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 “이런, 너무 날뛴 것 같군.”
트리메스 교수는 혀를 차면서 몸을 일으켰다. 여기저기 총을 맞아서 피투성이에 구멍투성이. 겉으로 보기에 산송장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는 마치 넘어져서 무릎이 까졌다는 듯 아주 느긋하게 말하고는 일어서서 자신의 페도라 모자를 탁탁 털어서 머리에 썼다.
옆에는 무언가에 씹혀서 아작 난 시체가 떨어져 있었다. 토끼 가면의 절반이 뜯겨 나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가면 자체에도 신비가 깃들어 있는 물건이었지만, 더 위대한 신비에는 찢겨지는 법이다.
“허상과 진짜를 구분하지도 못하는 얼간이들 같으니라고.”
래빗 팀이 보았던 공허의 괴수는 트리메스 교수의 진짜 모습의 빙산의 일각 정도였다.
거기다, 아무리 현실에 보이는 트리메스 교수를 쏴버린 들, 공허 속에 숨겨진 그의 진짜 신체를 없애버리지 않는 이상 쓸모없는 행위였다.
어리석은 추적자들에게서 신경을 그만 쓰기로 했다.
트리메스 교수는 괴테의 만년필을 꺼내서 얼마나 이야기가 진행되었는지 확인했다.
「알료샤는 체구가 작은 소녀처럼 보이는 인형이지만 무게는 성인 남성보다 몇 배는 무겁다. 그런 인형은 아무리 특이한 방법으로 움직이더라도 남들과는 다른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었다.」
“아직 추적 중인가. 이야기가 꽤 질질 끌리는군. 이야기가 금방 끝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 데, 그에게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있는 것인가?”
이것보다 충분히 더 빠르게 이야기를 끝마칠 수 있을 것이 분명하지만, 아직도 술래잡기하듯 빙글빙글 돌고 있다.
“하지만 이제 곧 끝난다.”
모든 소설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지금 펼쳐지고 있는 이야기도 언젠가 끝에 도달하게 된다.
“재단의 다음 추격이 있을 테니 빠르게 움직여야겠군.”
봉인재단은 끈질기기 그지없다. 이 정도 피해를 보았다고 해도 당연히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서 새로 추적을 시작하겠지.
그리고 이야기의 막이 내리는데 보러 가지 않을 수가 없다.
*
알료샤는 체구가 작은 소녀처럼 보이는 인형이지만 무게는 성인 남성보다 몇 배는 무겁다.
그런 인형은 아무리 특이한 방법으로 움직이더라도 남들과는 다른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었다.
발자국의 족적이 다르다. 샤를은 계속해서 알료샤를 추적하다가 곧 허름한 상점의 창고 안으로 이어지는 흔적을 발견했다.
그리고 알료샤를 발견했다. 요나스가 만들어낸 걸작품 전투 인형.
그것은 제 창조주의 심장을 열어 자신의 심장에 이어서 박아넣었다. 누군가 따로 조립해줄 사람이 없었는지, 조잡한 솜씨로 자신의 가슴에 기계 심장을 박아넣은 상태였다.
그래서 가슴이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인형 심장과 기계 심장은 볼트와 너트로 결합 된 것이 아니라 마치 생체 조직이 들러붙은 것처럼 융합되어 있었다.
“드디어 찾았군.”
“조각 기계의 대적자. 성배 조각품을 찬탈한 죄인이여.”
알료샤는 그런 상태로도 삐걱거리면서 움직였다. 가위검을 들어서 샤를을 가리켰다.
“그 단죄를 여기서 행하겠다.”
샤를은 품에서 권총을 꺼냈다. 하지만 첫 번째 공격은 바로 허공에 둥둥 떠 있던 파기나레코르였다.
-핫하 죽어라! 그로테스크한 인형!
알료샤의 뒤편에서 투명화를 켠 채 날아있던 파기나레코르는 은신을 해제하고 곧바로 무존자의 창을 퍼부었다.
불꽃을 피하면서 가위검을 들자 파기나레코르가 훌쩍 자리를 피하고 그 자리에 조지아의 석검이 나타나 가위검과 부딪혔다.
챙!
샤를은 여태까지 전투 인형 알료샤에 대해서 분석해낸 것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알료샤는 조각구원회의 다른 인형들처럼 신체의 소체가 인간이 아니다. 대부분 요나스 샤프트가 즐겨 사용하는 티타늄 등의 금속 소재다.
알료샤의 심장에는 알 수 없는 신비학 소재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림자 속에서 가위검을 꺼내는 이능을 발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위검에는 ‘절단’의 이능이 있다. 이 절단 능력은 유형, 무형의 모든 것에 적용된다.
