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5화 - 시간이 꽤 걸린다. 고풍스러운 마호가니 의자에 앉아서 등 받침에 기대고는 책을 읽었다. 시문두하의 궁전에서 털어온 책 중에 하나다.
『글리치 노만의 유물제작법.』
글리치 노만은 300년전에 나타났던 유물 제작자였다. 그의 이름을 딴 유물의 수가 엄청나게 많고 그의 사후, 글리치 노만이라는 이름 자체가 일종의 브랜드화되어 아무 데나 그 이름이 붙어있으면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만큼 현대의 유물 제작자들에게는 글리치 노만은 위대한 존재였다.
「유물 생성에 필요한 재료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바로 영적인 재료가 있어야 하며, 두 번째는 강한 감정이 재료에 깃들어야 하고, 세 번째로는 규칙이 필요하다.」
「유물이 생성되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재료는 바로 감정이었다. 원념에 가까울 정도의 감정의 지속적인 투사가 있어야만 유물이 만들어진다.」
다 아는 내용이다. 페이지를 넘겨서 유물의 ‘변형’에 대해서 찾아보았다.
「유물을 변형시키기 위해서는 제작과 같은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먼저 만들어질 때 사용되었던 것과 같은 재료가 필요하다. 영적 동질성이 없다면 유물을 수리하거나 변형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감정을 형상화하고 조절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영성자여야만 한다. 감정에 깃들어 투사된 영성이 유물에게 유의미한 영향력을 미쳐야 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규칙을 설정해야 한다. 규칙이 없다면 유물은 변형될 수 없다.」
책을 덮고 하품을 했다. 사실 시문두하의 궁전에서 가져왔던 책들은 전부 심상 세계에서 독파한 지 오래되었으나, 지금의 긴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서는 이런 거라도 읽고 있는 수밖에.
눈앞에 있는 영매, 재클린은 휘적휘적 자신의 서가를 뒤지고 있었다.
“그, 근데 말이야. 좀 줄 좀 느슨하게 잡아주면 안 될까?”
“생각해보고?”
“아, 정말이라니까. 난 별로 암흑성도회가 믿고 있는 신에게 감화되거나 그러지 않았어. 난 그냥 우산 같은 것이 필요했을 뿐이라니까.”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악마 같은 놈.”
샤를은 불손한 재클린의 언사에 목에 걸린 줄을 당겨주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커헉. 그, 그만해.”
“이 대접을 받기 싫으면 빨리 찾아.”
“아, 나도 너무 오래된 건 모른단 말이야. 내가 이 서가를 얼마나 오랫동안 모았는지 알아? 특히 댁이 찾는 건 아주 오래전 거라고.”
또 징징대길래 다시 목줄을 당겨버릴까 하니, 재클린은 입을 다물고 자신의 서가에서 돌돌 말린 두루마리를 하나 더 꺼냈다.
빈민가에서 발견한 재클린을 그대로 납치, 그녀의 본가로 갔다. 메트로폴의 쥬가시빌리 거리에 있는 으리으리한 저택이었다.
돈도 많은 게 대체 빈민가에서 뭣 하러 그러고 있었는지는 여전히 이해가 안 가지만.
재클린에게는 그녀의 사업에 연관된 기록들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다.
가령, 웨스트허스트라는 남작에게 강령술을 거행해주고 대가를 받았다면 최신형 영사기(라고 해도 개발되지 않은 물건이었다.)를 사용해서 그간의 모든 기록을 남기는 일이다.
무슨 대화를 했고, 누구를 불러내려고 했는가, 무엇을 묻고 싶은가, 얼마나 더 물어야 하나?, 가격은 얼마나 받았지? 따위의 모든 기록이 영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재클린이 암흑성도회와 함께 일하고 있다는 걸 빌미로 샤를은 재클린을 속박하는 밧줄을 목에 건 채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아, 샤를씨. 근데 뭘 찾으라고 했더라? 악! 악! 그만 당기고!”
“천사에 대한 기록.”
“아, 알겠어. 대충 천사라는 단어가 한 번이라도 나온 기록을 찾으라고 했었지. 이제 기억났다니까. 악! 그만 당겨!”
샤를은 앞으로 일어날 일 한 가지를 미리 알고 있었다. 어쩌면 메트로폴 전체를 초토화할지도 모르는 거대한 사건의……전조라고 해야 하나.
