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사이비 교주가 되었다-137화 (137/221)

제137화 - 샤를이 일하는 곳을 크라이슬러 빌딩으로 옮긴 뒤에, 당연하게도 플로나가 전담 비서가 되었다.

샤를로서는 약간 스토커 기질이 보이긴 해도, 플로나만큼 손발이 맞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 점에서 플로나는 뿌듯함을 느꼈다.

‘후후. 그건 당연한 일이지.’

플로나는 자신의 비서실에서 으쓱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플로나는 샤를이 무엇을 하는지 다 알고 있었다. 언제 잠드는지, 무엇을 싫어하고 좋아하는지.

밖에 나가서 무언가 일을 하더라도, 샤를이 여자와 만나는 지 아닌지는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플로나의 예상대로 샤를은 밖에 나가서 연애를 하지는 않았다. 그분은 바쁘시니까.

근데 이해가 안 가는 것 하나. 어째서인지 파인애플은 매일 드신단 말이지.

‘그렇게 싫어하면서 어째서 매일 파인애플을 드시는 걸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쨌든 매일 먹으니 매일 가져다드린다.

유마가 사무실에서 얘기를 끝마치면서 나왔다. 조금 전까지 샤를과 대화를 나눴던 것 같은데 사업에 관련된 일인 것 같다.

“가시나요?”

“아, 넵! 이번에 형님이 제게 재무관리의 전권을 넘겨주셔서요. 할 일이 많네요.”

“안녕히 가세요.”

플로나는 싱긋 웃으면서 유마를 보냈다. 맨 처음에는 여자처럼 생겨서 매우 경계했으나, 자세히보니 남자였다. 거기에 형제. 세이프다.

“아, 언니 안녕하세요. 교단 일 때문에 샤를 님을 뵈어야 할 것 같아요. 빈민가 사람들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 중이거든요.”

“응. 이제 연락을 드릴게.”

플로나는 에세나를 사무실로 안내했다. 에세나는 맨 처음에 조금 위험하다고 생각했지만, 샤를님의 눈동자만 봐도 세이프였다. 거기다 요즘은 그 무용수랑 분위기가 좋은 것 같고. 밀어줘야겠다.

에세나가 나간 뒤에, 플로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다가, 곧 처음 보는 여자를 발견했다. 플로나의 기억 속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여자였다.

“아, 안녕하세요. 전 광명교단에서 왔습니다.”

플로나의 경계 센서가 울리기 시작했다. 순백처럼 하얀색 제복, 사파이어같은 푸른 눈동자와 오렌지색 머리카락을 가진 미녀였다.

‘누구지? 누구지? 누구지?’

플로나의 머릿속 데이터가 풀가동하고 있었으나, 도저히 누구지 알아낼 수 없었다. 적어도 플로나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여자가 분명했다.

하지만 처음 봤음에도, 왜인지 기분이 나빴다. 왜, 있잖은가. 이유 없이 싫어지는 사람.

*

똑똑.

오늘도 바쁘게 일 처리를 하고있는 도중에, 플로나가 번뜩거리는 눈빛으로 들어왔다.

샤를은 바짝 긴장했다. 저 눈빛을 봐라. 살인마의 눈빛이잖아. 저기서 조금만 더 하면 광기다.

“자신을 광명 교단에서 왔다고 소개해달라고 하더군요. 예전에 그분께서 말했던 협력자라고.”

“……들어오라고 해.”

누군지는 몰라도 꼭 만나야 하는 상대다.

플로나가 마치 입으로 ‘칫’이라는 혀를 찼던 것 같은데, 상대가 여자인 것은 확실한 것 같군.

문득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헬파이어 교단의 교주, 데미 송버드와 싸울 때 샤를은 차원을 넘나드는 도중에 광명자에게 하이재킹당했었다.

그때 샤를은 광명자의 화신 같은 것과 마주할 수 있었는데, 그는 샤를과 같은 방법으로 이 세계에 들어오게 된 ‘선배’였다.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광명자가 되어 있었고, 그때 그가 그랬었다. 샤를을 도와줄 협력자를 보내주겠다고 했었다.

들어온 협력자의 차림새는, 제롬이 보고 했던 광명 교단의 성녀와 똑같았다.

“안녕하세요? 소냐 에센리트라고 합니다.”

하얀색 제복, 사파이어같은 푸른 눈동자와 오렌지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이 가볍게 예를 표하면서 인사했다.

제롬은 이번에 암흑성도회 아슐라 계파가 일으킨 대성당 폭파 사건을 막아내고 그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줬다고 보고 했었다.

그 성녀가 협력자라고? 샤를은 예상외의 등장에 살짝 당황했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소냐 에센리트는 매우 정갈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샤를은 일어나서 그녀와 악수를 했다.

“앉아도 될까요?”

