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7화 - 이번 사건들은 계산 외였다. 트리메스 교수는 공허의 한 가운데 던져져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턱을 괴고 공허의 바다 위에서 둥둥 떠다니는 그는 여태까지의 사건을 복기했다.
만년필을 탈취한 것은 좋은 선택이 맞다. 그것으로 샤를 헥센을 괴롭힐 수 있었으니까.
근데 그것 뿐. 상대방은 자신의 유물의 능력에 아주 잘 대처했고 빈틈을 발견해서 이야기를 바꿨다.
“오히려 만년필을 탈취하지 않았더라면 이야기가 더 쉽게 흘러갈 수 있었을 지도.”
트리메스 교수는 그렇게 가정하다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만년필을 얻은 것 까진 괜찮았다.
그 뒤가 문제였다. 자신의 정보가 재단에서 노출되고 만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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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그에 관한 기록은 삭제되고 있을 것이 분명한데도,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 그의 위치를 알아낸 것이었다. 확실히 재단만큼 위협적인 집단은 전 세계에서도 그렇게 많지 않을 거다.
“그래서 정보가 샤를 헥센에게 새었다. 차라리 만년필이 없는 쪽이 나아.”
뒤에서 조작하는 방법은 만년필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할 수 있었으니까. 만년필을 탈취한 것이 샤를 헥센에게 강한 위협이 되었을테니 오히려 없는 쪽이 더 방심하고 있겠지.
마지막에, 트리메스 교수는 가까이 다가온 샤를 헥센에게서 괴테의 만년필을 빼앗겼다.
일부러 빼앗겨준 것이었다. 그 상태로 샤를 헥센을 공격할 수도 있었겠지만, 상대는 이미 대비를 하고 있을 테고 그를 죽여서도 안 된다.
샤를 헥센에겐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아무튼 재미는 있었네.”
간만에 즐겁다는 감정을 느꼈다. 그의 계획이 깨어지는 것은 그렇게 많이 있는 일은 아니었으니까.
샤를 헥센에게는 4대 교단이 위협적인 존재겠지만, 트리메스 교수에게는 재단이 더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당분간은 재단의 힘을 빼놓는 쪽으로 선회해야겠군. 어쨌든 원하는 것은 얻었으니.”
전투의 혼란한 상황 도중에, 투명화된 히드라의 머리 하나는 트리메스 교수의 명령을 잘 이행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전투 인형 알료샤를 그대로 강탈해왔다.
트리메스 교수는 손을 뻗어 알료샤의 심장에서 융합된 기계 심장을 꺼냈다.
인공적으로 제작된 것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조각 기계의 걸작품이었다.
“이것 자체로도 쓸만한 유물이지만.”
그러나 이 기계 심장에게 볼일은 없었다. 그의 손끝에서 뻗어나간 작은 빛이 기계 심장 속에서 파괴된 신성의 씨앗을 꺼냈다.
“드디어 두 번째 표본 완성이군. 아직 두 개나 남았나.”
파괴되지 않은 신성의 씨앗과 파괴된 신성의 씨앗이 모였다. 나머지 두 개의 다른 표본은 시간이 지나면 얻을 수 있게 될 것이었다.
“그럼, 이제 공허를 빠져나갈 때까지 느긋하게 쉬어볼까.”
검은 균열 속에서 트리메스 교수가 눈을 감았다.
*
샤를은 빌딩의 최상층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트리메스 교수가 벌인 일들, 그리고 샤를과 알료샤의 전투는 전혀 드러나 있지 않다. 여느 때처럼 평온한 신문이었다.
제롬이 각을 잡고 서서 뒷짐을 진 채 얘기했다.
부상 때문에 플로나는 저택에서 정양하고 있었는데 플로나 대신 그가 비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보고에 의하면, 조각구원회의 남은 잔당들은 메트로폴에서 탈출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주요 인물로는 데이저트스트 비드통, 마피아 보그다노프 등이 있습니다만.”
“됐어. 그쪽은 신경 쓸 것 없어.”
데이저스트 비드통은 강한 영성자이긴 하지만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리고 광신도인 만큼, 어디선가 조각구원회를 재건하려고 노력하겠지. 신성의 씨앗조차 빼앗긴 교단이 어떻게 회생하겠느냐마는.
보그다노프는 볼 것도 없는 잔챙이었다. 메트로폴을 도망친 뒤 도시로 흘러 들어가서 어딘가에서 양아치짓을 하겠지.