암흑성도회는 샤를의 무명 교단을 제외하면 지금 제일 큰 교단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많은 인간이 직접적 간접적으로 엮여있었고 그 신도들은 전부 암격사에게 이 세계에 간섭할 수 있는 인과율을 형성해주었다.
신앙이 곧 힘인 이계의 신들은 그런 식으로 모은 인과율을 사용해 세상에 거대한 파란을 일으킬 사건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암흑성도회의 암천사’라고 불리는 사건이었다. 게임 속에서는 에피소드 제목이었겠지만, 지금은 그런 식으로 분류할 수 없지.
처음, 빚쟁이를 보고 별 감흥이 없었던 샤를은 그림을 그려서 무언가 꺼낸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영매 재클린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행적을 발견한 순간 그녀가 가진 아카이브에 대해 떠올렸다.
뭐, 반항을 좀 할 것 같으니 경매장에서 구매한, 영성을 봉쇄하는 능력이 있는 유물인 로즈마리 봉인줄을 이용해 반항하지 못하게 잡아둔 상태였다.
“그러니까, 이건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아! 이건가?”
영사기의 테이프를 찾아낸 재클린은 손가락을 들어서 말했다.
“아마, 이 안에 있었을 거야. 어떤 할머니와 인터뷰한 내용이었거든.”
“그럼 틀자.”
“저기, 그건 내 침실로 가야 하는 데.”
“가자고.”
“목줄 좀 놓고 얘기하면 안 될까?”
“목줄을 놓는 순간 안개나 박쥐로 변해서 도망친다는 것에 한 표.”
“아, 안 도망간다니까?”
문답 무용이다. 샤를이 그녀를 끌고 저택 내부를 걸었다. 재클린의 침소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벽면에는 재클린이 약을 빨고 그린 수많은 영적인 그림들이 그려져서 액자에 보관되어 있었고 기괴한 화풍의 그림들은 보기만 해도 몸서리쳐질 정도였다.
벽면의 유리 장식장에는 알 수 없는 고대 생물의 뼈와 기괴한 신대륙 원주민들의 가면, 호각 등의 물건 등이 놓여 있었고 각종 의식에 치를 2각 쇠막대기, 긴 사슬 줄이 달리고 금으로 장식된 펜듈럼, 탐사용 다우징 막대 등이 놓여 있었다.
이곳이 침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침대가 중간에 놓여 있다는 것뿐.
“진짜 점술가라는 느낌이네.”
“그래, 이 가짜 점술가야. 으겍!”
재클린을 생포해올 때 샤를은 도구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걸 보고 그녀가 하던 얘기였지만, 뭐 아무래도 좋다.
“내가 네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진짜로 깜냥이 있구나.”
“어? 죽으면 죽는 거지!”
사람이 죽고 난 뒤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느끼고 실현하는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다른 사람에 비해 더 초탈해지는 때도 있었다.
하지만 샤를은 지금 재클린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녀에게서 알아내야 할 것은 많으므로.
“재생해.”
“썩을, 하인을 불러와야 한다고.”
조금 있다 불려온 재클린의 하인은 깜짝 놀라서 샤를과 재클린을 바라보았지만, ‘플레이’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는지 담담하게 와서 세팅했다.
모든 커튼을 닫아서 방을 어둡게 일종의 영사실로 만든 다음 영상을 재생했다.
그곳에는 한 노파가 있었다. 이 노파도 집시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많이 늙어 보였다. 70대 이상?
음성 인식이 불가능할 때라 기록은 밑에 자막으로 대체되었다. 시작은 재클린의 조롱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왜, 오셨어요? 인연을 끊는다고 하셨으면서 말이에요.”
“늙은이한테 말버릇은 여전히 고약하구나, 어쨌든 마지막으로 네게 경고 하나 하려고 왔다.”
“경고?”
“이제 이 땅을 떠나는 게 좋을 거야.”
“또 그 얘기 시네. 이제 사업이 번창하고 있는데 내가 왜요? 내 능력을 날 위해 사용하는 게 뭐가 나빠요? 아, 천기를 누설하면 내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하지 마요. 어차피 그런 건 거짓말인 걸 다 알고 있으니까.”
화면 속의 노파는 재클린의 투정이 다 끝날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이 땅에 천사가 강림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 모두를 심판하겠지.”
“하?! 천사? 고모님, 진짜로 미쳤어요?”
“그 암흑의 천사는, 이 땅에서 가장 영적인 순수함을 보유한 아이가 선택될 거다.”
“영적인 순수함?”
노파가 답했다.
