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2화 - 샨티를 구출하자마자 샤를이 이곳에 급하게 온 이유는 아직 끝내지 못한 계획을 끝마치기 위해서였다.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루프 전에, 갑작스럽게 제롬을 비롯한 암흑성도회의 간부 20여 명이 모인 일.
그리고 그것을 막아내기 위해 가는 도중, 뜬금없이 암천사가 소환되었다.
그러니까, 암천사가 소환되는 일, 20여 명의 간부가 신성의 씨앗을 나눠 받기로 한 의식. 이 두 가지 사건은 별개인 셈이다.
그래서 샤를은 루프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이번에 왜, 누가 갑작스럽게 의식을 주최하는지를 알아오게 시켰었다.
-이번 소집은 루덴펠트 백작을 비롯한 그누사 일파가 한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간부들을 모아서 신성의 씨앗을 나누는 의식을 치르겠다고 하더군요.
그게 제롬의 보고였다. 이걸 미루어볼 때 샤를은 확실히 루덴펠트 백작과 보슈 백작 부인이 무언가 ‘서브 플랜’을 꾸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샨티를 납치했을 때, 샨티를 납치하는 데 실패했을 때. 치밀하게도, 이 두 가지 전부 대응할 수 있는 계획을 미리 짜둔 것.
‘그렇다는 것은 이게 서브 플랜이라는 거다.’
샤를은 제롬에게 정신파로 질문했다.
-밖으로 빠져나간 사람은 어느 계열 간부지?
-그누사 일파가 다수고, 샴발라와 아슐라 일파는 소수입니다.
‘그렇게 된 거군.’
-정신 공격에 대비해라.
-알겠습니다.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제롬은 충실하게 이행했다. 폭발과 연막의 혼란이 사라지자마자 남아있는 다수의 간부는 하나같이 멍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롬도 그 정신 공격에 당한 것처럼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루덴펠트 백작은 중앙에 있는 제단에, 신성의 씨앗에 손을 대고 오연하게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공이군.”
“그런 것 같군요.”
“생각보다 우리 계파가 아닌 다른 계파의 간부들도 빠져나간 모양이지만, 그것들은 우리 계파가 밖에서 정리해줄 거요.”
역시 그랬다. 밖으로 빠져나간 것은 가짜였고 자신의 일파만을 대피시키기 위해서 그런 것 같다.
“백작 부인. 회랑에 있는 간부들의 정신 지배는 끝났소. 이 조치는 일시적으로 이어질 거요.”
“얼마나 버틸 수 있죠?”
“대략, 15분 정도. 암천사를 이제 소환하는 게 좋겠소? 빙의체의 자질이 형편없긴 하지만, 정 방법이 없으면 그래도 상관없긴 하오.”
“네. 그렇게 하시죠.”
보슈 백작 부인은 고개를 돌려서 벡토를 바라보았다.
“예?”
“그동안 고마웠네.”
“무슨 소리시죠?”
“암천사의 빙의체가 되기 위해선 영적 자질은 가지고 있지만 영성자여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 있다네 벡토군.”
“……제가 영적의 자질이 있었습니까?”
“미약하지만, 그렇다네.”
“절 제물로 사용하실 생각이군요.”
이게 충성의 대가란 말인가? 벡토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권총을 백작 부인과 루덴펠트 백작에게 번갈아서 겨누었다.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나는 당신의 자식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여태까지 당신을 수행한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인데.”
보슈 백작 부인은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웃으면서 말했다.
“자식이라니? ‘개’라면 모를까.”
“그, 그럴 수가. 내가, 당신에게는 애완동물이었단. 그렇다는…….”
루덴펠트 백작이 손을 내밀자 벡토의 손에서 총이 떨어지더니 그는 멍한 표정으로 앞으로 걸었다.
“환술에 걸렸소. 중앙의 제단으로. 신성의 씨앗을 투여하면, 그럭저럭 불완전하지만 쓸만한 암천사가 될 거요. 뭐, 세상을 멸망시킬 정도로 강력하진 않겠지만.”
-지금 끼어들까요? 주인님?
-아냐, 기다려라.
샤를은 아직도 뭔가 남아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뭔가 있다. 여태까지는 루덴펠트 백작의 계획을 보아왔다.
하지만, 트리메스 교수에게 지령을 받은 보슈 백작 부인은 그 음험한 패턴의 특징상 흑막으로 활동할 가능성이 있다.
“아, 신성의 씨앗 말인데요 루덴펠트. 일단 그걸 사용하지 맙시다.”
“뭐요? 그러면 소환하지 않는 것만 못한데.”
“보여드릴 게 있어요.”
보슈 백작 부인은 자신의 백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러나 너무 작아서 안 보이는 듯하자 루덴펠트 백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말이요?”
“이게 안 보이시나요?”
“?”
