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화 - 트리메스 교수는, 이제 보슈 백작 부인의 몸으로 부활했으니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샤를은 골똘히 생각했다. 이상한 것이 하나 있다.
놈의 목적이다. 놈은 세상이 멸망해도 상관없다는 듯이 움직였다.
루프 전에, 샤를을 방해해서 암천사를 온전한 방식으로 암천사를 소환하게 했었다. 샤를이 자살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엔딩 91』로 세상이 멸망했을 것이다.
‘놈은 광인이야.’
당연히 알고 있다.
하지만 왜 이런 방식으로 계획을 짰지? 샤를이 놈을 막지 않았다면 세상이 멸망했을 거다.
‘……이놈. 혹시 내가 자신의 계획을 파훼할 것이라고 믿고 그런 짓을 저지른 건가?’
샤를이 트리메스의 계획을 막지 않았다면 세상이 멸망했을 것. 루프 전에는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고.
‘뭔가 이유가 있어.’
놈이 흑막 짓을 한다는 점을 미루어보아 생각하면 헤르메스는 세상이 멸망할 만큼 위험한 사건들을 샤를이 막도록 떠넘기고 자신의 목적에 대해서는 무언가 숨기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문제는 구체적인 목적을 모르겠다는 것.
‘신성의 씨앗을 수집하는 건 맞긴 한데.’
저번에 제롬에게 조사해오라고 시킨 결과, 헬파이어 클럽의 클럽장은 지금 실종된 상태였다. 신성의 씨앗은 완전히 없어져버렸다.
그리고 분명 알료샤의 심장에 박혀 있던 신성의 씨앗도 회수해갔었지.
그러다가 문득, 샤를은 신성의 씨앗의 형태에 대해 떠올랐다.
‘알료샤의 심장에 박힌 신성의 씨앗은 내가 파괴해서 제대로 된 신성의 씨앗도 아니었어. 그런 것까지 수집해갔다는 건. 놈은 신성의 씨앗을 종류별로 모으고 싶은 거다.’
신성의 씨앗을 바리에이션 별로 모으고 있는 거다.
요나스 샤프트에게선 ‘파괴된’ 신성의 씨앗.
데미 송버드의 ‘발아하지 않은’ 씨앗.
암흑성도회에서는 ‘조각조각 나뉜’ 신성의 씨앗.
‘이 생각이 맞다면, 다음번에는 개화한 신성의 씨앗을 노리게 되겠지. 아직 한 개가 남아있다.’
아직 어부형제단의 신성의 씨앗은 회수하지 못했을 거다.
어부형제단의 교주는 지금 거의 신성의 씨앗 개화를 끝마쳤을 터다. 아니면 신성의 씨앗을 개화하기 직전이거나.
또 하나 의문점. 트리메스 교수는 헤르메스라는 거대한 존재의 화신에 불과하다.
공허에 사는 히드라라도 헤르메스의 화신이지. 놈들의 불멸성은 화신이라는 점에서 얻게 된다.
‘그런데 굳이 트리메스라는 화신에 집착할 필요가 있었을까?’
화신은 하나일 필요가 없다. 보통 신들은 여러 개의 화신을 두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공허에 있는 트리메스라는 화신을 굳이 현실로 꺼내야만 했다라……. 여기엔 뭔가 이유가 있어 보인다.
‘헤르메스는 더 이상 화신을 만들 수 없게 되었다던가, 아니면 트리메스에게 어떤 특별한 것이 있어서 트리메스라는 화신을 포기할 수 없던가.’
또 하나의 의문점.
트리메스 교수는 샤를이 가진 석판을 노리는 것 같은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헤르메스가 샤를의 뒤통수를 치고 석판을 빼앗아 갈 것이라는 샤를의 추론이 틀린 것인가? 아니면 여섯 개의 석판을 다 모은 상태에서 본색을 드러낼 생각이라 당장은 힘을 기르는 것에 집중하는 것인가?
생각할수록 점점 더 수렁에 빠지는 것 같아, 샤를은 생각을 그만두었다.
‘이번에도 수습하는 건 그다지 어렵진 않겠어.’
루프 이전의, 완전히 부활한 암천사가 강림해서 세상을 개판으로 만든 뒤에는 수습이라는 게 불가능하겠지만, 이번 사건 정도야 그다지 어렵지 않을 거다.