“바로 네 조카지. 그 아이를 데리고 이 땅을 떠나려무나. 이게 내 마지막 경고란다.”
“내가 왜? 꺼져.”
――――――띡.
영사가 끝나자마자 샤를이 재클린을 보고 말했다.
“고모도 집시이자 점술가인 모양이군. 의절했나?”
재클린이 썩은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런데요?”
“왜지?”
“왜긴 왜야. 당연히 점술을 사사로이 사용하지 말라고 그러니까 그렇지. 당장 입에 풀칠할 돈도 없는데 가지고 있는 능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바보야? 영적인 순수함을 지키는 게 살아남는 것보다 중요해?”
그것만이 이유는 아닐 것이다. 자기 남동생, 브루클린을 죽인 이유도 전부 돈 때문이었다. 아마, 이름 모를 노파가 연을 끊는다고 말했던 건 그 사건이 결정적이었겠지.
쌓인 게 많았는지 재클린은 한동안 씩씩거리더니 옆에서 아직도 서 있는 하인을 보고 괜히 화풀이했다.
“넌 뭐야!? 다 했으면 꺼져!”
하인이 깜짝 놀라서 방 밖으로 나갔다.
“천사에 대한 다른 기록은?”
“내가 알기론, 이것뿐이야.”
“조카는?”
“알 게 뭐야. 백인 남자랑 결혼한 그 여자의 딸 따위.”
기억을 되짚어보니 재클린은 삼 남매였던 것 같다. 이름 모를 장녀, 그리고 재클린, 남동생 브루클린이다.
그리고 여기서 조카는 재클린의 언니인 것 같다.
근데 자기 조카의 행방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니 말이 되나?
“모른다고?”
“이 도시 어딘가에 떠돌아다니고 있겠지. 아님 굶어 죽었거나.”
재클린에 대해서 파면 팔수록 이 여자는 끝도 없는 이기주의의 화신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부자가 될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으면서 떠돌아다니는 조카를 돌봐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인다.
“그 아이의 이름은?”
“샨티. 성은 잘 모르겠네. 그 남자 이름이 웬즈데일이었나?”
“흐음.”
“이제 나 좀 풀어주는 게 어때?”
“간단하게 풀어줄 순 없고. 서약을 하나 하자.”
“서약?”
“암흑성도회의 암격사를 믿는다는 것을 취소하고, 무명자를 믿겠다고 이 자리에서 서약하는 거지.”
“그걸 하면 풀어주는 거지?”
“물론이지.”
“나는 암격사를 배반하고 무명자를 섬기겠습니다. 이럼 됐어?”
샤를은 잠깐 눈을 감고, 심상 세계의 하늘에 넓게 펼쳐진 은하수 같은 밤하늘을 관찰했다.
그의 신도가 늘어날수록 별이 늘어나서 밤하늘에는 전부 은하수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은하수의 귀퉁이에 희미하게 반짝거리는 별이 보였다. 끔찍하게 낮은 신앙심을 보이는 별. 바로 재클린의 별이었다. 샤를은 그 별을 끌어다가 은하수 어딘가로 옮겨두고 현실로 빠져 나왔다.
이제 떨어져 있더라도, 샤를은 그녀를 관찰할 수 있게 된다. 강한 구속력을 가지진 못해도 관찰만 해도 충분하다.
“좋아. 그 정도면 충분하군.”
재클린의 목에 걸린 로즈마리 줄을 풀어주었다. 재클린은 자신의 목을 부여잡으면서 인상을 찡그리고 샤를을 노려보았지만, 소용 없는 짓이었다.
재클린은 점술가로서 어느 정도 능력이 있는 편이지만, 전투에는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다.
주문서 좀 읽을 줄 안다고 죄다 마도사가 아닌 것처럼 말이지.
“말해두겠는데, 이대로 암흑성도회에 가서 문제를 알리면 그 순간이 네가 죽는 날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난 널 감시할 수 있으니까. 메트로폴 밖으로 도망치는 것도 금지야.”
“꺼져.”
샤를은 그대로 저택을 나왔다.
샨티라는 아이를 언젠가 본 적이 있다고 기억했다.
‘강한 영성을 가진 집시 꼬마였지. 분명히 기자 벡토와 함께 존 도우를 추적하다가 본 적이 있었어.’
사탕으로 괜히 환심을 사려다가 오히려 아이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게 했었던 것이 기억난다.
노파의 말 대로라면, 아마도 샨티가 유력한 후보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리 가서 보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