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7화 - 오스굿의 설명을 들으면서 여태까지 모호하고 파편적이었던 사건이, 이제야 전체적인 얼개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 남대륙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원래 샤를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건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헤르메스가 세운 계획이었다. 시문두하를 자신의 하수인으로 삼아 남대륙에 강림시키려는 계획이라고 말했다.
렘 시대부터 남대륙에 있었던 시문두하는, 시간의 흐름에 휘말리고 여러 사건을 통해 죽음의 운명에 처하게 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시문두하는 나를 죽인 뒤에, 내 기록을 지우면서 악착같이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집착했었지. 하지만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죽음에 처하게 될 운명이라는 것을 어떤 예언자에게서 듣게 된다.
“……그게 헤르메스라는 것이군요. 그리고 그는 죽고 싶지 않으니 헤르메스에게 조언을 구했겠죠.”
-그렇다. 그리고 헤르메스는 시문두하를 자신의 권속에 두기 위해 그 방법을 일러줬지만, 사이사이에 그를 자신의 노예로 부리기 위해서 몇 가지 계략을 심어뒀다.
헤르메스는 시문두하와 거래를 해서 그를 자신의 권속으로 삼기 위해, 운명의 셉터를 사용해서 죽음의 운명을 회피할 방법을 가르쳐줬다.
그게 바로 시공간을 치환하는 방법이었다. 시문두하와 깊은 연관성이 있는 다섯 개의 시공간을 현대로 보내는 것에 성공한다면, 고대의 신인 시문두하가 남대륙에서 부활한다.
-아직 그에 대한 신앙은 남대륙 전체에 걸쳐서 퍼져 있다.
“영향력이 있다는 얘기군요.”
-그렇다. 다섯 번의 지진이 일어나고 시문두하의 영성이 깃든 다섯 개의 공간이 뒤바뀌면 그는 현실에 강림할 수 있다.
샤를은 턱을 괴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찾았던 암모나이트 모양의 석판에 관해서 서술하면서 금기와 거기에 적힌 글들에 관해서 오스굿에게 자세하게 이야기해줬다.
-그것 또한 헤르메스의 계략 중 하나일 것이다. 지략이 높은 자는 수많은 계획을 세우고 첫 번째 계획이 실패하면 두 번째 계획을 준비하지.
샤를이 읽었던 ‘금기’의 주인공은 결국 헤르메스였던 셈이었다. 만약 점술로 시간을 거슬러가봤더라도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할 것이 뻔했다.
“그렇단 말이군요. 하지만 제가 이 사건에 휘말린 것은…….”
-헤르메스도 알지 못했겠지. 석판을 가진 존재의 운명은 그 자신을 제외하면 누구도 읽지 못한다. 신적인 힘을 가진 존재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 말에, 샤를은 운명 조작에서 헤르메스의 운명이 담긴 선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을 떠올렸다.
헤르메스가 위대한 존재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석판 조각 하나를 가지고 있기에 운명 조작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뒤에 오스굿이 설명한 이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누군가, 어디에서, 신대문자를 해석할 수 있는 번역본을 구하게 된다. 그건 라이스 교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신대문자를 해석한 존재는 어떤 운명의 이끌림에 의해 남대륙에 오게 되고, 니무스 석판들을 읽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해석한 존재는 신대문자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시문두하가 부활할 수 있는 석판을 해석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스위치이다.
석판을 번역할수록 다섯 번의 지진이 일어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석자는 파멸을 맞이하게 되고, 동시에 위대한 시문두하가 아직 현대에 잔류한 신앙의 인도를 받아 시공간을 넘어 부활하게 된다.
“정말 비효율적이고 기괴한 방식이군요.”
-때론 신들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인과의 영향에 신경 쓰지 않는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것뿐이지.
인간의 인지 밖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들이 만든 계략이다. 도저히 앞뒤가 맞지 않고 비직관적으로 보여도 그들의 계략은 끝내 성공하게 된다.
“아무튼, 제가 이 사건에 끼어든 것은 그저 사고일 뿐이군요.”
-그렇다. 나도 이 시대에 나를 깨울 수 있는 존재가, 그것도 문글로즈가 예언했던 존재가 찾아오게 될 줄은 전혀 몰랐기 때문이지. 그러니, 그럴수록 중요한 것이다. 그대의 존재가 말이다.
그리고 오스굿이 선언하듯 말했다.
