는 샤를은 어떻게든 이 난관을 타개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
“이 긴 시간 동안 나머지 석판을 소화해야 할지도…….”
하지만 이 공간에서는 유물도, 주문도 사용할 수 없다. 심지어 심상 세계로 넘어가는 방법도 없다.
“하지만 나는 여기 있지.”
그리고 샤를은 자신의 내면 어딘가에 나머지 석판들이 깃들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지 지금의 자신은 느끼지 못할 뿐이었지.
“아직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자신도 세지 않게 될 무렵이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니 온몸에 힘이 넘쳤다. 그리고 손과 발에 신대 문자가 적혀 있었다.
“뭐야?”
『끝없는 외로움과 정진 속에서 이름 없는 자가 자신의 힘을 깨닫게 되리라.』
『거룩하고 이름 없는 자를 찬양하라.』
『다른 세계에서 온 인신이여, 영원을 팔아 세계를 구하리라.』
『무한한 운명의 유예. 세상은 또다시 굴레로 되돌아가리라.』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제대로 해석을 한 것인지도 잘 모르겠네.”
공통적으로 무명자에 관한 언급은 되어 있지만, 나머지 문구는 대체 무슨 소리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팔뚝과 다리가 신대 문자 범벅이 된 이후로, 샤를은 몸에서 간질거리는 무언가를 느꼈으나, 그게 대체 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은 다시 흐른다.
샤를은 숲속에서 무언가의 기척을 느꼈다. 맨 처음에는 그 기척을 드러낸 자가 다음 파수꾼인 줄 알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으나, 그것은 곧 실망감으로 바뀌었다.
‘적’이다.
맹렬하게 살기를 내뿜는 숲속의 무언가. 샤를은 숙련된 사냥꾼이 되어 녹음에 몸을 맡기고 은신했다.
경계 너머의 장벽을 향해 걸어가는 이상하게 생긴 사슴이 한 마리. 아니, 사슴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분명 목 위는 사슴이지만, 목 아래는 멧돼지였다.
반대로 표현하면 멧돼지의 머리 위에 사슴의 머리가 달린 것으로 머리가 두 개 있는 셈.
놈은 끼긱거리면서 장벽을 향해 일직선으로 걷고 있었다.
“아, 생각해보니 거기 오두막도 있는데.”
저 거대한 덩치가 장벽의 경계로 향하면 진짜로 오두막도 날아갈 것이 뻔했으므로, 샤를은 일단 놈에게 싸움을 걸었다.
화살을 어깨에 맞은 괴물 사슴은 비틀거리다가 샤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야 이 멍청이들아!”
이런 강한 자극은, 샤를에게 있어 정말 오래간만에 느끼는 것이었다. 희열감이 치솟는 걸 느끼면서 괴물 사슴에게 다시 화살을 한 발 더 날린다.
괴물이 달려오자 샤를은 재빠르게 도망쳤다. 하지만, 주문도 없고 육체 능력도 일반인 수준에 그치는 지금의 상태에서 따라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전에, 뒤로 돌아서 사슴의 미간에 활을 겨누고 정확하게 쐈다.
세월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갈고 닦은 궁술 실력이 진가를 발휘해, 사슴의 머리에 정확히 명중했으나…….
“안 죽어?”
그 말대로 사슴의 머리는 축 늘어졌으나, 멧돼지의 머리는 잔뜩 흥분한 채 달려들고 있었다.
욕이 절로 나오는 상황. 급한 대로 평소에 사용하던 돌칼을 쥐어서 멧돼지에게 꽂으려고 했으나 반응속도가 따라가지 못했다.
덤프트럭에 치인 것처럼 몸이 허공으로 치솟고 놈의 어금니가 샤를의 갈비뼈로 파고들었다.
“큭.”
지독한 고통. 그러나 이 가상 현실에서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했다.
대신 느껴지는 것은 지독한 투혼이었다. 떨어지면서 그대로 멧돼지의 몸 위에 올라타서 돌칼 날로 놈의 옆구리를 쑤셨다.
고통 속에서 서로를 죽이려 울부짖는 두 짐승. 승자는 괴물 멧돼지였다. 샤를은 돌칼을 놓치고 떨어지면서 바닥으로 굴렀다. 충격에 견디지 못했으니까.
부르르르.
괴성을 내면서 한번 몸을 턴 멧돼지는 이제 샤를을 짓밟아 죽이려고 했다.
그때, 샤를은 고통에 허우적거리면서도 기이한 느낌이 들어, 손을 들었다. 그곳에 적힌 신대문자가 빛나고 있다.
그리고 칼로 찌르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저 멀리 있던 돌칼이 떠오르면서 샤를의 손에 잡힌 것처럼 떠올라, 괴물 멧돼지의 옆구리에 박힌다.
비명을 내지르면서 몸부림치는 괴물을 보면서 샤를은 이게 네 번째 석판의 능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양손을 들어서 마치 종이를 구기듯이 압박감을 준다.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이 움직이듯 엄청난 압력과 함께 괴물의 몸뚱이가 프레스기에 압착된 것처럼 찌그러진다.
“이게 네 번째 석판의 힘이군.”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염동력이다. 의지에 비례해서 강해지는 능력이라고 할까.
샤를은 피를 토하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재빨리 응급처치를 마쳤다.
염동력을 정교하게 사용해서 상처를 압박하고 되는 대로 소독을 끝마친 샤를은 숲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눈을 뜨고 나면 이 악몽이 끝나 있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샤를은 차가운 시체 옆에서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