그래도 아직 한 가지 남은 일이 있다.
‘루미너스의 문제인데.’
루미너스는 예언자를 위해 일한다. 그리고 예언자는 예전부터 두 명이 있었다. 헤르메스와 문글로즈.
둘은 예전부터 ‘수 싸움’을 해왔었다고 들었다.
‘아마도 문글로즈의 편에 선 것 같은데.’
루프 전의 대처를 보면, 루미너스는 암천사가 강림하자마자 마지막에 자살을 끝으로 생을 마감했다.
확실한 것은 없으니 루미너스를 제거하든, 아니면 설득하는 수밖에.
*
샤를은 이곳의 뒷정리를 제롬에게 맡기고 그대로 통로를 열어 포스트 테이너 거리로 이동했다.
자주 오지 않아서 낯선 이 거리는, 이미 경찰들이 쫙 깔려 있었다. 처음 보는 신입 경찰 한 명이 샤를을 발견하곤 다가왔다.
“어라? 더 오시면 안 됩니다.”
“무슨 일이라도?”
“이 거리의 가스등이 연속적으로 폭발한 사건이 일어나서요. 아무튼, 이 안은 지금 난장판입니다.”
옛 상급자를 상대로 상당한 격전을 벌인 것 같다. 유스티나나 골레릭은 심상 세계의 원탁에 온 적이 없었으므로 둘에게서 연락을 받으려면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여긴 없군.’
전투 도중 어디론가 흘러가 버리고 만 것 같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둘이라면 크게 걱정은 되지 않는다.
*
결과적으로, 샤를은 다음 날 아침, 정식으로 방문한다는 메시지를 남긴 경찰국장의 전보를 받았다.
돌아온 유스티나의 말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녀가 대화로 해결했다고 한다.
“대화로 해결을 했다고? 어떻게?”
전혀 말이 안 통하는 고집불통 수준이었는데?
샤를의 의문에 유스티나가 말했다.
“되던데요?”
샤를이 가기 전까지만 해도 박터지게 싸우고 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니, 아니지. 그렇게 서로 죽일 듯이 싸우고 있지 않았어? 내가 가고 난 다음부터 총질해댔을 거 아니야.”
“아, 물론 그랬죠. 근데 한창 싸우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멈추더라고요.”
알고 보니 그건 일종의 ‘시험’이라고 했다. 적당히 싸우고 난 뒤에는, 루미너스는 계속해서 전투를 이어나가지 않았다고 했다.
“흠. 일단 만나봐야 알겠지.”
다음날 오전, 루미너스는 약속대로 샤를의 빌딩으로 찾아왔다.
머리 위의 링은 여전했다. 누구도 그 링에 대해서 묻거나 의구심을 가지지 않는다.
들이온 백안에 백발을 가진 미녀의 모습은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이라기에는 여전히 이질적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웬일로 공손해졌지?”
“반말이 편하면 그쪽으로 하지.”
루미너스는 집무실 중앙으로 들어와서 소파에 털석 앉더니 그대로 발을 들어 올려서 거만하게 책상 위에 올려놨다.
샤를은 사무실 의자에 앉아서 저 멀리 거만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루미너스를 보았다.
재차 서로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 이런저런 떠보기는 없는 모양이었다.
“목적은?”
“여러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 말이야.”
이 여자는 루프 전에 샤를과 한바탕 싸운 적이 있었다. 지금 샤를이 루미너스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짜증과 적대적인 감정.
루미너스는 어떤지 모를 일이었다. 적어도, 좋은 감정이 있지는 않겠지.
“뭐든 물어보도록 해.”
“그래, 그럼 당신은 거짓 예언자라는 것을 아나?”
“거짓 예언자?”
샤를은 짐짓 고민한다는 듯 턱을 괴었다. 떠오르는 건 없었다.
“모르겠군.”
“또 하나 더. 더글라스의 실종에 대해서 아는 걸 털어놔.”
샤를은 잠시 고민했다. 둘러대느냐, 혹은 진실대로 얘기하느냐. 어차피 눈앞의 상대는 수사관의 최고 자리에 오른 영성자였다.
거짓은 통하지 않았을뿐더러, 샤를은 진실을 날것으로 얘기했을 때 이 여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더글라스는 날 도와서 어부형제단의 사악한 계획을 분쇄하는 도중에 죽었다.”
“……죽었다고?”