-그의 계략을 파훼하고 죽여라. 운명의 셉터를 가져와 네 것으로 삼아라.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운명의 맹점에 샤를이 서있었으니, 이 계획을 파훼하는 것은 그가 할 일이었다.
“어떻게 해야하죠? 다섯 번의 지진이 일어나기 전까지, 시문두하는 현실에 강림하지 않을 것이 아닙니까?”
-시문두하는 시공간을 넘어 현실에 강림하기 위해 자신의 영체를 다섯 개로 분리해 자신과 깊은 연관이 있는 공간에 봉했다. 첫째 그가 이 세계에 처음 도착했던 원시림. 깊숙한 곳에.
“…….”
차풀테펙 공원이다.
-둘째, 바로 나다.
“……!?”
-내 유해에 시문두하의 영성 일부가 깃들어있지. 내 손목뼈에 말이다.
“그래서 헤르메스가 석판에서 당신의 유해에서 손목뼈를 가져가라고 했었군요.”
그럼 헤르메스의 석판에 따르면 자동적으로 원시림에 있던 주술사의 목걸이에도 시문두하의 영성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어쩐지 4대 교단의 성물 급으로 강력한 힘을 갖고 있더라니 그 이유가 바로 이건가.
그럼 나머지도 추리할 수 있다. 탄치밀코 왕성에 있는 성해포에도 영성이 깃들어 있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도서관에서는 시문두하의 일기에 그 영성이 깃들어 있을 거다.
“하지만 그걸 전부 모은다면…… 결국 헤르메스의 계획대로 움직이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굳이 그걸 다 모을 필요는 없다. 다음 지진이 일어날 때까지 질질 끌 필요도 없느니라.
“네?”
-내 손목뼈에는 놈의 영성의 일부가 깃들어 있다. 왜냐면, 내가 죽기전에 놈에게서 강제로 뜯어낸 것이기 때문이지. 그리고 난 놈을 추적할 수 있다. 시공간 어디에 있건 간에 말이야.
“…….”
-넌 아직 석판의 힘을 제대로 끌어쓰지 못하는 모양이로구나.
“아쉽게도 말이죠.”
분명 심상 세계에서는 제대로 사용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네가 석판의 힘을 사용할 수만 있다면 편할 텐데 말이지. 흠. 그럼 어쩔 수 없나. 내 힘으로 널 놈이 잠들어 있는 시공간으로 날려보내줄 수 있다. 그리고 거기서 운명의 셉터를 빼앗는 거다. 셉터만 빼앗는다면, 계획을 철저하게 분쇄할 수 있어.
그리고 오스굿은 셉터를 잃게 된 시문두하는 신에서 인간으로 격하되고 죽일 수 있는 필멸자로 변한다고 했다.
샤를은 그 계획을 듣고, 오스굿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일단 그녀는 문글로즈와 매우 우호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석판을 너무 쉽게 샤를에게 건네줬다.
신과도 같은 힘을 지닐 수 있게 만들어주는 무가지보(無價之寶)일텐데 그걸 그냥 손짓 한 번에 건네준 것이다.
그것 만으로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었다.
‘하긴, 계략을 꾸밀 생각이었다면 내게 석판 조각을 건네지도 않았겠지.’
샤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고심해 본 결과 이 방법이 헤르메스를 엿먹일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이대로 진행된다면 말이지.’
-헤어지기 전에 선물을 주마. 이건 도약의 아스트롤라베다. 이계의 틈을 조건 없이 건너게 해주는 유물이지. 내 갈비뼈를 떼어내 만들었단다.
오스굿의 무덤 한쪽이 열리더니 그곳에서 아스트롤라베 하나가 떠올라 샤를에게 건네지기 시작했다.
지배의 권능을 사용하진 않고 그냥 받았다. 이제 그 권능을 사용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것이 많아졌다.
“감사합니다.”
-아스트롤라베를 보고 있으면 시공간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게 될 거다. 슬슬 포탈을 열어주겠다.
오스굿의 관에서 무언가 떠올랐다. 그것은 오스굿의 사체에 있는 손목뼈였다.
손목뼈가 허공으로 튀어오르더니 그대로 잘게 분쇄되면서 공간을 붕괴시키기 시작했다.
-이 길을 걸으면 고대 스노히 제국에 도착할 수 있을 거다. 위치는 궁전 앞이다. 준비 됐나?
