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 순간, 엄청난 영압이 느껴졌다. 거대한 영적 존재가 내뿜는 영성으로만 공간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틱. 톡. 틱. 톡.”
누군가 시계의 초침이 흘러가는 것을 입으로 소리 냈다.
고개를 돌리자, 갈라진 광대 모자의 사이에 조금 전에는 없었던 무언가가 서 있었다.
서 있는 광대는 조금 전의 광대와는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니 달라 보였다. 조금 전의 녀석보다 더 화려한 옷차림.
샤를은 권총을 꺼내서 마구 갈겼다. 그 총알들은 허공을 가로지르며 광대를 관통했다.
“환영인가.”
샤를은 무심하게 마탄을 장전했다. 홀로그램 같은 허상이다.
“생각을 해봤는데 말입니다?”
초침 흉내를 내는 광대는 입이 두 개라도 된 것인지 초침 소리와 동시에 말을 했다.
“세상에 두려움이 없는 존재가 있을까요?”
틱. 톡. 틱. 톡.
“그 노인도, 맨 처음에는 그렇게 겁먹지 않고 내 영역으로 들어왔더란 말이지요. 그들의 선조와도 같이.”
“할아버지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광대의 말에 레나 카르펜이 소리쳤다. 광대는 답변을 듣고 검지를 위로 들면서 말했다.
“이야기에는 순서가 있는 법. 공포를 모르는 자들과의 이야기를 해결해보고 나서, 당신에게 그 노인의 이야기를 들려드리지요.”
광대가 손가락을 쫙 펴면서 뒤쪽 주머니에서 모래시계를 꺼냈다.
“선언합니다. 이 모래시계가 떨어질 때까지 공포를 모르는 자들은 공포를 배워오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은 모두 자신의 감옥에 갇히게 될 겁니다.”
“……?”
철컥. 철컥. 주변의 공간이 접히는 모습이 보인다. 브라이튼 박사가 실색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슨 악마의 힘이 이렇게 강하죠?”
“흐음.”
샤를은 턱을 괴었다. 실제로 물리적 공간이 접히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단지, 브라이튼 박사나 샤를이나 언제부터인지 환술에 걸린 것만은 확실했다.
“이게 거지황제의 능력인가.”
“그게 무슨 말이신지?”
“우리는 따로 환술로 격리된다는 것이지. 조금 이따가 보자고.”
샤를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이 공간에 들어온 순간부터 환술에 걸린 거다.
레나 카르펜은 샤를과 브라이튼 박사를 번갈아 보았다.
그들은 마치 돌이라도 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멈춰 있다.
그들에게 다가섰지만, 그 앞에 무언가 거대하고 보이지 않는 장벽 같은 게 있어서 그들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교수님? 박사님?”
“자자, 레나 카르펜. 노마 선생에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카르펜 일족의 마지막 남은 말예라고 들었습니다.”
광대는, 기존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침착하게 질문했다.
오히려 그 모습에 레나 카르펜은 긴장하면서 광대에게 다가섰다.
광대의 앞에는 어느 순간 테이블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는 그 앞에 앉으면서 반대편에 레나가 앉도록 권유했다. 잔뜩 긴장한 레나 카르펜이 테이블에 앉자, 광대가 품에서 트럼프 카드를 꺼내면서 섞었다.
“자, 당신은 노마 카르펜에 대해 궁금해한다지요?”
“……할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게 너야?”
“음. 전 아닙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지요.”
트럼프 카드를 멋들어지게 섞는 광대는 옆에 있는 모래시계를 주시했다. 남아있는 시간은 30분 정도였다.
“자, 이걸 봐주십시오.”
광대는 오른쪽에 육각형의 돌을 꺼냈다.
“이건……?”
“카르펜 가문은 너무 오랫동안 이어져 온 나머지, 자신들이 무엇을 봉인하고 있는지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
“당신의 할아버지는 많은 것을 간과했지요. 내가 누구인지 몰랐다는 것과 동시에 나와 싸워보겠다고 내기를 한 점입니다.”
“무슨 내기?”
“노마 카르펜이 승리한다면, 나는 또다시 저 제분기에 봉인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승리한다면 나는 노마 카르펜에게서 이 봉인을 풀 수 있는 열쇠를 받기로 했지요.”
내기는, 트럼프 카드로 하는 게임이었다고 광대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결국 내게 패배했고, 자살해서 도망치려고 했지요.”