“아, 물론.”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 있을 때는 나가 있었던 플로나가, 이번에는 옆에 서 있는 걸 보고 속으로 실소를 지었다.

샤를은 소냐를 바라보았다. 겉으로는 평범한 소녀처럼 보인다. 하지만 제롬에게 들었던 얘기를 들으면 굉장하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대성당을 폭파하기 위해 들이닥쳤던 암흑성도회의 거대 계파 하나가 이 소녀의 손에 괴멸된 것이었다.

싱글싱글 웃으면서 소냐가 고개를 돌렸다.

“저, 손님인데 차 한 잔 마시고 싶어요.”

“어, 음. 플로나?”

“네.”

플로나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차를 타러 갔다.

소냐와 플로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서로를 싫어하고 있었다.

“혹시, 서로 싸우기라도 했는지?”

“아, 혹시 그런 적 없으세요?”

“뭐가 말이니까?”

“아무 이유 없이 싫은 사람이요.”

“아…….”

벌써부터 삐걱거리다니 약간 우려가 되는군.

“걱정하지 마세요. 샤를님께는 별로 악감정이 없거든요. 오히려 호감이죠. 뒤로 영성자들을 이용해서 저희 교단을 도와주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거든요.”

그 말은 즉, 플로나에게는 악감정이 많다는 얘기였다.

거기다 제롬과 골레릭이 광명 교단 모르게 그들을 도왔었지만, 벌써 알고 있는 줄은 몰랐다.

“차 내왔습니다.”

플로나는 싫어하더라도 어느 정도 선을 지키는 타입이었다.

대신 이런 스트레스가 쌓이면 진짜 아무도 모르게 멱을 따러 갈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플로나를 탓할 수는 없다. 원래 그런 성격이니까. 샤를이 해야하는 건 플로나가 폭주하기 전에 달래주는 거고.

그러나, 소냐는 차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말했다.

“광명자께서 제 꿈에 나와 말씀하셨습니다. 무명 교단과 협력하라고요.”

“직접적인 이야기군요. 그런데 광명자께서 다른 말씀은 없었습니까?”

“아, ‘아직’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하시더군요.”

“아직이라.”

아닌 것처럼 보여도, 샤를은 광명자에 대해서 미칠 듯이 궁금해 했다.

어떻게 알고 있는가? 혹은 이 세계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때가 되면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제게도 말씀해주지 않으셨거든요.”

“흐음.”

샤를은 턱을 괴고 생각했다. 광명자는 정보를 나누기를 거부하고 있는 듯했다. 극도로 조심스러운 움직임. 이건 누군가를 신경쓰고 있다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다.

뭘까? 광명자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리고 광명자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정도의 존재는?

생각을 하다말고 샤를은 입을 열었다.

“협력이라고 했는데, 어떤 부분에서 협력입니까? 보통 광명교단의 이단심문관은 다른 교단을 배척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거대한 대전략에서의 협력이지요. 이단심문관이나 사제들은 걱정할 것 없습니다. 그들은 무명 교단을 보더라도 신경쓰지 않을 것입니다.”

“대전략?”

“메트로폴 전체를 놓고 벌이는 경쟁이지요.”

소냐는 넓은 소매 안쪽에서 종이를 꺼냈다. 펼쳐놓고 보니 지도였다.

“메트로폴의 세력표입니다.”

메트로폴의 원형 모습이 보인다.

“광명 교단은 메트로폴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동쪽에 있는 암흑성도회, 서쪽 빈민가의 조각구원회, 남쪽의 어부형제단, 북쪽의 헬파이어 클럽이 있죠.”

메트로폴 전체가 알록달록하게 색칠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무명 교단은 서쪽에서부터 색칠되어서 메트로폴의 중앙으로 파고들어 있었다.

메트로폴 중심부는 헬파이어 클럽, 암흑성도회, 그리고 무명 교단이 파고든 모습이었다.

“메트로폴 중심부에서는 세 세력이 서로 세력권을 넓히고 있죠.”

“그렇군요.”

“광명자께선 무명 교단의 협력을 받아야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다.”

“흐음.”

전략적으로 나쁜 선택은 아니다. 광명 교단의 협력을 얻을 수 있다면, 무명 교단의 세력을 천천히 늘리 수 있다.

“어느 부분에서 협력할지 세세한 부분을 논하고 싶군요.”

샤를이 흥미를 보이자 소냐가 싱긋 웃으면서 지도를 가리켰다.

*

“음……플로나?”

헥센 가문의 집사노릇을 해오던 제이크는 지금 매우 조심스러웠다. 기분이 좋아보였던 플로나가 간만에 저기압이라는 표정을 팍팍내면서 들어왔기 때문이다.

경험상 저런 날에 잘못하거나 심기를 건드린다면 무지막지한 보복이 들어오기 때문에, 제이크는 분명 자신이 직위상으로는 플로나보다 위일텐데도, 늘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왜요?”