“잠깐 정비좀 하죠. 1초면 됩니다.”
샤를은 강력한 적과 대적하기 전에 전력을 강화해야할 필요를 느꼈다. 플로나나 다른 사람들을 데려갔다간 정말 위험할 것이므로, 그들 대신 자신을 지켜줄 존재들을 찾는다.
심상 세계로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티마이오스의 정다면체를 열었다. 영성을 눈에 집중하고 바라보자 이 안에 다섯 마리의 생물체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해수 두꺼비와는 이미 계약을 체결했으므로, 다른 존재와 계약을 체결해서 전력을 늘릴 셈이었다.
다면체를 빙글빙글 돌려서 정십이면체로 전환했다. 우주를 뜻하는 그 다면체가 소환한 생물은 예전에도 보전 생물이다.
마치 공간이 휘어지는 듯 보이면서 튀어나온 해파리같이 촉수를 늘어뜨리고 붕붕 떠있는 존재.
기억조작자였다. 놈의 단추같은 눈동자가 반짝거리면서 소환자를 바라 보았다.
-호오. 이제야 소환했군. 언제쯤 그대와 대면할 수 있게 될지 궁금했노라.
“기억조작자. 나와 계약을 맺자.”
-계약? 좋지. 신의 길을 걷는 자여. 난 기억을 원한다. 그대의, 아주 소중한 기억 정도면 어떤가?
이새끼가 어디서 사기를 치려고 해?
“조까고. 내가 줄 수 있는 기억은 이것 뿐이야.”
샤를은 자신의 기억을 떠올렸다. 기억조작자는 그 기억을 보면서 단추같은 눈동자를 일그러트렸다.
-이건 뭐지?! 죄다 파인애플을 먹는 기억 뿐이잖나! 이건 소중한 기억이 아니야!
“혹시 꼬우신가요? 꼬우면 말던가.”
-크윽. 하지만 기억을 주는 주체가 강대한 위격을 가진 존재라면……. 이런 사소한 기억도 가치가 있긴 하지. 크응. 하지만 이래서야 손해인데.
“그래서 싫어?”
-아니, 계약하겠다. 후. 어쩔 수 없지. 좋다. 그렇게 하지.
기억조작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텔레파시를 보내면서 촉수 한 가닥을 뻗어 샤를의 이마에 대었다.
이상한 기억을 가져가려고 하면 그 즉시 놈의 몽실몽실한 배때지에 마탄을 박아넣을까 했는데, 기억조작자는 그런 짓을 할 생각은 없는 듯 했다.
“오, 신기하군. 정말로……무언가를 가져갔군.”
-그래, 이제 네가 파인애플을 먹었던 기억이 나는가?
“파인애플? 그런 걸 먹었다고? 아니, 전혀 기억이 안 난다.”
-그 기억의 양이 꽤 되는 군. 질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양적으로는 많으니 이 정도로 만족하겠다.
“호오. 그래? 파인애플에 대한 기억이 많이 좋지 않았다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지금이라면 매일매일 파인애플을 먹어도 질리지 않겠어.”
샤를은 대충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기억조작자와의 계약을 끝냈다. 그 존재의 마인드 컨트롤 능력은 매우 강력하므로 상대방을 무력화 시키기에는 탁월할 것이다.
그리고 대충 정다면체를 돌려가면서 나머지 존재들과도 계약을 끝냈다.
불 속성에서는 봉황처럼 생긴 거대한 새와, 대지 속성에서는 거대한 나무로 이뤄진 거인과 거래를, 공기 속성에서는 바람의 정령과 계약을 맺었다.
각자 바라는 것이 달랐다. 봉황은 자유를 원했고 나무 거인은 조건 부로 횟수를 채워서 전투를 해주겠다고 했다. 바람의 정령은 어떤 유물을 찾아달라고 했고.
대충 가계약을 때운 샤를은 그 뒤에 심상 세계를 벗어나 현실로 빠져나왔다.
-준비는 끝났나?
“네.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군요.”
-그럼 시문두하가 사는 시공간으로 보내주겠다. 도약의 아스트롤라베로 되돌아올 수 있을 거다.
샤를의 앞에 있는 공간으로 들어가자마자 눈을 감았다. 엄청난 빛이 점멸하고 몸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딘가에 빨려 들어가는 곳과 함께 그는 거대한 궁전에 도착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