이로써 한 개의 세력을 완전히 리타이어 시켰다. 샤를은 그 점에서 하나 만족할 수 있었다.
조각 기계는 엔딩에 영향을 미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몇 가지 이유때문에 샤를은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가 없었다.
아직도 메트로폴에는 불안한 점이 너무 많다. 교주들이 상당히 많이 살아있다는 점.
그리고 트리메스 교수 같은 의외의 존재들. 사실 샤를이 제일 스트레스 받는 것은 바로 이 트리메스 교수의 존재다.
그에 관한 제대로 된 정보가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하! 애초에 헤르메스는 뒷설정 같은 거라고.’
설정상으로만 존재하는 강캐가 튀어나오면 기분이 어떻겠나. 한 번도 시나리오를 하면서 마주친 적이 없었는데 하필 지금.
여태까지 그가 모르는 사건들이 튀어나오더라도 그러려니 했지만, 이번에는 어려웠다.
그의 화신이 툭 하고 튀어나왔을 때, 샤를은 패닉에 빠질 뻔했었다. 간신히 정신을 붙잡았지만, 너프가 되었어도 트리메스 교수는 무서울 정도의 존재였다.
‘이번 사건이 이렇게 해결된 게 너무 이상해. 사실 이건 해결이라고 볼 수도 없지.’
샤를은 트리메스 교수가 한 일들을 복기해봤다. 그는 흑막처럼 움직였고 실제로 거의 성공할 뻔했다.
샤를이 석판의 힘을 깨우치기 전까지는 말이지.
그리고 마지막에 샤를을 죽이지는 않고 히드라가 무력화되자마자 사라졌다.
결국, 이 유물은 그의 손에 다시 되돌아왔다. 재단에서 나온 루크 웹스와 얘기를 해서, 결국 이 물건은 샤를이 보관하게 되었다.
‘음, 이 유물을 좀 더 다듬고 싶은데.’
유물은 특별한 존재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면 수정되고 다듬어질 수 있었다.
지금 이 상태로는 쓰고 싶지 않으니, 나중에 유물 제작자를 만나서 따로 수정하기 전까지는 심상 세계에 쳐박아둬야할 것 같다.
‘그런데 어째서 그는 이 만년필을 되돌려줬을까.’
샤를이 걸어가서 그에게서 강탈해오긴 했지만, 형식만 그럴 뿐이지 샤를이나 트리메스 교수나 둘 다 알고 있었다.
이 만년필은 트리메스 교수가 거저 준 것이나 다름없다. 격렬하게 저항하지도 않았고, 숨기려고 할 생각도 없었으니까.
‘이게 내 손에 있으면, 오히려 자신에게는 불리할 텐데.’
운명을 조작하는 계통의 유물이다. 샤를의 주문과 연계하면 시너지 효과가 날 수도 있는.
그리고 생각해보건대, 트리메스 교수는 샤를을 죽이려 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살기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당해주기만 했지.”
샤를이 패닉에 빠져서 긴장한 것 치고는 이 사건 자체는 너무나도 쉽게 넘어간 것이었다.
샤를은 트리메스 교수의 능력을 딱 하나 밖에 직접 보지 못했다. 주문서를 사용하는 능력 말이다.
나중에 가서야, 재단의 정보 공유 때문에 트리메스 교수에게 여러 다른 이능력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타인의 호감도를 세뇌 수준으로 올리는 능력, 기록되지 않게 만드는 능력, 총알에 벌집이 되어도 죽지 않는 능력 등등.
아마 공개하지 않은 능력도 상당할 것이 분명할 테니 그 인간처럼 보이는 껍데기도 전투력이 상당하다는 얘기였다.
‘그럼 내게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거야.’
추측해보건대, 아마도 이번 일처럼 샤를을 앞에 내세우고 또 뒤에서 흑막처럼 움직일지도 모른다.
‘그가 원하는 게 뭘까.’
샤를은 잠시 고민했다. 트리메스 교수의 궁극적인 목적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예언자가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전혀…….
하지만 근시적인 목표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바로 알료샤의 시체를 가져갔으니까 말이다.
당연히 기계 심장을 이용해서 뭐 기계적인 창조물을 만들 생각이 없을테니, 결론은 하나다.
트리메스 교수는 신성의 씨앗을 모으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 샤를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러다가 문득 샤를은 다른 교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제롬.”