화르르륵. 촤악!
예를 들어 지금처럼. 파기나레코르가 쏴댄 무존자의 창을 그대로 가위로 잘라서 절단한다. 허공에서 사라진다.
탕! 탕! 탕! 팅, 티팅!
샤를이 몇 번 마탄을 사격했으나 알료샤의 피부에 맞고 도탄되었다. 기계 심장을 흡수하기 전보다 방어력이 월등해졌다.
‘하지만 신성의 씨앗이 깃든 기계 심장을 몸에다 붙였다고 그 능력이 완전히 전이되는 것은 아니지.’
연사. 연사. 또 연사.
탄창 세 번을 갈 동안 자유 사격하자 알료샤의 신체 일부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알료샤의 진격은 조지아의 석검에 빈번하게 막힌다. 경매장표 명검은 훌륭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쯤 되자, 알료샤는 전략을 바꿨다. 우회해서 샤를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석검을 부숴버리는 것이었다.
알료샤는 가위검의 손잡이 양쪽을 잡고 벌렸다.
그러자 검의 안쪽 날이 드러났다. 날 안쪽에 무저갱 같은 어둠이 깃든다.
‘절단.’
절단의 방향에 걸리는 모든 물체가 그 경도와는 관계없이 그대로 잘려나갔다.
단단한 것이 장점이었던 조지아의 석검도, 그대로 마치 분리되듯 조각난다.
“아 내 검!”
-캬캬캬 또 부숴졌어! 새로 사야겠네 쭈인.
-끄응.
파기나레코르가 낄낄거렸으나, 조지아의 석검이 박살나는 동안 샤를은 나비들을 소환했다. 나비들이 뭉쳐서 나타난 백기사가 어느새 등장해서 다시 알료샤를 몰아붙였다.
백기사는 이전과 달리 힘으로 몰아붙이는 게 아니라 기술적으로 알료샤를 압도했다.
백기사의 노련한 검술이 계속 펼쳐지는 데도, 알료샤는 조금 밀리는가 싶더니 백기사의 검술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이미 힘은 백기사를 능가했는데, 기교에서 백기사를 따라잡기 시작하자 이제는 시종일관 몰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양날을 들어서 백기사의 팔을 ‘절단’했다. 허공에 잘려나간 백기사의 팔이 나비로 변해서 흩어졌다.
샤를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재차 손을 뻗었다. 백기사를 재구성하는데 드는 영성이 너무 많다. 멀리서 연결된 성배조각품에 의지를 집중해서 영성을 끌어왔다.
나비 주문을 연달아 사용하려는 찰나, 알료샤는 가위검을 들지 않은 손을 위로 들었다.
“찬탈자는 제 것이 아닌 영광을 누리지 못한다.”
그 손의 검지와 중지를 벌리고는 싹둑하는 가위 흉내를 냈다.
“뭐야?”
그러자 성배조각품과 샤를의 연결이 끊어졌다. 이런 적은 또 처음이라 샤를은 당황했으나 곧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성배조각품은 조각 기계의 성물이었다. 지금 기계 심장을 흡수 중인 알료샤가 그 성물과 샤를의 연결을 중지한 것이다.
‘지배의 권능을 사용했는데도 뚫어버리네.’
직접 품에 넣고 있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겠지만, 원거리에서 영성을 계속 지원받고 있었으므로 이런 일이 벌어진 거다.
‘여러모로 요나스보다 까다로워.’
점술 방어 능력에 상대방이 가진 조각 기계의 성물조차 사용을 금지하게 할 수 있다니.
결국 백기사의 팔은 복구하지 못했다. 재차 백기사가 밀리기 시작했다.
샤를은 얼마 전에 손에 넣었던 티마이오스의 정다면체를 꺼냈다.
-해수 두꺼비.
-좋아. 내 힘을 빌려주겠다. 근력과 체력으로.
정다면체에서 힘이 흘러들어왔다. 이제 근접전에 대비해서 충분히 속도에 밀리지 않게 되었다.
알료샤는 백기사의 틈새를 뚫고 들어와 샤를에게 무기를 가져다 대면서 가위날을 벌렸다.
그때 샤를의 발차기가 날 끝에 작렬했고 방향이 뒤틀렸다. 가위라는 것이 오묘해서 조금만 궤도가 수정되어도 베어야 할 방향을 제대로 베어내지 못한다.
일반인으로는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신체 능력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속도였지만, 샤를은 다른 전문화를 경험했던 적이 있으므로 능숙하게 적응해냈다.