“……!?”
“하지만 그전에 내가 계약을 이행했습니다. 그의 영혼은 여기 있습니다. 이 영혼석 안에요.”
그 돌은 영롱하게 비치는 영혼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
레나는 그걸 보다가, 순간적으로 손을 내밀어서 영혼석을 빼앗으려고 했다.
“워후. 반칙은 안 됩니다.”
영혼석은 순식간에 광대의 소매로 빨려 들어갔다. 화가 난 레나가 권총을 들어서 광대를 위협했지만, 그는 코웃음을 쳤다.
“얼마든지 쏴보십시오. 아까 전처럼 통과해서 그냥 지나갈 테니. 여기는 내 권능이 미치는 권역. 여기선 내가 만든 룰이 절대적인 규칙입니다. 그 영향권에서는 심지어 나조차도 벗어날 수 없지요.”
“그래서?”
“당신은 이 내기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얌전히 돌아가서, 저택에서 지낼 수 있지요. 하지만 나를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내기를 해야만 합니다. 그게 규칙. 권총 같은 시답잖은 거로는 어렵죠.”
레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지금은 누구도 그녀를 도와줄 수 없는 상태. 그러니 이 일은 그녀가 해결해야만 했다.
“좋아. 하지만 내기를 하기 전에 무엇을 걸 것인지 정해야겠지?”
“훌륭한 기백이군요. 좋습니다. 무엇을 걸겠습니까?”
“할아버지의 영혼을 되돌려줘. 그리고 넌 다시 봉인에 들어가.”
“원하는 게 너무 많군요. 뭐, 그래도 저는 관대하니까요. 그럼 저는 패배하면 당신의 영혼을 받겠습니다.”
“알겠어.”
광대는 카드를 섞으면서 말했다.
“이건, 별로 상관 없는 얘기겠지만, 왜 카르펜 가문이 이 봉인을 지키고 있었는지 아시나요?”
“아니.”
“카르펜 가문이 자신들의 명운을 걸고 나를 이곳에 봉인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영락했더라도 그때까진 신이었기 때문이지요. 뭐, 지금은 악마 나부랭이지만. 자, 그 정도의 대가는 걸 가치가 있습니까?”
“좋아. 그렇게 할게.”
“아주 좋군요. 할아버지의 영혼을 걸고 듀얼이라니. 카르펜의 말예는 예전 선조의 모습만큼이나 훌륭해.”
광대는 현란하게 치장된 자신의 입술을 혀로 핥았다.
“무슨 게임을 할까요? 선택지를 드리지요.”
“블랙잭.”
“자, 그럼 코인을 준비하지요.”
광대는 손을 뻗었다. 테이블 옆에 저절로 동전이 생겨났다.
“빨간색 칩은 10. 초록색 칩은 5. 노란색은 1입니다.”
빨간색 10개, 초록색 10개 노란색 10개. 도합 160점.
“칩이 떨어지면 끝입니다.”
*
샤를은 어떤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진짜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아닐 것이었다. 이곳은 거지황제가 만든 환상 속이니까.
“흐음.”
샤를은 어느새 자신의 옆에 서 있는 광대를 보았다. 이것도 필시 환상일테지.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이 뭡니까?”
“글쎄.”
“내가 늘 생각하는 것이 있지요. 공포를 모르는 자가, 어찌 인간일 수 있겠습니까?”
“감정이 결여된 사이코패스도 생물학적으로는 인간이지.”
“아니지요. 그건 인간의 형상을 한 무언가입니다.”
궤변이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정의를 듣자고 광대가 이 공간을 만든 것이 아닐 터.
“당신의 내면에 있는 두려움을 꺼내십시오. 상상하기만 하면, 그건 현실로 이뤄질 겁니다. 그러면 이 환술은 풀리게 될 겁니다.”
샤를은 이 공간 전체를 점유하고 있는 영압을 느꼈다. 주변을 둘러보며 마법의 구조를 파악한다.
샤를에게 두려움. 그건 바로 이 세상이 멸망하는 것이었다. 그 자신의 업이 통째로 소멸하는 그 순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몇 번이고 반복됐던 배드 엔딩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샤를의 공포였으나, 그는 그것을 상상하지 않았다. 대신 구체적으로 주변을 분석했다.
두려움은 놈이 가진 힘의 근원이었다. 그러니, 놈의 방식대로 하는 것은 하수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타고난 반골 김샤를씨가 남이 해달라는 대로 해줄 수야 없지.