보슈 백작 부인은 가방에서 꺼낸 손 말고, 등 뒤로 숨긴 다른 손의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손바닥에 잡힌 것은 데린저 권총. 크기도 작고 주먹만 한 권총이지만, 누구든 한 방에 보낼 수 있다.
그대로 권총을 뻗어서 기습적으로 루덴펠트 백작의 심장을 향해 쐈다.
탕! 탕! 탕!
너무도 불의의 일격이었는지, 루덴펠트 백작은 총격을 당하면서도 대체 왜 공격당하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구멍 난 곳에서 피가 울컥 터져 나온다.
“대, 대체 왜?”
“신성의 씨앗은 쪼개져야만 합니다. 그분께서 이번에 수집할 건 쪼개진 신성의 씨앗이거든요.”
“무슨, 말도 안 되는…….”
루덴펠트 백작이 쓰러지자마자 샤를은 혀를 찼다. 파기나레코르가 낄낄대면서 입을 열었다.
-이럴 줄 알았다. 툭하면 배신이네, 얘네는.
-트리메스 교수의 사주를 받은 여자인데 뭐, 당연히.
샤를은 제롬에게 지시를 내려서 보슈 백작 부인을 제압하게 시켰다.
-지금이다!
제롬은 환술의 영향에서 벗어나자마자 벌떡 일어나더니 품에서 차크람을 집어던졌다.
차크람은 정확히 보슈 백작 부인의 몸통을 꿰뚫었다. 피가 분수처럼 튀면서 장기가 반으로 갈려진 것이 보인다.
“커헉.”
“마지막까지 동료를 배신하다니……. 이런 쯧쯧.”
제롬이 그렇게 말하자 보슈 백작 부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의 손은 이미 제단 위에 놓여져 있던 신성의 씨앗으로 향해 있었다.
의식의 진행 도중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 신성의 씨앗은 20개로 쪼개질 것처럼 살짝 금이 나 있었다.
“이것까지도 예상하고 있었군요. 당신은.”
“……?!”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제롬은 보슈 백작 부인의 숨통을 확실히 끊으려고 재차 다른 차크람을 집어던졌으나, 소용없었다.
보슈 백작 부인의 주변에 물결 같은 파문이 일어나며 외부의 공격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백작 부인은 황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분의 안배가 이것이었구나. 나를 희생하겠노라.”
보슈 백작 부인의 얼굴 피부가 갈라지면서, 마치 ‘가면’처럼 인피(人皮)가 뜯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가면을 벗은 보슈 백작 부인의 얼굴은 근육만이 남아서 끔찍한 모습을 자아냈지만, 누구도 두려워하진 않았다.
그리고 보슈 백작 부인은 자신의 가방에서 새로운 인피 가면을 꺼내서 자신의 얼굴에, 덧씌웠다.
“트리메스 교수!?”
제롬이 놀라서 소리쳤다. 트리메스 교수의 얼굴을 가진 보슈 백작 부인의 몸이 이리저리 뒤틀리기 시작했다.
차크람에 꿰뚫려서 반으로 갈라진 몸뚱이는 원래대로 달라붙으면서 새살이 돋고, 그리고 보슈 백작 부인의 몸은 시간의 노쇠를 거스르며 점점 젊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거대한 파동이 회랑을 휩쓸자, 정신 지배를 당해서 멍하게 허공을 쳐다보고 있던 간부들은 모두 생명력을 빨아먹힌 것처럼 쪼그라들고 미라로 변했다.
제롬이 그 에너지의 흐름에 저항하며 재차 추가적인 공격을 가했으나, 보슈 백작 부인의 주변에는 일렁이는 공간 결계가 모든 공격을 막아내거나 다른 방향으로 흘려보냈다.
“다시 부활하니 기분이 좋군.”
샤를은 눈을 크게 떴다.
‘공허에 있는 자신의 신체를 버리고 물리 세계로 부활했다고?’
샤를은 암천사가 소환되는 것을 막아내려고 했으나, 결과적으로 트리메스 교수는 샤를의 계획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공허에서 부활했다.
샤를은 그 즉시 문을 부수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트리메스!”
“이야, 대적자로군.”
여성으로 부활한 트리메스 교수는 원래부터 선이 고운 미인의 얼굴이라 전혀 이상하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목소리조차 미성으로 변해버렸다.
무존자의 창-관통 주문을 활성화하서 퍼부었으나 공간을 왜곡하는 결계에 막혀서 양 옆으로 흩어졌다.
“당장 자네와 싸우긴 어려울테니 말이야. 이번에도 도망쳐볼까.”
“어딜!”
샤를의 손에는 운명의 셉터가 들려 있었다. 어떤 주문을 사용하던 저 공간을 왜곡하는 결계에 걸리고 말 터이니, 샤를이 사용하는 능력은 다른 것이었다.