“부르셨습니까?”
샤를이 말하자마자 곧바로 대기하던 제롬이 깎듯이 인사했다.
“헬파이어 클럽과 어부형제단의 교주들의 행방을 알아와.”
암흑성도회의 교주의 정보는 이미 제롬이 스파이 짓을 하면서 상당히 모아온 것이 있었다.
그러니 남은 두 교주가 위험하거나 혹은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하면 샤를의 가설이 맞아떨어지는 셈이었다.
“행방 말입니까?”
“갑자기 묘연해졌다던가, 어느 시점에서 신도들에게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을 테니.”
“알겠습니다. 조사해보겠습니다.”
“헬파이어 클럽은 메트로폴 동북부에 있는 디미츠 거리에서부터 시작해. 그리고 어부형제단의 교주는, 이 주소로 가고.”
샤를은 어부형제단의 교주가 숨어있으리라 생각한 몇 가지 주소를 거기 적어뒀다.
“그동안의 첩보는 한 명 더 영입한 사람 있지?”
“유스티나 말입니까?”
“그래. 유스티나에게 부탁해서 골레릭과 둘 다 조각구원회의 정보를 입수하게 해.”
“알겠습니다.”
그 사건 이후, 모리에게 집중적인 음악 치료를 받은 유스티나도 활기를 되찾고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샤를은 프리랜서가 된 유스티나를 영입하기 위해 거금을 얹어서 그녀를 고용하기로 했다.
본인도 만족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거부해야 할 이유는 그다지 없었으니까. 예전 직장인 MI7에 미련이 남아있는 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으니.
골레릭과는 아직도 사이가 좋아 보이기에 둘을 묶어서 암흑성도회의 첩보에 사용하고 제롬은 잠깐 헬파이어 클럽의 교주를 조사하게 해야겠다.
그 뒤, 샤를은 곧바로 저택으로 향했다. 이른 퇴근이었지만, 플로나가 걱정된다.
저택에서 나오자마자 마부 머르보니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여태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었는지 샤를이 나오자마자 급하게 달려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차에 탑승하고 저택으로 돌아가면서 그에게 물었다.
“아, 주인님께서 이렇게 이른 시간에 퇴근하실지 몰랐습니다.”
“그럴 것 없다. 근데, 무슨 일이야 보니?”
“아, 그게 말입니다. 음. 주인님, 혹시 그린 헛츠라는 곳을 아십니까?”
“그린 헛츠?”
“예. 원래는 마부들끼리 모여서 잠깐 식사나 하려고 만든 식당인데, 그린 헛츠에 마차가 아니라 자동차를 대도 되냐고 아는 마부들과 얘기하던 중이었습니다.”
“흐음.”
일종의 휴게소를 말하는 것 같다. 어라 그러고 보니, 이 시대에는 아직 제대로 된 휴게소가 없다. 잘 생각해보니 이것도 사업 아이템이 아닌가. 유마에게 생각해보라고 제안해봐야겠다.
곧 저택에 도착한 샤를은 플로나가 있는 방으로 갔다. 노크하고 살짝 열어본다.
쌔액. 쌔액.
곤히 잠들어 있는 것이 보인다. 얼굴은 창백하고 혈색이 안 좋다.
저택의 사람들에게는 플로나가 독감에 걸렸다고 설명했지만 사실 플로나는 유물의 부작용을 입고 있었다.
“모닝스타와는 달리 무장혈사제의 대검은 부작용이 심해.”
경매장에서 괜히 사뒀나 싶었다. 혹시 쓸 일이 있을지 몰라서 내버려 뒀던 건데 말이지.
신체 능력을 끌어올려서 한동안 알료샤와 대적할 수 있게 해주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리게 된다.
그 뒤로 치료를 해뒀지만 열이 상당히 나서 고민이었다. 플로나의 뺨이 홍조로 가득했다. 이렇게 새근새근 자는 걸 보니 귀엽네, 의외로. 아, 아니지 넘어가면 안 된다.
그때, 플로나가 곧 눈을 떴다.
“헤헤. 샤를님이 오셨네요.”
“좀 더 자.”
샤를은 플로나의 침대 옆에 앉아서 눈을 힐끗 돌렸다.
“아픈 것도 좋네요. 샤를님의 병문안을 받을 수 있다니.”
“말하지 말고 얼른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