‘근데, 난 도대체 언제 환술에 걸렸지?’
샤를은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환술에 걸린 시점.
“틱. 톡. 틱. 톡.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요. 반성하십시오 낫─휴먼.”
“닥쳐 봐.”
언제 걸렸지? 이 공간에 들어선 시점인가? 아니다. 거대한 영압이 나타나고 나서 무언가 주문을 건다는 느낌은 없었다.
눈을 감고 깊게 생각한 샤를은 곧이어 깨달았다.
“회전목마를 목격한 순간부터 환술에 걸려 있었군.”
회전목마를 보자마자 샤를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그 이후로, 무언가 많은 것이 결여되어 있었다.
‘어떻게 이동했었지?’
예를 들면, 샤를은 어떻게 레나 카르펜이 있던 부둣가로 갔었지? 그녀를 구해준 것은 기억하지만, 회전목마에서 부둣가로 이동한 기억은 없다. 그냥 조금 걸었으니 나타났을 뿐이지.
부둣가에 조금 있다가 브라이튼 박사가 합류한 것도 그렇다. 브라이튼 박사는 대체 어디 있다가 부둣가로 왔지?
‘그리고 난 왜 그 점에 관해서 묻지도 않고, 이상하다고 느끼지도 않았을까.’
샤를은 손을 뻗어서 티마이오스의 정다면체를 꺼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닥쳐.”
샤를은 정다면체를 돌렸다. 정십이면체로 변한 정다면체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기억조작자.”
-흐음. 나를 불렀나?
“내 기억을 좀 먹어줬으면 좋겠는데. 그에 대한 대가는 나중에 받기로 하지.”
-빚을 지는 건 별로 탐탁잖다만, 어쨌든 기회를 걷어찰 수는 없지.
기억조작자는 샤를의 이마에 촉수를 댔다. 그리고 샤를이 원하는 기억을 딱 골라서 제거했다.
“무, 무슨 짓이야!? 이건 룰 위반이라고!”
“응~ 룰이란 깨라고 있는 거야.”
환술에 걸렸던 기억 자체를 삭제하자마자 샤를은 그대로 깨어났다.
*
환술에 걸렸던 기억이 사라지자, 샤를은 이곳에서 레나 카르펜과 광대가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샤를이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은, 광대와 영혼의 듀얼을 펼치고 있는 레나 카르펜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광대와 내기를 걸었던 건가.’
칩의 양을 보건대, 일방적으로 광대가 밀어붙이고 있다. 게임은 쉽다. 블랙잭이다.
레나의 앞에 놓인 것은 10원짜리 칩 하나. 그리고 카드는 9와 잭. 19점이다.
이제 광대가 뽑을 차례. 광대는 현란하게 카드를 거침없이 뽑았다.
“히트! 히트! 히트! 히트다 히트!”
하트 4, 5, 6, 6.
“으히히? 으히히히? 어떻습니까? 이것이 바로 야수의 심장 드로우입니다.”
“지랄. 동작 그만. 밑장 빼기냐?”
사색이 된 레나의 앞으로 다가온 샤를이, 광대의 손목을 잡았다.
“뭣이여?”
“앗!? 교수님!?”
환상에서 깨어난 샤를을 보고 레나가 깜짝 놀라서 반색했다.
“이놈 반칙했다.”
“네에!?”
샤를은 광대를 보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넌 지금 위에 카드를 뽑지 않고 한 장 밑에 있는 카드를 뽑았을 것이여.”
“!? 증거 있습니까?”
“있지. 저 카드 위의 맨 윗장. 7 아니야?”
“……!”
“7이면 너 죽는다. 자 까봅시다.”
카드 위에 손을 얹은 샤를이 맨 윗장을 뽑아서 펼쳤다.
“7이네?”
“7이에요!?”
“자, 그럼 22인걸 21이라고 구라쳤네? 손 모가지 날아간다잉.”
“자, 잠깐 기다려. 내 손목은 왜?”
광대가 소리치면서 손목을 빼려고 했지만 샤를이 꽉 쥐고 있어서 소용없었다.
“구라치다 걸리면 피본다는 거 못배웠어?”
샤를은 알료샤의 가위검을 꺼내서 광대의 손목을 그대로 동강내버렸다.
“끄아아아아악.”
“이거 룰 위반이야 이 개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