“오늘 저녁 메뉴는 네가 준비한다고 하지 않았니?”

“네. 얼마 전에 동방에서 가져왔던 그 약재는 있나요?”

“약재?”

“홍삼이요.”

“아, 코려인지 꼬레아인지 동방에서 가져왔다는 그 약재 말이냐? 잠시 기다려라.”

제이크는 주방장에게 일러서 재고품이 있는지 확인했다.

“있다고 하는 구나.”

“오늘은 디저트로 그걸 가져갈 거에요.”

“……왜?”

찌릿.

날카로운 눈빛을 본 제이크는 더 묻지 않고 찌그러들었다.

폭풍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니라.

슬금슬금 자리를 피한 제이크는 주방에서 대체 무엇을 하는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플로나는 요리를 만들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이게 정력을 올려준다지……?”

샤를은 오늘 매우 피곤한 하루를 보냈다. 저녁을 먹고나서 후식으로 홍삼을 대령할 예정이었다.

몸에 좋다는 음식을 다 해간 플로나는 샤를이 저녁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면서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대령한 디저트. 마치 사람을 형상화한 듯한 홍삼이라는 약재가 접시 위에 생으로 올라와 있었다.

“……이게 뭐니?”

“홍삼이래요. 먹으면 몸에 좋대요.”

“……그렇긴 한데.”

샤를은 홍삼을 생으로 올려온 플로나를 보면서 이 녀석을 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에 빠졌다.

“이건 생으로 먹는 게 아닌데?”

“예?”

“즙으로 짜서 먹는다고 들었거든.”

“어떻게 알고 계시죠?”

“그, 글쎄다.”

샤를은 플로나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녀석, 홍삼이 정력에 좋다는 걸 알고서 대령한 것인가?

“일단 먹어볼게.”

포크와 나이프로 홍삼을 조각낸 샤를은 그대로 입에 넣고 씹었다.

역시나 느껴지는 홍삼 특유의 끔찍할 정도로 쓴 맛.

“이건, 디저트로는 못 먹겠다.”

“그러면서도 다 드시네요?”

역시 내가 구해온 것이라, 다 드시는 걸까? 플로나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지만 몸에 좋아서 먹는 거다.

일단 사포닌이 몸에 좋거든. 요즘 엄청 피로했기도 하고.

샤를은 그녀의 시선을 회피했다.

“음, 오늘은 일찍 자야겠다.”

“예!? 어째서요!?”

“글쎄.”

플로나가 미묘한 눈빛으로 접시를 회수해 가져갔다. 샤를은 부르르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요즘 플로나의 애정공세가 심해졌다. 샤를이 계속 무심하게 대응하니까, 점점 더 격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솔직한 마음으로, 샤를은 별로 연애에 관심이 없었다. 아직 이 세계의 불안정성이 높기도 하고. 마음이 불안한데 지금 보이는 게 있냔 말이지.

“후.”

하지만 그래도 반쯤, 샤를은 플로나에게 마음이 가있었다. 집착은 그렇다치고, 플로나만큼 샤를에게 헌신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끌림에는 플로나의 예쁜 외모도 한몫했다.

‘하. 더러운 외모지상주의.’

이 세계에 빠지기 전, 현실의 그에겐 선택지 자체가 없었다.

‘그러고보니 기억조작자가 보여주었던 그 환상. 뭔가 말이 안 되긴 했어.’

수현이 그렇게 예쁜 여자랑 사귀게 되다니. ‘이게 나라냐!’ 외칠 수준의 현실 붕괴였다.

한 편, 플로나는 물러난 것이 아니었다. 일보전진을 위한 이보 후퇴였을 뿐. 식기를 정리하고 난 뒤 플로나는 숨을 내쉬었다.

“후욱. 후욱. 어떻게 하지? 들이닥칠까?”

야밤에 달려드는 거다! 자고 있을 때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난다면…….

‘하악. 하악. 이제 견딜 수 없어.’

요즘들어 이 열망이 커져만 간다. 샤를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

태양을 향한 이카로스의 열정이 커져가는 것처럼 플로나도 그렇다. 그녀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를 향해 돌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패배의 쓴맛을 보게 되더라도, 도전해본 것과 하지 않은 것의 차이는 명확했다.

마음을 굳게 먹고, 저번에 샀던 옷을 찾아보기로 했다. 분명히 이번에 신상으로 나왔다는 네글리제를 샀던 기억이 난다.

그때, 저택을 걷던 플로나는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풀려 있던 마음이 갑자기 조여지고 긴장감이 든다.

이 저택에, 플로나를 위협할 만한 누군가 있다. 플로나는 복도 끝에서 어떤 실루엣을 볼 수 있었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그 달빛 아래에 누군가 서 있었다.

0