“그래. 애석하게도 나는 그를 구할 수 없었지.”
만약 그랬다면 적어도 더글라스가 샤를에게 협력하여 암흑성도회에 입교하지는 않더라도, 그렇게 적대하지는 않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간단히 죽었을 리가.”
무언가 알고 있다는 듯 루미너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내 눈앞에서 분명 죽는 걸 봤는데.”
“아냐, 당신이 잘못 봤을 확률이 높다. 아직 더글라스는 죽지 않았을 거다. 만약 죽었더라면, 진작에 죽었겠지.”
“……?”
이상하군. 왜 그런 식으로 얘기를 하지? 마치 이전부터 더글라스가 죽었을 거라고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샤를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물었다.
“애초에, 더글라스의 죽음이 뭐가 중요하지?”
“예언자가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루미너스가 자신이 들었던 말을 내뱉었다.
『더글라스는 메트로폴에 가면 가장 끔찍한 죽음을 맡게 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의 운명은 가장 예측 불가능하고 혼란스러운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다.』
“응? 그게 뭐 어째서? 예측 불가능하고 혼란스러운 방향이 뭐 어떻다는 거지?”
“그 이후에 예언자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리하여 더글라스 헨치는 폭풍 같은 운명 속에서 가장 위대하고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될 것이다.』
“흠.”
게으르고 배 나온 중년 오컬트 형사가 운명의 예측 불가능한 변수가 될 것 같지는 않은데.
어쨌든 루미너스가 저렇게까지 확신하는 것을 보면 더글라스는 어쩌면 살아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폭발 후에는 시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살아있을 거라고 가정을 하고 생각을 해볼까?
어부형제단의 최후의 계획이었던 생물 나무는 위대한 도시, 소르 이븐으로 향하는 이계의 문을 열어젖히는 나무였다.
샤를은 경매장에서 구입한 다이너마이트 다발을 묶어다가 나무를 박살 내버렸고, 나무 위쪽에 묶였던 더글라스는 그대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죽었을지도 모르나.
어쩌면 살아남아서 이계로 빨려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아주 낮은 확률이지만 찰나의 시간 동안 열렸던 이계의 문을 통해서 더글라스가 진입했을 수도 있다.
“뭐, 낮은 확률로 살아있을 수도 있겠지. 근데 무슨 상관이지?”
“그를 찾는 것을 도와줘라. 그러면 적대행위를 멈추겠다.”
샤를은 깍지를 끼면서 싱긋 웃었으나 이마에는 힘줄이 돋았다.
“흐음.”
이런 식의 협박 따위에 전혀 굴복할 것 없는 샤를이었으나, 더글라스가 이계로 간 것에 일말의 책임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잠시 한 번 더 고민해보기로 했다.
생각하던 도중, 루미너스가 말을 꺼냈다.
“내가 골레릭과 유스티나를 보고서 느낀 건, 반가움이었다.”
“응? 반갑다고?”
“그래. 루터 식스는 내 피와 땀을 통해서 만들어진 요원들이지.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피도 눈물도 없어서 아무렇게나 그들을 ‘소모’하고 ‘폐기’한다고 결정할지 모르나, 나는 적어도 모든 결정을 내릴 때 마음이 깎여나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
“이야기를 들어보니, 원래라면 골레릭도, 유스티나도 죽었어야 할 운명이라고 그러더군. 당신이 없었다면 이미 시체가 되어있었을 거라고 말이야.”
그건 맞는 말이다. 유스티나는 계몽주의자가 되어서 메트로폴에서 학살극을 벌이다가 죽었을 확률이 높고 골레릭은 샤를을 습격하다가 반격당해서 죽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샤를이 그들을 구해줄 마음을 먹지 않았었더라면 일어났을 결말이었다.
“거기에 대해서 감사를 해두지.”
“이미 루터 식스 요원이 아닐 텐데?”
“은퇴했더라도 루터 식스 요원이었다는 사실은 영원히 남지. 그거면 된 거다.”
샤를은 루미너스의 눈빛에서 따스함을 느꼈다. 마치 장성한 자식들이 은퇴한 걸 보는 큰할머니 같은 시선이라고 할까.
루프전에는 문답 무용으로 샤를을 습격하던 루미너스가 이렇게 온건적으로 나오는 데에는, 골레릭과 유스티나의 존재 여부가 큰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