두 번째 발차기로 알료샤를 뒤로 물러나게 만들면서 재차 백기사가 달려와 상대하게 한다.
알료샤의 전투 능력은 지금도 상승중. 마치 계몽주의자에게 잠식 당했던 유스티나를 떠올리게 하는 성장 속도였다.
샤를은 이 난관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곧 방법을 떠올렸다.
‘소리라면 어쩌면 가능할 지도.’
계몽주의자하다가 떠올라버렸다. 샤를의 심상 세계에는 계몽주의자의 오르골이 보관되어 있다.
소리를 듣는 쪽이라면 멈추게 될 거다. 지금도 신체 능력이 강해지는 중인 알료샤를 상대로 몇 초나 멈추게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이게 확실히 전환점이 되어줄 거다.
샤를은 곧 심상 세계에서 오르골을 꺼냈다. 상자를 열자마자 곧바로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조금의 빈틈이라도 있다면.’
그 틈을 타 제거할 수 있다.
백기사도 멈추고, 파기나레코르도 움직임을 멈춘다. 그리고 알료샤도 멈춰야 했으나, 알료샤는 멈추지 않았다.
‘하.’
샤를은 내심 움직여지지 않는 혀를 찼다. 이 오르골, 모든 것을 멈추게 하지만 그에 대한 부작용이 있었다.
〔부작용 : 오르골의 자의식이 주인을 언젠가 배신할 것이다.〕
분명히 그런 내용이었지. 왜 하필 이 부작용이 지금에 와서야 터지게 되었는가는, 도무지 추측이 가지 않는다. 어쩌면 괴테의 만년필이 벌인 시너지 효과일지도 모르지.
이렇게 샤를 헥센은 실수를 하게 되고, 알료샤에게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종장에 그렇게 적혀 있는지도 모른다.
샤를의 몸이 꽁꽁 얼어버린 것처럼 멈췄다. 찰나의 시간 속에서 공방을 벌이고 있던 알료샤가 이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자승자박인가.’
다른 의미에서의 자승자박이었다. 이렇게 격렬한 전투 도중에, 잠깐의 시간이 멈추게되다니.
점점 더 알료샤가 가까워지는 것이 보인다. 움직임을 멈춘 샤를을 보며 갸우뚱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표정과는 별개로 가위검을 든 손은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이상하리만치 느리게 날아왔다. 한 없이 느려 보이지만, 샤를은 꼼짝도 할 수 없다.
알료샤는 샤를의 목이 있는 방향으로 얼추 가위검을 돌리고는 그대로 양옆의 손잡이를 잡아당긴다.
이대로 ‘절단’하면 샤를의 목은 날아가고 그대로 죽는다. 그와는 반대로 머릿속은 타오를 것처럼 과열된다.
‘이게 최선이었나?’
다른 방법은 없었나? 왜 혼자 알료샤와 격전을 벌였지? 동료를 믿지 못해서? 그럴 시간이 업다고 생각했나?
왜 알료샤를 먼저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트리메스 교수가 흑막이라는 것도 깨달았고,그가 위협적이라고 생각했으면 그부터 먼저 공격해야 하지 않았을까?
아니야. 알료샤를 공격하지 않았으면 기계 심장을 더 온전히 융합시켜서 조각 기계가 가진 신성의 씨앗을 모두 흡수한 괴물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이게 최선이다.
두근두근.
심장 박동 소리가 한없이 느리게 가기 시작할 때, 샤를의 내면에서 무언가 울렸다.
곧이어 닥쳐올 죽음에서 눈을 떼고, 내면을 들여다본다.
나를 깨우라고, 무언가가 외치고 있었다.
무엇인고 하니, 그건 아직 소화되지 못한 세 번째 석판이었다. 일전에 샤를은 그 석판을 깨우면 엄청난 힘을 손에 넣게 될 것이라고 직감하고 있었다.
‘세번째 석판을 소화하게 된다면, 나는 주문조차 창조할 수 있게 된다.’
스스로 주문을 창조하는 능력. 그리고 무존자의 좌에 새겨진 문양.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오직 무존자에게 속한 주문.
중앙에 거대한 눈동자가 있었고 그 주변을 맴도는 수레바퀴의 모습이 보였다.
운명이란, 곧 시간을 인지하는 것.
그리하여 샤를은 새로운 주문을 창조해냈다.
운명을 뒤틀 수 있는 주문.
주저리주저리 문구를 외울 필요 없다. 마음 속에서 부르면 된다.
‘운명의 실.’
공간이 뒤틀리기 시작하더니, 샤를은 전혀 알 수 없는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