엄청난 영성을 퍼부어서 운명의 셉터에 저장한 샤를은 트리메스 교수를 과거로 날려버렸다.
트리메스 교수가 있던 공간이 완전히 찌그러지더니 그대로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이대로 완전히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샤를은 아직도 이 운명의 셉터 능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의 정적이 사라지고 난 뒤에, 쓰러진 벡토가 벌떡 일어섰다. 그의 눈은 여전히 이지가 없는 상태였다.
그의 몸에 거대한 영성이 깃들기 시작하더니 그의 몸뚱이가 금간 도자기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자네, 시간을 조작하는 유물은 자주 사용해보지 못했군? 그건 그렇게 사용하는 게 아니라네.
그리고 허공에 균열이 생기면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슈 백작 부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나타나자마자 곧바로 몇 배속이라도 된 것처럼 배가 갈라지고 내장이 잘려나갔다. 동시에 얼굴에 인피 가면이 떨어져나가고 트리메스 교수의 가면이 달라붙는다.
- 필멸자에게 그 유물을 사용하는 것은 분명히 제대로 된 효과를 냈겠지만.
암천사가 허공에서 강림하면서 벡토의 등 뒤에 검은색 날개가 펼쳐졌다.
-나처럼 강대한 신격을 상대로 사용하면 효과가 없지.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있다네.
순식간에 현실로 강림한 트리메스 교수는 뒤에 있는 금이간 신성의 씨앗을 탁하고 낚아채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샤를의 권총이 몇 발 트리메스의 등을 꿰뚫었지만 공간 왜곡 결계로 인해서 소용없었다.
“아, 난 지금 자네를 이길 수 없으니 도망칠 거라네.”
“트리메스!”
“자, 그럼 이만!”
트리메스가 사라지고 난 자리에는, 암격사의 암천사가 강림해 눈을 번뜩였다. 그러나 예전과는 달랐다.
전신이 검게 물들어 있지도 않았으며 흐릿한 오라가 주변을 두르고 있는 것 같다. 얼굴도 베이스가 된 벡토의 얼굴 그대로였다. 바뀐 것이라곤 등 짝에 날개가 달린 것뿐.
루프 전의 암천사는 거대한 어둠의 셉터를 들고 있었으나 이 암천사는 무기조차 없이 맨손이었다.
뿜어지는 기운이 주변을 휩쓸면서 강대한 바람을 일으킨다.
-그분을 믿지 않는 자, 심판하리라.
샤를은 눈을 찌푸렸으나, 할만하다고 느꼈다. 이 암천사는 샨티를 매개로 소환된 존재보다 극히 격이 낮았으며, 질조차 떨어졌다.
“제롬! 암천사를 없애버릴 거다.”
“예!”
강한 풍압 속에서 샤를은 정신을 집중했다. 주문을 변형할 수 있게 된 이후로, 생각해둔 주문이 있었다.
무존자의 창은 백열을 일으키며 상대방을 찢어버리는 무시무시한 주문이지만, 대개의 상황에서 일반적인 공격 기술일 뿐이었다. 강력한 존재들에게는 그에 대항하는 치명적인 주문이 필요하다.
“제롬! 시선을 끌어줘.”
제롬은 암천사와 근접전투로 붙었으나, 형편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암천사는 무기가 없더라도 괴물 같은 전투력을 갖고 있었다. 허공으로 내지른 주먹 한 방에 풍압이 발생하며 바닥 타일과 벽면을 허리케인에 휩쓸린 것처럼 날려버렸다.
제롬은 로프를 던져서 암천사를 묶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아직입니까?”
“곧.”
밀리는 제롬의 옆에 알료샤의 가위검이 날아와서 그를 보조했다. 동시에 위쪽의 공간에서는 파기나레코르가 나타나서 주문을 난사해댔다.
샤를은 눈을 감고 주문을 연성했다. 불꽃과 냉기는 보통 상극이지만 다른 위상에 같은 주문을 동시에 사용함으로 둘을 합쳐서 사용할 수 있다.
“간다.”
-냉기불꽃의 춤.
새로 개발해낸 샤를의 주문이 쏘아지자 제롬이 뒤로 훌쩍 물러났다. 완성된 주문은 엄청난 위력을 선사하면서 암천사를 찢어발겼다.
마지막까지 암천사를 묶어두다 휩쓸린 가위검은 순식간에 파괴되어서 역소환 되었다.
“해, 해치웠……?”
“쓰읍.”
샤를은 제롬을 노려보았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당연하게도 해치웠다.
당연히 빙의된 벡토는 살려내지 못했다. 주문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는 오직 파괴된 흔적뿐이었다.
‘하지만 트리메스가 도망쳤어.’
여태 공허로 추방되어 있었던 트리메스 교수가 이런 방식으로 빠져나올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